제792호 김응구⁄ 2025.03.24 11:12:22
기업 사회복지사가 책을 냈다. 무려 17년 동안의 활동 기록을 엮었다. 책 제목은 상대방에게 직업을 밝힐 때의 대답 그대로다. ‘나는 기업 사회복지사다’
S-OIL 총무팀 CSR 신영철 책임매니저가 건네준 명함에는 ‘사회복지사’라는 단어가 이름 옆에 크게 적혀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 사회복지사로만 일해 왔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그럴 작정이라는 의미로 이해했다. 작은 종이 한 장이지만 두툼한 신뢰가 더해져, 명함이 꽤 무거웠다.
신영철 책임매니저는 “내 소속이나 직급은 중요하지 않다”고 했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믿음이 안 갈 수 없다.
- 사회복지를 전공하셨어요. 물론, 스스로 결정한 거겠죠?
“고등학교 때 담임선생님께서 추천하셨어요. 잘 준비해서 들어갔고, 다행히 성적도 좋아 4년 내내 장학금 받으며 다녔어요. 처음에는 잘 모르는 상태에서 시작했는데 차츰 공부해보니 제 적성과 잘 맞더라고요. 다른 친구들이 취업 준비하면서 영어 공부하고 그럴 때 저는 전공만 4년 내내 팠던, 좀 특이한 케이스였어요.”
- 그럼, 취업도 자연스럽게 이어졌겠어요.
“처음 직장이 사단법인 한국사회복지사협회였어요. 제가 들어갔을 땐 직원이 저 포함해서 세 명이었고요. 굉장히 열악했죠. 주 업무는 사회복지 정책과 행정이었습니다. 그러다 사회복지사 자격증 발급 업무가 협회로 이관되면서 전환점을 맞았어요. 그곳에서 7년 정도 있었는데, 나올 즈음엔 어느 정도 기틀이 잡혔죠.”
- 이직을 결심하게 된 이유가 있었나요?
“사회복지사협회는 이제부터 구성원들이 잘 끌어가면 될 듯했고, 대신 저는 좀 더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고선 사단법인 백혈병소아암협회로 옮겼죠. 당시 3~4년밖에 되지 않은 협회였는데, (사회복지사협회에서) 법인 운영이라든지 행정 업무를 오래 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4년 동안 정리부터 개선까지 도맡아 일했어요.”
- 그러고 옮긴 곳이 지금의 S-OIL이에요. 처음엔 사회공헌 분야 계약직으로 시작했죠?
“네. 제가 이곳에 입사했던 2000년대 중반은 기업의 사회공헌이 시작되던 시기였어요. 그때만 해도 일반 직원이 사회공헌 업무를 맡았는데, 사회복지사를 뽑는 과정에서 제가 경력직으로 들어온 거죠. 처음엔 저도 기업의 생리를 잘 모르는 데다, 사회공헌에 대해 어떤 마인드와 생각이 있는지 전혀 몰랐어요. 그래서 회사에 적응하는 것부터 시작했죠.”
- 처음 맡았던 업무가 뭡니까. 지금까지도 기억에 많이 남을 듯한데요.
“제가 오자마자 터진 게 태안 유조선 충돌사고였어요. 2007년 12월의 일이죠. 더구나 S-OIL이 정유회사잖아요. 그래서 매주 800~900명이 조를 짜서 봉사활동을 나갔어요. 저는 여기서 봉사활동에 필요한 물품을 준비해 보내는 역할을 맡았고요. 쉴새 없이 바빠 정작 태안 현장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요.”
- 당시 부서에는 혼자였나요?
“저 혼자였죠. 초창기에는 한 해 사회공헌 예산이 30억원 정도였어요. 이를 여러 곳에 잘 배분하는 게 중심 업무였고요. 그러면서 봉사단을 체계화시키고 정기 봉사 프로그램을 만들며 차츰 제 역할을 늘려나갔어요. 그렇게 해마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고 이를 확대하면서 지금까지 이어온 거죠. 지금은 한 해 예산이 100억원가량 됩니다.”
- 그러다 2년 계약을 마쳤는데, 곧바로 정규직으로 전환됐어요.
“저는 처음 입사했을 때 기업이 어떻게 운영되는지 잘 배워두자는 생각을 했어요. 훗날 다른 곳에 가더라도 그곳에 도움 될 만한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과 함께요. 한마디로 경험을 쌓자는 마인드였죠. 어차피 사회복지 일은 제가 계속해서 해야 할 일이거든요. 그래서 거의 주말도 없이 밤낮으로 일했어요. 경력직으로 들어왔지만 진짜 신입사원처럼 일했죠. 그랬더니 정규직으로 전환됐어요. 드문 케이스이긴 해요.”
- S-OIL 측에선 어떤 면을 좋게 평가했을까요.
