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기괴해 보이는 풍경과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진 한 인물의 초상. 붉고 노랗고 또 파랗기도 한 강렬한 색감은 호기심과 동시에 불안감 또한 불러일으킨다. 이 오묘한 풍경은 영화 ‘더 셀(The Cell)’(2000)에 등장한 꿈 속 세계 같기도 하다. 바로 프랑스의 AI(인공지능) 아트 그룹 오비어스(Obvious)가 만들어낸 화면이다.
“인간 중심의 AI 디지털 아트”
오비어스가 한국 첫 전시회를 선화랑에서 열고 있다. 오비어스는 피에르 포트렐, 위고 카셀레스-뒤프레, 고티에 베르니에로 3인으로 구성된 프랑스의 AI 아트 그룹이다. 오비어스는 2018년 크리스티 경매에서 선보인 ‘에드몽 드 벨라미의 초상화’로 전 세계 미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AI 아트 작품으로는 처음으로 43만 달러(5억원)의 높은 낙찰가를 기록한 것.
AI와 예술의 경계는 미술계의 뜨거운 감자다. 창의성의 범주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 또 AI가 창작한 예술의 소유권은 누구에게 있는지 등을 둘러싼 논쟁은 첨예하다. 특히 첨단기술이 발전하면서 논쟁은 더욱 뜨거워지고 있다.
최근 데이터 플랫폼 기업 아이지에이웍스의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3월 27일 기준 챗GPT 국내 일간 활성 이용자 수(DAU)는 125만 2925명으로 역대 최다를 기록했는데, 이 중심에 신규 이미지 생성 AI 모델 ‘챗GPT-4o 이미지 생성’ 출시가 있었다. 해당 모델은 이용자가 입력한 사진을 미국 애니메이션 제작사 디즈니, 일본 애니메이션 제작사 지브리 등의 화풍으로 변환해준다. 다만 특정 콘텐츠 화풍으로 인한 저작권 침해 논란이 뜨겁다.
이 가운데 오비어스가 이번 전시에서 인간과 AI의 합작을 선보여 눈길을 끌고 있다. 전시를 기획한 선화랑 이준화 실장은 이번 전시를 한마디로 “인간 중심의 AI 디지털 아트”라고 표현하며, “사람의 뇌 속에서 이뤄지는 상상을 AI를 활용해 이를 현실로 꺼내놓았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마인드투 이미지(Mind-to-Image)’ 기술을 사용했다는 설명이다.
방식은 이렇다. 오비어스 멤버들이 자기공명영상장치(MRI) 기계에 들어가 주어지는 1000개 이상의 이미지들을 볼 때 생성되는 뇌 활동 데이터를 수집한다. 두 번째 단계에서는 이미지를 보지 않고, 앞서 기억해 둔 이미지를 기계 안에서 다시 떠올리고, 이때의 뇌파 데이터를 기록한다. 이후 무의식 속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기술하는 자동기술법으로 생성된 시적 텍스트를 읽고, 그에 따른 이미지를 마음속에 그릴 때의 뇌 활동을 기록한다.
마지막 단계에서 AI 알고리즘은 이 데이터들을 분석해 오비어스 멤버들의 상상 속 세계를 실제 시각 작품으로 구현한다. 완성된 작품은 300g 특수 질감 용지에 지클레 프린팅(Giclee Print·고해상도 디지털 프린트)과 4가지 블랙 딥잉크를 활용한 이중 인쇄 방식으로 제작되며 GNA 모델의 손실 함수로 서명된다.
이 방식을 거쳐 탄생한 초현실주의풍 풍경화와 초상화를 이번 전시에 꺼내놓았다. 전시명 ‘오비어스-초현실주의의 새로운 지평: 이매진(IMAGINE)’에서 한 번 더 짚고 있기도 하다.
“논리와 이성 벗어난 초현실적인 창조”
왜 초현실주의였을까. 오비어스는 “이번 전시는 1924년 초현실주의 운동을 주도한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 100주년을 기념하며 현대 기술로 초현실주의의 본질을 재해석하는 자리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1920년대 파리에서 시작된 초현실주의는 논리와 이성에서 벗어난 초현실적인 창조를 목표로 삼았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자동기술법을 사용해 의식적 개입 없이 자유롭게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렸다.
브르통 또한 초현실주의를 “이성의 통제를 배제한 채 생각이 자동적으로 표현되는 과정”이라 정의했고, 선언문을 통해 초현실주의를 단순한 예술적 흐름이 아니라 하나의 문학적·예술적 운동으로 규정했다. 이 선언 이후 초현실주의는 문학을 넘어 미술,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분야로 확산됐고, 20세기 현대 예술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살바도르 달리, 마르셀 뒤샹, 르네 마그리트 등은 현 시대에도 잘 알려진 초현실주의 예술가다.
오비어스는 “우리는 작업할 때 역사에서 영감을 얻는다. 특히 초현실주의 계통을 따라가고 있다”며 “100년 전 초현실주의가 시작될 때 정신적으로 힘든 사람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무의식에 대한 연구도 시작됐다. 우리가 사용하는 자동기술법 또한 사람의 의도적인 생각이 아니라 무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초현실주의 학파의 연구 방법의 하나”라고 말했다.
