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09.12 17:22:29
국제갤러리가 미주, 유럽 및 아시아에서 개인전과 기관전을 앞두고 있는 현대미술가 양혜규의 2025년 하반기 주요 전시 소식 및 활동을 공개했다.
지난 9월 5일 미국 미주리주州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 《양혜규: 의사擬似-하트랜드Haegue Yang: Quasi-Heartland》를 개최한 작가는 약 15년 만에 미국 중서부에서 관람객과 조우한다. 2024년 10월 런던 헤이워드 갤러리에서 시작된 《양혜규: 윤년Haegue Yang: Leap Year》은 쿤스트할 로테르담을 거쳐, 오는 9월 27일부터는 취리히 미그로스 현대미술관으로 이어져 순회전의 대미를 장식할 예정이다. 한편 아시아에서도 양혜규의 다채로운 행보가 이어진다. 중국 광둥성 포산시에 위치한 허미술관에서의 개관 5주년 기념 단체전 《뿌리는 더 잘 알고 있다The Roots Know More》 및 제15회 상하이 비엔날레의 참여를 앞두고 있다. 또한 작가는 오는 12월 13일에 개관 예정인 대만 타이중 미술관에 대규모 베네치안 블라인드 작품을 설치하며 본 커미션 프로젝트의 문을 연다.
미국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 '양혜규: 의사擬似-하트랜드' 개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양혜규 작가의 개인전 《양혜규: 의사擬似-하트랜드Haegue Yang: Quasi-Heartland》(이하 《의사擬似-하트랜드》)가 2025년 9월 5일부터 2026년 2월 8일까지 미국 미주리주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Contemporary Art Museum St. Louis (CAM)에서 개최된다. 이번 전시는 2011년 콜로라도주의 아스펜미술관 전시 이후 미국 중서부 지역에서 약 15년 만에 열리는 작가의 개인전으로, 커미션 신작을 포함한 엄선된 조각 작품들을 선보인다. 미시시피강과 미주리강의 합류점의 비옥한 지대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는 지리적, 역사적으로 의미심장한 지역이다. 전시명인 ‘하트랜드Heartland’는 태평양이나 대서양과 면해있지 않은 내륙의 중앙, 세인트루이스를 위시한 중서부 일대를 이르는 명칭으로, 그 지리적 구분을 넘어 문화적인 특색이 강한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에서 출생해 대학 교육을 받은 후 유럽에서 본격적인 작업 활동을 시작한 작가에게 있어 미국에서의 전시 활동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한 번도 거주해본 적 없는 국가일 뿐만 아니라, 북아메리카의 서부 혹은 동부 대도시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현대미술의 주요 맥락에서 벗어난 중서부 지역에서의 전시는 드문 동시에 ‘외부인’이라는 작가의 위치 및 정체성을 한결 뚜렷하게 드러낸다.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의 수석 큐레이터 미사 제퍼리스Misa Jeffereis는 “양혜규는 명실상부 현시대 시각 문화 분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이다”라고 언급하며 “우리 주변의 미묘한 뉘앙스를 고유한 감성과 무게감, 그리고 상징을 내포한 조각을 통해 섬세하고 능숙하게 포착해 내는 양혜규의 작업을 오랫동안 존경해 왔다”고 전했다. 이어 “양혜규의 작품은 감각적인 힘과 개념적인 깊이로 전세계 관람객과 공명한다. 세인트루이스에서 그의 매력적인 작품을 처음 선보이게 되어 영광이다”라고 밝혔다.
양혜규는 다면적이고 다학제적인 설치 작업을 통해 블라인드, 금속 방울, 인공 짚, 플라스틱 끈 등 일상적인 사물과 재료를 익숙하고 평범한 용도에서 분리, 다양한 요소를 지닌 조각과 감각적인 경험으로 재구성한다. 작가는 향, 소리, 빛, 촉감을 활용해 원초적인 방식으로 아이디어를 전달하며 미술사, 정치적 전기, 민속 문화를 아우르는 다양한 분야를 탐구함으로써 예술적 망명, 탈식민주의 시대의 디아스포라, 사회적 이동성, 구상과 추상 사이의 경계와 같은 ‘의사擬似-이주’의 반복적 주제들을 새롭게 재해석한다.
