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지난달 22일 성장전략TF 겸 경제관계장관회의를 열고 에너지·전력망·첨단소재 등을 포함한 ‘15대 초혁신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이 내용에 따르면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1단계 완공 목표를 2031년에서 2030년으로 1년 앞당겨, 수도권 등 전국에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할 인프라를 구축한다.
초고압직류송전(HVDC)을 기반으로 한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는 총 440㎞의 해저케이블이 투입되는 초대형 프로젝트다. 전북 새만금에서 경기도 화성까지 약 220㎞ 구간에 해저케이블 왕복 2회선을 설치해 총 2GW(기가와트)급 전력망을 구축한다. 케이블 제작과 포설에는 특수 선박과 고난도 시공 경험이 필수다. HVDC는 HVAC(초고압교류송전) 대비 먼 거리까지 전력손실을 최소화하며 송전하게 해주는 기술이다. 이에 HVDC 기술은 에너지고속도로 구축 사업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HVDC 케이블 시장은 해상풍력 확산과 장거리 송전 수요 증가로 빠르게 성장하고 있지만, 기술 난이도와 대규모 인프라가 요구돼 공급 가능한 기업은 전 세계적으로 소수 업체에 불과하다. 특히, 장거리 HVDC 시공에는 1만t(톤)급 이상의 전용 포설선이 필수로, 생산·시공 역량을 모두 갖춘 기업만 글로벌 수요에 대응할 수 있다.
국내 전선업계는 약 11조원 규모의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 수주를 위해 각자의 경쟁력을 내세우며 대응에 나서고 있다. 이에 따라 국내에서 유일하게 해저 HVDC 케이블 공급과 시공 경험을 동시에 갖춘 LS전선과 계열사 LS마린솔루션이 주목받고 있다.
이르면 내년 초쯤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자 선정이 이뤄질 전망이다.
亞 최대급 HVDC 케이블 생산설비 확보
LS전선은 최근 강원도 동해시 해저케이블 공장 내 5동을 준공함에 따라 HVDC 해저케이블 생산능력을 기존 대비 네 배 이상 확대했다. 이번 증설로 LS전선은 아시아 최대급 HVDC 케이블 생산설비를 확보하게 됐다.
최근 계열사 LS마린솔루션이 HVDC 전용 포설선 신조 투자를 결정한 것과 맞물려, 생산부터 시공까지 아우르는 턴키(일괄수주) 수행 역량을 본격적으로 구축하는 전환점이 될 전망이다.
해저 5동에는 수직연속압출시스템(VCV) 라인이 추가돼 해저케이블의 생산 경쟁력과 공급 안정성이 크게 강화됐다고 회사 측은 설명했다. VCV는 수백 ㎞급 장거리 고전압 케이블 생산의 필수 설비로, 절연 품질과 전기적 안정성을 좌우한다.
LS전선 관계자는 “글로벌 HVDC 케이블 시장은 2030년까지 약 40조원 규모로 성장할 전망”이라며 “이번 설비 확충과 함께 정부가 추진 중인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에 LS마린솔루션과 공동 참여를 적극 추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때마침 LS전선은 얼마 전 1600억원 규모에 이르는 대만 ‘포모사(Formosa) 4’ 프로젝트의 해저케이블 공급 계약을 체결했다. 대만 해상풍력 시장에서 10회 연속 수주에 성공한 쾌거다.
포모사 4는 대만의 해상풍력 개발사 시네라 리뉴어블 에너지(SRE)가 서부 18㎞ 해상에 조성하는 495㎿(메가와트)급 단지로, 대만 정부의 해상풍력 상용화 2단계 핵심 사업이다.
LS전선은 2019년 대만에서 첫 해저케이블 계약을 따낸 이후 상용화 1단계 모든 프로젝트(총 8건)를 수주했다. 이어 2단계 첫 사업인 ‘펑미아오(Fengmiao)’는 물론 이번 포모사 4까지 연속 수주에 성공하며 입지를 굳혔다.
회사 관계자는 “LS전선은 대만에서 덴마크의 해상풍력 개발업체 오스테드 등 글로벌 개발사와 협력하며 사업 경험을 축적해왔다”면서 “연속 수주 성과는 이런 경험과 신뢰가 뒷받침된 결과”라고 말했다.
LS전선이 대만에서 쌓은 경쟁력은 자회사 LS마린솔루션으로 이어지고 있다. LS마린솔루션은 지난 4월 대만에서 해저케이블 매설 계약을 수주, 국내 해저 시공사 최초로 해외에 진출했다. LS전선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기반으로 ‘생산–시공’ 가치사슬(밸류체인)이 본격 가동된 셈이다.
대만은 해상풍력으로 올해까지 5.7GW를 확보하고, 2035년까지 15GW를 추가해 총 20GW 이상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향후 해저케이블 자재·시공 시장만 5조원 이상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국내 유일 HVDC 해저케이블 공급·시공 경험
LS마린솔루션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HVDC 해저케이블 공급과 시공 경험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기업이다.
회사는 지난 6월 30일 튀르키예 테르산(Tersan) 조선소와 해저케이블 포설선 건조 본계약을 체결했다. 이번 계약을 통해 케이블 적재 중량 1만3000t, 총 중량 1만8800t의 초대형 HVDC 포설선 건조에 착수한다. 아시아 최대이자 세계 톱 5 규모로, HVDC 해저케이블과 광케이블을 동시에 포설하는 고사양 장비를 탑재한다.