전시는 크게 세 개의 섹션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 섹션에서는 인간의 다양한 감정을 탐구하는 초상화 시리즈 9점을 전시한다. 각 작품은 불안, 기쁨, 공포, 멍함, 우울 등 인간의 복잡한 감정 상태를 AI가 어떻게 해석하고 시각화하는지 보여준다. 이를 통해 초현실주의자들이 탐구했던 인간 심리의 깊이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조명하고자 한다. 한 예로 ‘웨이브스 오브 미닝(Waves of Meaning)’(2024)엔 마치 내부의 장기들이 얼굴로 튀어나온 듯한 한 인물이 보이는데 이는 ‘혼란’을 표현한 초상화를 상상한 결과물이다.
두 번째 섹션은 풍경화 시리즈의 장으로, 작품 14점을 선보인다. 해당 작품들은 심연, 산, 바다, 늪지 등 오비어스의 무의식에서 떠오른 자연 이미지를 초현실적 감성으로 포착하며, 인간의 내면세계와 자연의 경계를 탐구한다. 이 섹션에서 소개되는 ‘인 더 셰도우 오브 어 쓰나미(In the Shadow of a Tsunami)’(2024)의 경우 강렬한 쓰나미가 지나가고 잠잠해졌으나 여전히 남아 있는 혼돈의 힘이 느껴진다.
마지막 섹션은 관객 참여형 미디어 아트 공간이다. ‘엑스퀴지트 코프트(Exquisite Corpse)’ 프로젝트를 통해 관객이 AI 드로잉에 직접 참여할 수 있다. 관객이 제시한 주제를 AI가 실시간으로 해석하고, 그림으로 구현하며, 여러 관객의 아이디어가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또한 오픈 AI 기술을 활용한 자동기술법 설치물은 초현실주의 대가들의 작품을 학습한 AI가 실시간으로 시를 생성하고, 분할식 게시판에 끊임없이 새로운 시구를 표현한다. 오픈 AI의 최신 텍스트-비디오 변환 기술인 소라(Sora)를 활용한 실험 영상 3편도 함께 전시한다.
“예술과 과학 경계 허무는 혁신적 시도”
오비어스는 모두 31세 동갑으로 어릴 적부터 교류해온 친구 사이다. AI 분야 박사 학위가 있는 멤버를 포함해 AI 알고리즘을 활용할 수 있는 기술자 등 단순한 예술가 집단을 넘어 과학 연구자로서의 면모 또한 보여 왔다. 이들은 AI 예술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바탕으로 2017년 그룹을 결성했고, 인간과 사회가 기술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져 왔다. 오비어스의 작업은 에르미타주 박물관, 중국 국립 박물관 등 세계 유수의 기관에서 전시됐다.
특히 AI 예술의 새로운 경계를 탐구하기 위해 소르본 대학교와 프랑스 국립연구원(ANR)과 협력했고, 이번 전시를 위해 사용된 마인드투 이미지 기술은 파리 뇌연구소(IMC)와 협력 개발했다. 오비어스는 “2017년 첫 시작 땐 AI 예술가들이 전무하다시피 했는데 현재는 큰 화두로 떠올랐다. 사람들의 AI 아트 접근 가능성도 크게 높아졌다”고 과거와 달라진 환경을 짚었다.
높아진 관심만큼 논쟁도 치열하다. 오비어스는 AI 예술에서 어디까지는 인간의 영역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 “AI 역할은 카메라와도 같다. 어떤 대상을 상상하고, 선택하는 중심엔 인간이 있다. AI는 이를 구현하는 툴로써 활용된다”고 답했다.
AI 예술의 독자성에 대해서는 “마인드투 이미지 기술은 툴이고, 결국 이 기반에 자리잡은 상상력은 사람마다 각자 다르다. 거기서 이미 고유성을 지녔다”며 “그리고 AI가 인간의 머릿속 이미지를 그린 이미지엔 리터칭(수정)을 전혀 하지 않는다. 여기에 친필 사인을 담아 세상에 딱 한 장뿐인 오리지널 작품이 탄생한다. 또 의도적으로 액자 구성까지 맞추면 작품이 완성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기존의 것을 따라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민감한 저작권 문제에 대한 생각도 밝혔다. 실제로 앞서 2월 뉴욕 크리스티 갤러리의 AI 아트 경매 취소를 요구하는 공개서한에 수천 명의 예술가가 동참한 사례가 있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과거 AI로 만든 애니메이션을 보고 “생명에 대한 모독으로 느껴진다”고 말하기도 했다.
오비어스는 “저작권 문제는 항상 인지하고 있다. 지금 우리에게 최선은 투명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작업할 때 저작권이 없는 이미지를 찾거나 여러 기관과 협력해 저작권 문제가 없는 이미지를 사용하는 등 매우 신중하게 접근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 나온 연작 또한 알고리즘에 따라 생성돼 저작권이 없는 이미지를 사용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이번 작품들에선 특정 화가의 화풍 또는 작품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없다”며 “결국엔 AI로 생성된 작품들도 저작권을 인정받을 수 있는 제도적 기반이 마련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오랜 역사를 지닌 보수적인 선화랑의 변신의 자리로서도 주목받고 있다. 1977년 문을 연 선화랑은 평면회화, 국내 원로 작가 위주의 전시를 주로 선보여 왔는데, 창립자 김창실(1935~2011) 작고 이후 2011년부터 며느리인 현재 원혜경 대표로 세대교체가 이뤄지면서 시대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다는 평가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이준화 실장은 원혜경 대표의 아들이다.
선화랑 측은 “이번 전시는 단순한 기술적 실험을 넘어 인간의 창의성과 기계의 능력이 만나는 새로운 예술 형식을 제시한다”며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허무는 혁신적인 시도로 국내 미술계에 새로운 자극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전시는 선화랑에서 5월 3일까지.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