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문화재단이 운영하는 호암·리움미술관이 같은 시기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두 거장 작가의 전시를 선보여 화제가 됐다. 호암미술관은 ‘루이즈 부르주아: 덧없고 영원한’을, 리움미술관은 ‘이불: 1998년 이후’를 내년 1월 4일까지 연다.
현대미술 두 거장, 각각 호암·리움미술관 찾아
두 여성 작가는 ‘페미니즘 미술 선구자’로도 꼽혀 이를 공통분모로 미술관이 전시를 기획한 것이 아니냐는 시선도 있었다. 루이즈 브루주아는 1952년부터 1967년까지 꿈 기록, 작업 노트, 흩어진 텍스트 등 방대한 기록을 집중적으로 남겼는데, 이 기록들은 페미니즘과 정신분석학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불은 1980년대 후반 남성 중심의 미술계에서 파격적인 퍼포먼스와 조각을 선보이며 일명 ‘여전사’로 불렸다.
관련해 김성원 부관장은 “이번 전시는 페미니즘이라는 프레임에 국한되지 않고, 미술관 입장에서 작가의 방대한 예술 여정의 방점을 살피는 자리로 마련됐다”며 “부르주아의 경우 그의 작품을 한국에서 25년 만에 만나는 자리로, 회화, 조각, 설치 등 106점에 달하는 작품을 한데 모았다. 미술관은 현대미술의 흐름을 보여주는 대표 작가들에 대해 오랜 시간 연구하고, 이를 보여주고자 한다. 지난 김환기 회고전에 이어 이번 부르주아 또한 그 연장선상에서 마련했다”고 말했다.
또한 “과거 여성 혁신가로 불린 이불은 1990년대 말에 들어서서 시대의 본질을 통찰한 사회가로 신체와 사회, 인간과 기술, 자연과 문명의 관계와 이를 둘러싼 권력을 폭넓게 탐구해왔다”며 “전시는 이렇듯 시대를 통찰하며 꾸준히 질문을 던진 작가들의 작업에 주목한다”고 말했다.
먼저 호암미술관에서는 1940년대 부르주아의 초기 회화와 ‘인물’ 연작부터 1990년대에 시작된 대형 ‘밀실’ 연작, 말년의 패브릭 작업, 그리고 시적인 드로잉부터 실내를 가득 채우는 대형 설치작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에 달하는 작가의 작업 여정을 따라간다. 작가는 전체 작업 기간 동안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 회화, 판화, 조각 등 다양한 매체를 넘나들었는데, 전시는 이를 모두 다양하게 아우른다.
프랑스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활동한 부르주아는 자전적 서사와 감정의 구조를 탐구하는 조형 언어로 20세기 전위미술의 맥락에서 출발해 현대미술의 흐름을 뒤흔들었다. 1982년 뉴욕 현대미술관 회고전을 기점으로 비평적 위치를 확립했으며, 1999년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과 테이트 모던의 대표작 ‘엄마’ 설치를 통해 세계적 명성과 대중적 인정을 동시에 얻었다.
루이스 부르주아의 트라우마, 예술로 불타오르다
이번 전시 제목인 ‘덧없고 영원한’은 이번 전시를 관통하는 대표 키워드다. 부르주아가 생전에 쓴 글에서 차용한 것으로, 양극단에 서 있는 두 단어를 한 문장에 결합시키며 작가가 일생 동안 겪어 온 모순, 양가적 감정 등 내면 심리의 지형도를 반영한다.
전시를 기획한 이진아 큐레이터는 “부르주아는 기억, 트라우마, 신체, 시간을 탐구하며 남성과 여성, 과거와 현재, 무의식과 현실 사이의 경계에서 끊임없이 흔들리는 정체성과 감정을 포착했다. 전시는 이런 작가의 심리를 따라간다”고 설명했다.
특히 작가의 예술세계 근간엔 어머니 조제핀과 아버지 루이와의 애증이 깊이 뿌리박고 있다. 작가가 생전 남긴 여러 글에 따르면, 그는 아버지의 관심을 갈구했으나 아들을 원했던 아버지는 그에게 애정을 주지 않았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아준 존재였으나, 동시에 부르주아에게 경쟁과 질투의 대상이자 자신을 유기한 존재로, 작가는 평생 버려짐에 대한 두려움에 시달렸다.
전시의 시작과 끝을 장식하는 ‘커플’에서도 이 점이 엿보인다. 나선으로 엉킨 인물들의 모습은 융합을 이루는 듯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불안하고 뒤틀려 보이기도 한다. 이 큐레이터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향한 대립적이고 양가적 감성을 나선으로 표현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밀실(검은 날들)’은 부르주아가 1991년부터 선보이기 시작한 설치 작업으로, 원형의 밀실 안에 검은 줄무늬 드레스, 파란색 스웨터, 붉은 칵테일 드레스 등의 의상을 마네킹에 입혀 놓았다. 이는 어릴 적 어머니가 태피스트리 작업장에서 실을 짓던 모습을 보고 자라 작가에게 익숙한 의상들이다.