특히, 장거리·대수심 해역에서도 접속 손실을 최소화하는 구조로 설계돼 HVDC 전력망 구축에 최적화된 기술력을 갖춘다. 현재 전 세계에서 이와 유사한 사양을 갖춘 선박은 단 세 척에 불과하다.
선박은 약 2년간의 건조를 거쳐 2028년 상반기 운항을 시작하며, 미국 LS그린링크 해저케이블 공장과 연계해 설계·생산·시공을 아우르는 글로벌 턴키 수주 체계를 가동할 예정이다.
테르산 조선소는 해양선박·어선·특수선 건조에 특화된 조선사로, 신재생에너지 관련 특수선박 건조에서 유럽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다. 대형 특수선에 최적화된 생산 인프라와 안정적인 납기 이행 능력 역시 이번 계약 체결의 주요 배경이 됐다.
LS마린솔루션 관계자는 “이번 투자는 단순한 장비 확보를 넘어, 글로벌 전력 인프라 경쟁력을 강화하는 전환점”이라며 “HVDC, 부유식 해상풍력, 디지털 해저망 등 폭발적으로 성장 중인 해저 인프라 시장에서 확실한 주도권을 확보할 것”이라고 말했다.
LS마린솔루션은 신규 포설선을 앞세워 서해안 HVDC 에너지고속도로 등 국내 전략사업은 물론, 유럽·북미 해상풍력과 초장거리 해저망 구축 수요에 본격 대응할 방침이다.
한편, LS마린솔루션은 올 상반기 반기 기준 창사 이래 최대 실적을 달성했다. 상반기 연결 기준 매출 1115억원, 영업이익 64억원, 순이익 41억원을 기록했다.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매출은 약 114%, 영업이익은 약 107%, 순이익은 약 8% 증가한 수치로, 반기 기준 역대 최고 실적이다.
수주 규모도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 최근 안마해상풍력 해저케이블 시공 계약을 포함해, 현재 연결 기준 약 6500억원 규모의 수주잔고를 확보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 연간 매출(1303억원)의 약 다섯 배에 달하는 수준으로, 중장기 실적 성장을 이끌 기반으로 평가된다.
전압형 HVDC 국산화 위해 GE버노바와 MOU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 사업은 전압형 HVDC로 구축할 예정이다. 풍력과 에너지저장장치(ESS) 등 다양한 분산전원과 연계가 필요하고 대규모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해야 하며 지하화와 도심 통과가 쉬어야 하기 때문이다.
전압형 HVDC는 주파수 안정화, 전압 유지, 그리드 회복 기능이 탁월해 고품질 전력 요구에 대응할 수 있고, 소형화·모듈화가 가능해 도심이나 제한 공간에도 설치가 쉽다. 아울러 전류형은 양방향 송전이 복잡하지만, 전압형은 쉽다는 장점이 있다.
LS일렉트릭은 전압형 HVDC 국산화에 본격 착수한다. 이에 지난 7월 글로벌 에너지 솔루션 기업 GE버노바와 HVDC용 변환설비 국산화를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했다. 양사는 이 자리에서 LS일렉트릭의 HVDC 생산 인프라를 활용해 GW급 전압형 HVDC 핵심 설비인 변환 밸브 국산화를 위한 기술 협력을 본격화하는 데 합의했다.
이미 HVDC 변환용 변압기(CTR) 국산화를 완료한 LS일렉트릭은 GE버노바의 변환 밸브 분야 선진 기술을 내재화해 전압형 변환설비 국산화를 마무리할 계획이다.
전압형 HVDC는 전류형 HVDC 대비 계통 안정화에 유리하고 실시간으로 양방향 전력 흐름을 제어할 수 있어 재생에너지 연계에 유리하다. 이 때문에 호남권에서 생산한 해상·재생 에너지를 수도권으로 연결하는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기술로 평가받는다.
LS일렉트릭은 서해안 에너지고속도로의 핵심인 HVDC 분야에서 외산에만 의존할 경우 국제 정세나 환율 변동 등으로 인한 납기 지연, 비용 증가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만큼, 변환 밸브와 변압기 관련 기술을 신속히 확보해, 변환설비 턴키 역량을 앞세워 GW급 사업을 주도하겠다는 복안이다.
두 회사는 이를 위해 글로벌 시장에서 검증된 GE버노바의 선진 기술과 LS일렉트릭의 생산 인프라 간 시너지를 극대화해 △변환 밸브 국산화 △국내 전압형 HVDC 변환설비 사업 수주 △글로벌 시장 진출 등 단계별 목표를 달성하기까지 긴밀히 협력하기로 했다.
구자균 LS일렉트릭 회장은 “LS일렉트릭은 국내 최초로 HVDC 전용 공장을 마련했으며, HVDC용 CTR 사업 경험이 있는 국내 유일 사업자”라며 “GE버노바와의 협력을 통해 HVDC 핵심 설비인 변환 밸브 국산화까지 달성해 차세대 송전 기술의 자립을 반드시 이뤄낼 것”이라고 말했다.
〈문화경제 김응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