“말씀드린 대로 체계가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봉사단을 만들고 ‘소방영웅’이나 ‘시민영웅’ 같은 사회공헌 프로그램도 추진하고, 그것들이 점점 커가면서 관심도 정말 많이 받았거든요. 그러다 보니 제가 계속 이어서 안 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거죠(웃음).”
- 개인적으로는 ‘시민영웅지킴이’라는 프로그램에 눈길이 쏠렸어요. 어떤 일인지 대충 짐작은 가지만요.
“오래전에 어떤 시민이 뺑소니 차량을 쫓는 과정에서 본인 차가 파손돼 결국엔 자기 돈으로 수리했다는 뉴스를 봤어요. 이렇듯 의로운 일을 하는 일반 시민이 많은데, 이런 분들을 모른 척하지 말고 도와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물론 정부의 의사상자 제도가 있지만 선정되는 게 여간 힘든 일이 아녜요. 그래서 만든 게 이 사업이죠.”
- 다른 기업에서도 하는 걸 봤어요.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많이 하죠. 제가 그 사업을 처음 기획해서 시작한 게 2008년인데, 당시에는 최초였어요.”
- ‘시민영웅’을 뽑는 기준은 어떻게 됩니까.
“인터넷 기사를 찾아보거나 경찰서·소방서에서 관련 자료를 받아 심사해요. 그 해에 의로운 활동을 한 시민 중에서 돌아가신 분이나 다친 분, 그다음 활동가 이렇게 세 분류로 나눠요. 보통 15명에서 20명쯤 뽑죠. 근데 이게 사회복지 업무로는 추진할 수 없는 일이에요. 어려운 분이 아닌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상을 주는 건 안 돼요. 그래서 한국사회복지협의회와 협약을 맺고 이 프로그램을 시작했어요.”
-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상이 있잖아요. 혹시 처음에 연락이 오진 않았던가요? 우리도 한 번 해보고 싶다, 이런 취지의 연락 말이에요.
“어차피 우리가 의로운 분들에게 다 상을 줄 순 없어요. 더 많은 기업이 더 많은 이에게 도움을 주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웬만한 건 모두 오픈했어요. 쉽게 말해, 우리가 10명 지원하는 것보다 10개 기업이 100명 지원하는 게 낫잖아요. 될수록 많은 분에게 도움을 주는 게 우리 역할이지, 내 사람만 도와주겠다고 욕심낼 일은 아니죠. 제가 사회복지사니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듯해요.”
그를 만나는 날, 오전에 S-OIL의 기사 하나를 송고하고 나왔다. 이날 한 이주여성 단체에 후원금을 전달했다는 내용이다.
S-OIL의 지원 대상은 이주여성 누구나가 아니다. 그중에서도 가정폭력피해 이주여성이다. 신영철 책임매니저는 처음 이 사업을 기획할 때 ‘다른 곳에서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면 굳이 우리가 하지 않아도 된다’, ‘우리만 하는 사업이라면 안 할 수 없다’ 이런 생각을 했다.
- 다문화가정 이주여성 중에서도 가정폭력을 당하는 이들을 위한 사업이에요. 시작하기 전에는 그런 사례가 없었나 봐요?
“사실 이주여성의 인권 문제인데 여기에 끼어들어서 부정적인 의견을 듣는 건 누구라도 원치 않죠. 현재 가정폭력피해 이주여성을 돕는 기업은 아무 곳도 없어요. 사회공헌 활동을 하더라도 이런 분야에는 거의 도움을 주지 않아요. 다문화가정은 괜찮아도 가정폭력이란 이슈는 기업에 부담스러운 거죠.”
- 이 일은 언제 시작하신 거죠?
“2013년이니까 12년째 됐어요. 처음 이 사업을 기획했을 때 아는 사람을 통해 같이 활동할 단체를 소개받았어요. 그곳이 한국이주여성인권센터예요. 앞서 말했지만, 당시 이주여성을 위한 후원이나 지원을 다른 기업에서 하고 있었으면 저희도 하지 않았을 텐데 그땐 아예 없었거든요. 남들이 하지 않는 일, 우리만 할 수 있는 일, 작게 하더라도 우리가 다 해줄 수 있는 일, 그런 콘셉트와 잘 맞아 시작했던 거죠.”
- 가정폭력피해 이주여성들은 집에서 쫓겨나 쉼터에 머물 텐데, 어떤 도움을 받는 건가요.
“집에서 나온 그분들은 갈 데가 없어요. 그래서 쉼터에서 당분간 거주해요. 애가 있는 경우도 많고요. 6개월에서 1년 정도 있으면서 상담받고 법적인 문제 해결하고, 그런 다음 나와야 하죠. 그럼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이때 저희 후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조금 드리는 거예요. 남들이 돕지 않는 분들을 꾸준히 돕는다는 게 핵심이에요.”
- 17년간 꾸준히 한 길을 걸었어요. 여태 수많은 사업을 기획했고 진행했잖아요. 모두 내 손을 거쳤다 해도 이 중에서 가장 기억에 많이 남는 일이 있을 듯합니다.