《의사擬似-하트랜드》는 작가가 지난 25년간 매진해온 조각 및 설치 작품을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의 로비와 주요 전시실에 펼친다. 〈암혈巖穴 주위 음지 생물Umbra Creatures by Rockhole〉(2017–2018)은 총 일곱 점으로 구성된 작가의 가장 복합적인 조각군으로, 다양한 문화와 민속 신화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존재들을 연상시킨다. 다양한 문화권을 넘나드는 작가의 개인적인 경험과 초국가적인 시선에 기반한 이 작품은 서로 다른 기법, 재료, 오브제를 결합하여 문화적 혼종성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보여준다. 일부 조각은 공중에 매달려 촉수가 달린 뱀이나 거대한 바다 생물을 연상시키는가 하면, 무성한 털이나 직조, 금속으로 표면이 뒤덮인 채 바퀴로 직립한다.
<암혈巖穴 주위 음지 생물〉은 작가가 현재 진행 중인 〈소리 나는 조각Sonic Sculptures〉(2013–)과 〈중간 유형The Intermediates〉(2015–)이라는 조각 연작을 공통 분모로 삼고 있다. 인공 짚을 엮어 제작한 초기의 〈중간 유형〉이 농경 사회에 사용되었던 짚풀 공예를 연상시켰다면, 〈암혈 주위 음지 생물〉은 은은한 광택의 합성 끈을 사용함으로써 재료가 내포한 기존의 민속적 맥락을 소거하고 신비롭고 이색적인 존재감을 더한다.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면실을 이용한 초기 설치 연작 역시 〈암혈 주위 음지 생물〉과 같은 전시실에 함께 소개된다. 이는 일반적인 붉은 면실을 사용해 건축적으로 열린 면을 정확히 10cm 간격으로 수평으로 가로질러 팽팽하게 메운다. 이 작업의 실선은 사실 정확하게 1도씩 기울어져 있어, 미니멀리즘의 원칙에서 출발했으나 그 원칙에서 벗어나는 미묘한 어긋남을 자아낸다. 전시실 입구를 가로지르는 면실은 관람객의 접근을 차단하는 동시에 〈암혈 주위 음지 생물〉을 일종의 울타리 혹은 우리처럼 감싸며 작품의 의인적 특성을 암시한다. 실의 섬세하고 연약한 성질은 덩어리감 있는 조각의 형태 및 부피와 강하게 대비되며 미니멀한 요소와 조형적인 요소의 병치를 강조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을 위해 제작된 대규모 커미션 신작 〈복수 둔덕 동차動車Mound Vehicles〉(2025)가 주목을 받고 있다. 미술관 전면창 안쪽 전시실에 설치되어 외부에서도 관람이 가능한 이 대규모 블라인드 설치작은 손잡이가 달린 네 개의 동차動車조각으로 이루어져 있다.
움직임과 이동성, 수행성에 대한 작가의 꾸준한 관심사를 반영하는 〈복수 둔덕 동차〉는 식민지 시대 이전의 해당 지역 역사 및 미시시피강 유역의 풍경과도 어우러지는데, 이는 미술관 인근에 위치한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유적지인 카호키아Cahokia Mounds의 형태와 역사적 배경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카호키아는 9세기경 미주리강과 미시시피강이 합류하는 지점에 조성된 대규모 둔덕의 모임이자 주변 정착민의 주된 생활터로, 매장지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의례용 건축물이나 사원, 지도자들의 거주지 역할도 했다.
