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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림의 현대사진산책+] 물과 숲 그리고 장막

울라 폰 브라덴부르크,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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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천수림(사진비평)⁄ 2025.07.01 10:16:38

프랑스의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는 물을 인간의 감성, 꿈과 몽상, 죽음과 환생을 가장 은밀히 담아내는 물질이라고 봤다. 깊고, 어둡고, 무형의 상상력이 투사되는 원형적 매체로 본 바슐라르처럼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도 물을 몽상의 공간으로 삼았다. 브라덴부르크의 작품에서 자주 보이는 무대 위의 반복되는 제스처, 의례적인 움직임, 경계가 흐려진 인물들은 물과 닮았다. 태국의 작가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물처럼 숲을 활용한다. 두 작가는 영상 작업에서 숲은 브라덴부르크의 물과 장막과 같은 역할을 한다. 물 위로, 숲속 안에서 인물들이 떠다니고, 이야기가 반사되며, 현실은 환영 속에 숨거나 가라앉는다.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물 아래 그림자(Shadows under water)’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물 아래 그림자' 전시 전경. 이미지 제공=바라캇 컨템포러리

독일 예술가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의 국내 첫 개인전 ‘물 아래 그림자(Shadows under water)’가 바라캇컨템포러리에서 진행 중이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시아노타입 평면 작품과 클로린 평면작품, 커튼 설치와 5채널 영상 ‘아무도 중간을 그리지 않는다(Personne ne peint le milieu)’를 볼 수 있다.

브라덴부르크는 연극, 무대, 퍼포먼스, 설치, 회화, 텍스타일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며 보는 이로 하여금 환영(phantasm)과 실재(reality) 사이를 유영하게 만든다. 특히 그녀의 작업은 고전문학, 표현주의 연극, 프로이트 이전의 정신분석에서 영감을 얻은 주제와 이미지를 통해 무대와 장막, 움직이는 인물들, 색채의 리듬 속에 잠재된 시간성과 무의식을 다룬다. 이러한 브라덴부르크의 시각적 언어는 가스통 바슐라르가 ‘물과 꿈(L’eau et les rêves)‘에서 말한 물의 이미지들과 연결돼 있다.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아무도 중간을 그리지 않는다'. 스틸 이미지. 2019. 이미지 제공=작가

브라덴부르크의 대표적 영상 설치작 중 하나인 ‘황금빛 붉은 태양과 노인의 초록 달(It Has a Golden Red Sun and an Elderly Green Moon)’(2008)은 천으로 만든 장막 뒤로 배우들이 움직이는 연극적 시퀀스를 한 테이크의 롱 샷으로 촬영한 것이다. 고정돼 있지 않은 무대에 배우들은 상징적인 행동을 반복하고, 장막은 감추고 드러내기를 동시에 수행했다.

이 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는 ‘아무도 중간을 그리지 않는다(Personne ne peint le milieu)’(2019)와도 연결된다. 이 작품은 작가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최서단에 위치한 피네스테르주 레지던시에서 머물던 중에 제작됐다.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드레스, 리본'. 종이에 시아노타입, 159x121 cm. 2025. 이미지 제공=바라캇 컨템포러리

그는 이 지역에서 발견한 사물들을 물속에 가라앉히고 수중 촬영을 진행했다. 5채널 영상에는 바닷물에 부채, 밧줄, 거울, 빨간 리본, 천, 혁명에 관한 책, 구겨진 셔츠, 그물망, 빨간 메리 제인 슈즈, 수정구슬이 낙하하는 장면이 각 채널에 담겨있다. 이 리듬은 물의 흐름, 물결, 되풀이되는 파동을 연상케 한다. 이 장면들은 바슐라르가 말한 ‘몽상하는 자의 시간’을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녀의 작업에서 ‘장막’은 물의 표면처럼 느껴진다. 장막은 무대와 관객 사이를 가르지만, 동시에 그것은 반사하고 투과하며 새로운 환영을 만든다. 바슐라르는 물을 ‘거울과도 같되, 진실을 왜곡하며 더 깊은 진실로 이끄는 표면’이라 했다.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 '클로어(라이트 그레이)와 드림캐쳐'. 2020. 이미지 제공=바라캇 컨템포러리