그는 검은 드레스 바닥에 두 개의 대리석 구체를 놓았는데, 이는 여성의 유방으로 보이기도, 다른 한편으로는 남성의 남근 형상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왜곡시키는 질투의 심리적 효과에 대한 부르주아의 관심을 반영한다.
‘붉은 방(부모)’ 또한 밀실 형태의 설치 작품으로, 문으로 둘러싸인 방의 중앙에 붉은 고무로 덮인 침대가 놓였다. 관람객은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문틈으로 볼 수밖에 없는데, 이는 마치 자식이 부모의 은밀한 순간을 엿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부르주아는 이 작품에서 기억과 욕망, 트라우마를 한데 엮으며 사랑과 불안이 교차하는 가정의 풍경을 만들어낸다.
‘아버지의 파괴’는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작가의 분노와 불안을 응축한 강렬함이 눈길을 끈다. 이 작품 옆에 함께 설치된 영상 다큐멘터리가 이해를 돕는다. 다큐멘터리엔 어린 시절 귤 껍질을 사람 모양으로 까면서 “내 딸은 이렇게 예쁘지 않다”며 희롱한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이야기하는 작가의 모습이 담겼다.
이 큐레이터는 “해당 영상에서 머리가 희끗해질 정도로 어느덧 나이가 든 부르주아가 이야기를 시작하는데, 아주 오래 전인 10대 시절 이야기를 하면서도 바로 어제 일인 것처럼 트라우마가 생생한 모습이 눈길을 끈다”며 “시간이 오래 흘렀어도 마음에 남은 상처가 해소되지 않은 듯 작가는 분노하면서도 울먹이는 모습을 보인다”고 말했다.
작가는 “어린 시절 식탁에서 아버지의 자기과시에 지친 가족들이 그를 끌어내려 사지를 찢고 먹어 치우는 상상을 했다”고 고백한 바 있는데, 이 분노가 고스란히 아버지의 파괴 작업에 반영됐다. 무대와 같이 정면만 열린 구성, 강렬한 붉은 조명,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방식은 마치 인간의 내장을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감추고 싶었던 내면이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듯한 오싹한 느낌도 준다.
‘웅크린 거미’ 등 대표작 눈길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이번 전시를 통해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웅크린 거미’로 작가의 재표작인 거미 조각상 엄마 연작 중 하나다. 부르주아에게 어린 시절 늘 바느질하던 엄마의 모습은 거미줄로 집을 짓는 거미처럼 연상됐고, 이는 그의 예술세계를 통해 표출됐다. 전시장 2층에 거대하게 설치된 이 작품 뒤엔 “엄마는 나를 버렸다”고 노래를 부르는 퍼포먼스 영상이 함께 틀어져 있다.
이 큐레이터는 “작가는 모성에 대해 양가적 감정을 지녔다. 출산은 모성을 상징하지만, 부르주아에게는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분리돼 버려지는 양가적인 의미가 있었다”며 “자신을 양육하고 보호하지만 동시에 자신을 버리는 존재라는 두려움이 작가의 일생에 존재했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선 웅크린 거미를 비롯해 호암미술관의 전통 정원 ‘희원’에 상설 전시된 작품 외 또 다른 조각까지 총 3점의 거미 조각을 볼 수 있다.
또한 이번 전시가 특별한 점은 부르주아의 일기와 생애 전반에 걸친 글쓰기, 그리고 정신분석 기록을 병치해 보여준다는 것이다. 전시장 곳곳에 부르주아의 원문 텍스트(불어, 영어)와 한국어 번역이 함께 제시돼 작가의 내면을 더 깊이 따라가도록 돕는다.
김성원 부관장은 “이번 전시는 국내에서 소개된 전시 중 가장 감동적인 자리가 될 것”이라며 “작가의 엄마를 비롯해 대표작을 소장한 호암미술관에서 열리는 만큼 특별한 의미가 있다. 초기 회화부터 말년의 섬유 작업에 이르기까지 70여 년에 걸친 창작 여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해 관객에게 새로운 감흥과 깊은 예술적 경험을 선사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번 전시는 부르주아의 아시아 순회 전시의 일환으로, 뉴욕이스턴 재단과 협력으로 기획됐다. 전시는 호주 시드니 뉴사우스웨일즈 아트갤러리에서 시작해 일본 도쿄 모리 미술관, 대만 타이페이의 푸본미술관을 거쳤으며, 한국의 호암미술관 전시가 아시아 태평양 투어의 마지막 여정이다.
< 문화경제 김금영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