〈복수 둔덕 동차〉는 그 둔덕의 모양을 본뜬 네 개의 구조물로 구성되어 있다. 초록색 블라인드가 흙 언덕을 덮고 있는 풀을 연상시키는 반면, 파란색 블라인드는 생명줄과도 같은 미시시피강과 지하수를 상징한다. 또한, 갈색 나뭇가지 모양의 손잡이와 바퀴가 달려 있어 전시 기간 동안 이를 잡아 밀거나 당기는 방식을 통해 간헐적으로 활성화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이처럼 움직임이 내재된 작품은 양혜규의 〈의상 동차動車Dress Vehicles〉(2011–) 연작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있다. 〈의상 동차〉는 옷을 입듯이 사람이 작품에 들어가 조형물을 움직일 수 있도록 내부에 손잡이가 달려 있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한편 〈솔 르윗 동차動車Sol LeWitt Vehicles〉(2018)는 작품의 크기와 무게 때문에 여러 사람이 함께 외부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움직임을 조율하고 협업해야 비로소 작동이 가능하다. 〈복수 둔덕 동차〉 역시 움직임을 품은 전작의 흐름을 잇고 있지만, 허리 정도의 낮은 높이와 가벼운 무게 덕분에 보다 부드럽게 밀거나 끌 수 있다. 작가의 관심사와 고대 문명과 유구한 전통에 경의를 표하는 이 신작은 관람객으로 하여금 경계와 구분을 뛰어넘는 초국가적인 성찰을 하도록 이끈다. 전시 기간 동안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의 무료 프로그램인 ‘퍼스트 프라이데이First Fridays’에서 현지 무용과 학생들이 약 10분 동안 작품을 작동시킬 예정이다.
수석 큐레이터 미사 제퍼리스는 “이번 커미션 신작 〈복수 둔덕 동차〉는 낯설고도 경이로운 장소성에 대한 양혜규의 학구열을 시사하는 작품으로, 지역의 풍경과 중첩된 역사에 작가 자신을 연결 짓는 동시에 미술관의 건축물을 관람 경험의 일부로 통합시킨다”고 밝혔다. 이어 “무엇보다 이 작품은 실제로 움직이는 행위를 통해 생동감을 얻으며 작품, 공동체, 그리고 그것이 놓인 공간 사이의 관계를 더욱 심화시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의사擬似-하트랜드'에서는 최근 작업인 〈공중 지류 생물Airborne Paper Creatures〉(2025)도 함께 소개된다. 공중에 매달린 자작나무 합판 구조물에 한지와 마블지로 장식된 경량의 조각물로, 여기에 파키스탄 북동부의 라호르에서 온 옷감과 금속 방울 등으로 이루어진 장신구, 그리고 여러 종류의 구슬로 꾸며져 있다. 이러한 새로운 유형의 조형물은 “작고 가벼운” 형태의 조각물에 대한 새로운 탐색과 최근 등장한 바람 혹은 공기의 흐름과 같은 비물질적인 자연 요소에 대한 탐구를 반영한다. 특히 이 작품의 형상은 수 세기 동안 아시아 전역에서 볼 수 있었던 새나 곤충, 바다 생물의 형태를 추상화하여 종이로 연鳶을 만들던 전통을 소재로 삼았다. 통창이 있는 전시실 내 〈복수 둔덕 동차〉 위에 높이 설치된 〈공중 지류 생물〉은 관람객이 작품 아래를 지나칠 때마다 간헐적인 움직임이 발생한다. 연에 달린 방울이 이 움직임을 포착해 공기 중에 울리고, 관람객들은 자연스럽게 공기의 흐름과 소리가 유도하는 공감각적인 환경에 주위를 돌리게 된다.
《의사擬似-하트랜드》전은 세인트루이스 현대미술관이 주최하고 수석 큐레이터 미사 제퍼리스와 어시스턴트 그레이스 얼리Grace Early가 기획하였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