신작 시아노타입 연작 ‘드레스, 리본(Dress, Ribbon)’, ‘셔츠, 스커트, 블록(Shirt, Skirt, Blocks)’, ‘막대, 통발, 달(Sticks, Fishtrap, Moon)’, ‘천, 리본, 박스(Cloth, Ribbon, Boxes)’, ‘탬버린, 천, 실(Tambourin, Cloth, Thread)’(2025)은 햇빛과 화학적 반응을 이용해 이미지를 남기는 청사진 인쇄 기법으로 제작됐다. 이 이미지들은 고정된 것이 아닌 흐름의 순간을 붙잡아 둔다. 프러시안블루의 깊은 바탕에 사물의 그림자를 포착한 작품들은 마치 물이 형체를 부유시키듯 그 실루엣을 빛으로 붙잡으며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작가의 또 다른 평면 작업 ‘클로린 연작’(2020)은 멀리서 보면 마치 추상회화처럼 보이지만 실은 염소 프린트 기법을 활용한 사진작품이다. 코튼 아래 다양한 사물들과 인간 신체를 배치하고 주름을 잡은 후 그 위에 염소 화합물을 분사해 주름과 오브제의 윤곽을 빛처럼 희미하게 남긴다. 마치 장막 뒤에 배우가 있었던 것처럼. 실루엣은 관람자에게 또 다른 차원의 존재가 있음을 상상하게 만든다. 시아노타입과 클로린 작업은 사물들과 인간 신체의 그림자와 실루엣을 통해 현실과 저 너머의 경계를 오가는 상징적 은유를 드러내면서 관람자의 인식과 경험을 확장시킨다. 이때 장막은 ‘물의 피부’와 같은 역할을 부여받는다.

고은사진미술관+루프 랩 부산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불꽃 (아카이브)'.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6분 40초. 2014.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1부산 ©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고은사진미술관 별관), Apichatpong Weerasethakul

태국의 영화감독이자 시각예술가인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불꽃 아카이브(Fireworks (Archives)’는 그의 대표작 ‘엉클 분미가 자신의 전생을 기억한다’ 제작을 위한 리서치 과정에서 수집된 아카이브를 재조립한 설치작업이다.

고은사진미술관과 부산시립미술관이 공동 주최, 루프 랩 부산이 협력해 진행한 ‘고은사진미술관+Loop Lab Busan’(4월 18일~6월 29일)에서 아피찻퐁 작가와 함께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영상 작품도 선보였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불꽃 (아카이브)'.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6분 40초. 2014.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1부산 ©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고은사진미술관 별관), Apichatpong Weerasethakul

불꽃 아카이브는 태국과 라오스 국경 근처 메콩강가에 자리한 사원이자 조각공원인 사라케오쿠에서 펼쳐지는 불꽃놀이를 다룬다. 마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질 때처럼 불꽃이 번쩍일 때마다 신을 형상화한 조각상들이 드러난다. 노부부가 숲을 천천히 거니는 모습은 그들이 살아있는 자들인지, 그저 평범하게 산책하는 이들인지 모호해진다. 숲은 자연경관을 넘어서 기억의 장소이자, 망각한 역사적 인물들(이미 유령이 된)의 서식지다.

이곳은 20세기 중반 냉전기, 태국 정부의 공산주의자 토벌과 관련된 폭력의 장소다. 아피찻퐁은 이 숲을 통해 기록되지 않은 역사, 즉 망각한 아카이브를 환기시킨다. 영상 속 사진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기록하지 않는 집단기억이 은신한 장소에서 불꽃놀이를 통해서만 드러난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을 위한 노래'. HD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0분 18초. 2021.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1부산 ©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고은사진미술관 별관), Korakrit Arunanondchai 

방콕과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 중인 태국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영상작품 ‘죽음을 위한 노래(Songs for Dying)’(2021)는 작가가 할아버지의 임종과 장례 절차를 직접 겪는 경험에서 출발했다. 영상은 할아버지의죽음을 중심으로 개인적인 상실감, 종교적, 전통적 의식, 정치적 폭력 사건인 태국 민주화 운동, 제주4·3사건 등 역사적 사건과 죽어가는 거북이를 위해 노래하는 샤먼의 모습 등이 중첩된다. 태국 민주화 운동은 2014년 군부 쿠데타 이후 국민·학생들이 군사·왕실 권위에 반발하며 촉발된 운동이다