“좀 생뚱맞을 순 있지만 ‘천연기념물 지킴이’라고 초창기에 시작한 사업이 있어요. 저희가 정유회사여서 환경과 관련해 무언가 역할을 해야 해요. 근데 당시에는 일반적인 환경봉사 교육이나 쓰레기 줍기 정도밖에 없었거든요. 그래서 사회공헌 차원의 실질적인 사업을 해봐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천연기념물을 떠올렸죠. 그중에서도 멸종위기종을 찾아서 보호하는 역할을 하면 어떨까 싶었어요.”
- 당시엔 좀 생소한 일이긴 했겠어요.
“이곳저곳을 알아보다가 국가유산청(옛 문화재청)이 문화재 지킴이 사업을 하는 걸 알았죠. 그래서 천연기념물 지킴이 캠페인을 해보자고 국가유산청과 협약을 맺었어요. 천연기념물도 국가유산청이 관리하는 문화재거든요. 그때부터 수달, 두루미, 어름치, 장수하늘소, 남생이 등 다섯 종을 보호종으로 선정해 지금까지 관련 단체들을 지원하고 있어요.”
- 그 다섯 종 모두 관련 단체가 있나요?
“그럼요. 수달보호협회, 민물고기보호협회, 남생이보호협회… 다 있어요. 우리가 지원 사업을 하려면 그와 관련한 단체가 꼭 있어야 해요. 없으면 추진할 수 없어요. 그래서 협약을 맺죠. 우리가 후원하고 함께 봉사활동도 하려면 그 주체가 있어야 하니까요. 우린 아무 조건 없이 이 단체들을 후원해요. 환경단체들이 대개 열악하잖아요. 이분들은 진짜 어떤 도움도 없이 소명만 가지고 열심히 일하셔요. 강원도 철원에 가서 두루미들 먹이도 주고, 금강에서 어름치 방류도 하고요.”
- 사회복지 업무, 어떤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마지막으로 묻고 싶어요.
“대학교 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 중에 ‘웜 하트(warm heart)’라고 있었어요. ‘따뜻한 마음’이요. 저희가 사회공헌을 기획할 때, 우선 그 도움을 받는 대상자를 먼저 생각해요. 누구에게 어떤 도움을 줄지, 그분들 중심에서 생각한다는 말이에요. ‘난 여기 돕고 싶어’ 이게 아니라, 받는 사람의 상황을 먼저 파악하고 접근하는 거죠. 여기서부터 기획이 시작돼요.”
- 그럼 수혜 대상자가 꽤 많이 늘어날 텐데요.
“그렇죠. 옛날에는 장애인이나 노인 정도에서 그쳤다면 지금은 이주여성까지 생각하는 거죠. 장애인을 대상자로 정했다면 우린 남들이 접촉하지 않는 중증 장애인이나 희귀질환, 이런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겁니다. 대상이 정해지고 나면 그다음엔 자연스럽게 그림이 그려져요. 어떤 지원이 필요하고 무슨 프로그램이 필요하겠다는 그림 말이에요. 이후에는 그걸 가지고 기획서를 만들어 윗사람들을 이해시키고, 주도적으로 사업을 끌고 가는 거죠. 담당자가 얼마큼 그 일에 관심이 많고, 자기만의 기준을 갖고 접근하느냐에 따라서 오래 갈 수 있는지, 혹은 커질 수 있는지 판단이 되는 겁니다.”
발달장애인으로 구성된 ‘하트하트오케스트라’를 S-OIL은 2009년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후원하고 있다. 당시 중·고등학생이었던 단원은 지금 성인이 됐다. 재작년에는 단원 중 다섯 명을 계약직으로 채용해 작은 음악회도 운영 중이다. 4월부터 하트하트오케스트라는 장애인 표준 사업장으로 탈바꿈한다.
“장애인들이 한 곡을 연주하긴 위해선 수천 번을 연습한다고 해요. 잘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가 의미 있어 후원한 건데, 그게 이젠 어엿한 회사가 된 거죠.”
봉사(奉仕). 남을 위해 헌신을 다해 일한다는 뜻이다. 헌신(獻身)은 몸과 마음을 바쳐 있는 힘을 다한다는 의미다. ‘일방’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쌍방’이 된다. 그 시점은 받는 쪽이 주는 쪽의 봉사와 헌신을 깨닫는 순간이다. 그러니 하트하트오케스트라 같은 성과가 나오는 것이라 믿는다.
사회복지는 어려운 일이다. 남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가며 있는 힘을 다 쏟아내야 하는 일이다. 그걸 17년을 해 왔다. 긴 시간도 그렇지만, 처음과 지금의 마음이 다르지 않음을 더 칭찬해주고 싶다.
그래서 신영철에게 ‘나는 기업 사회복지사다’는 마침표가 아니라 중간보고의 성격이 더 짙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