죽음을 위한 노래는 태국 전통 샤머니즘을 정치적 기억의 복원과 죽음에 대한 비서구적 감각을 수행하는 의례적 미학으로 확장된다. 이 작품에서 샤먼은 망각된 영혼을 부르고, 식민성과 군사독재의 폭력 아래 억압된 역사들을 불러들이는 중개자다. 시위 장면은 제주의 유령의식과 연결되며 공권력 하의 죽음과 망각된 역사와 집단적 기억의 회복을 시각화한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 '죽음을 위한 노래'. HD 단채널 영상, 컬러, 사운드, 30분 18초. 2021. 울산시립미술관 소장 1부산 © 프랑스문화원 ART SPACE (고은사진미술관 별관), Korakrit Arunanondchai 

영상 속 샤먼은 죽음을 끝이 아니라 공존의 가능성으로, 억압된 과거를 망각이 아닌 현재로 불러오는 살아 있는 이미지의 주술사 역할을 맡는다. ‘우리는 물을 바라보며 꿈꿀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본다’는 바슐라르의 말은 이 세 작가에게 적용된다. 마치 꿈에서 이미지가 천천히 드러나듯, 우리를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 사이에 서게 만든다.

<작가 소개>

울라 폰 브란덴부르크(b.1974, 독일 카를수르에)는 독일 카를수르에 예술대학에서 무대디자인을 전공하고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순수예술을 수학했다. 주요 개인전으로는 함부르크의 에른스트 발라흐 하우스 미술관(2025), 에스파스 루이 비통 오사카(2024), 스페인의 레이나 소피아 미술관(2023), 쿤스트뮤지엄 슈투트가르트(2022), 독일의 베저부르크 미술관(2021), 팔레 드 도쿄(2020),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2018) 등이 있다. 주요 단체전으로는 파리의 퐁피두 센터(2015, 2017), 루이비통 파운데이션 파리(2015), 뉴욕의 퍼포마15(2015), 제 11회 리옹 비엔날레(2011), 제 53회 베니스 비엔날레(2009), 테이트 모던(2007) 등이 있다. 폰 브란덴부르크는 마르셀 뒤샹 후보(2016), 핀켄베어더 미술상 수상 등 그 외에도 다수의 국제적인 수상이력이 있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b.1970, 태국 방콕)은 태국 출신의 영화감독이자 시각예술가. 태국 콘켄대학에서 건축을 전공, 시카고 예술대학에서 영화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90년대 초부터 영화 연출과 비디오 작업을 시작했다. 이후 실험영화와 독립영화를 제작하며 활발한 활동을 하던 작가는 2000년 첫 장편 ‘정오의 낯선 물체(Mysterious Object at Noon)’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전시와 설치 작업은 1998년부터 이어왔으며, 2015년 아피찻퐁의 첫번째 퍼포먼스 작업인 ‘열병의 방(Fever Room)’이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초연됐다. 2009년 뮌헨 하우스 데어 쿤스틴, 2011년 뉴욕 뉴 뮤지엄, 2016년 치앙마이 마이암 컨템포러리 아트 뮤지엄, 2012년 카셀 도큐멘타 13, 2019년 타이베이시립미술관 등에서 전시했다. 영화 ‘메모리아(Memoria)’ 2021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엉클 분미(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2010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열대병(Tropical Malady)’ 2004년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친애하는 당신(Blissfully Yours)’ 2002년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b.1986, 태국 방콕)는 2009년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 스쿨을 졸업하고 2012년 콜롬비아 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는 미국 뉴욕과 태국을 오가며 활동하고 있다. 2014년 뉴욕 모마 PS1에서 첫 개인전, 2015년 파리 팔레 드 도쿄, 베이징 올렌스 현대미술관, 2016년 겐트 S.M.A.K., 2019년 비엔나 시세션, 2020년 포르투칼 세베스 현대미술관, 2022년 취리히미그로스 현대 미술관, 스톡홀름 모데나뮤제, 한국의 아트선재센터와 국제갤러리, 2023년 로스앤젤레스 클리어링 외 다수의 개인전. 2019년의 베니스 비엔날레, 휘트니 비엔날레와 이스탄불 비엔날레, 2021년 광주비엔날레를 비롯 주요 비엔날레 및 단체전에 참여했다.

글: 천수림
이미지 제공: 바라캇 컨템포러리, 부산 프랑스문화원 ARTSPACE(고은사진미술관 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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