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09.17 16:47:51
대전의 복합문화예술공간 헤레디움(HEREDIUM)이 로랑 그라소의 개인전 ‘미래의 기억들’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는 지난 8월 31일 개막해 2026년 2월 22일까지 계속된다.
프랑스 현대미술가 로랑 그라소가 직접 방한해 설치 과정에 참여하고 전시 오프닝에 함께한 이번 전시는 헤레디움이라는 의미 있는 공간에서 펼쳐져 더 빛난다.
헤레디움은 1922년 일제 강점기에 만들어진 구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복원한 공간이다. 구 동양척식회사 대전지점은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다양한 고증자료와 분석을 통한 복원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전시와 공연을 위한 복합문화공간 헤레디움으로 2023년 9월 8일 공식 개관했다.
함선재 관장은 “헤레디움은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으로 과거 100년은 일제 강탈이라는 슬픈 이야기를 갖고 있었다면 앞으로의 100년은 대전 시민과 함께하는 공간으로 만들어보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라고 공간의 의미를 설명했다.
이번 전시에서 작가 로랑 그라소는 기후 변화, 생태 변화의 주제를, 영상을 중심으로 풀어낸다. 전시는 1층과 2층 두 개의 전시실에서 관람객을 맞는다. 먼저 1층 벽면에는 네온, 회화, 대형 LED 영상이 설치됐다.
대표작 ‘오키드 섬’은 대만 란위섬에서 촬영한 영상에 그래픽 작업을 더한 작품이다. 전혀 인간의 개입이 없을 것 같은 아름다운 이 섬은 사실 핵폐기물 처리 시설과 인공댐이 존재하는 곳이다. 열대 섬의 풍경 위를 떠다니는 직사각형 형태의 물체가 자연과 불안한 기후 현실 사이의 긴장감을 드러낸다. 빨간 색의 네온은 불꽃으로 벽 곳곳을 불태운다.
아래에는 브론즈로 작업한 구름이 놓여있다. 하늘에 떠 있어야 할 구름이 무겁게 땅에 내려져 있는 모습은 인공강우와 같은 인간이 개입한 비정상적 기후의 영향을 보여준다.
벽 곳곳에 설치된 작은 그림들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풍이다. 실제로 도상이 존재하는 이 작업들은 작가가 미래에 대한 경고를 암울하게 표현하는 대신 ‘예전에는 이랬구나’ 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 화풍의 그림들은 시간의 경계도 무너뜨린다.
2층의 영상 '인공물'은 오르세 미술관에서 컨벤션 한 작업으로 다른 영상을 3D 혹은 엑스레이처럼 효과를 주어 재구성한 것이다. 영상 옆 2개의 해가 떠 있는 풍경과 수술이 두 개 있는 꽃은 후쿠시마 원전 사태와 같은 재앙이 닥치면 미래의 식물 도상이 이렇게 바뀌겠다고 작가가 상상한 것이다.
여우를 안고 있는 어린아이의 동상은 파괴되는 자연과 기후 변화 속에서 여우가 길잡이를 해줄 수 있다는 희망을 주며 관객을 위로한다.
헤레디움의 모기업인 CNCT에너지는 도시가스, 열, 전기를 제공하는 종합 에너지 회사로 기후 관련 재단도 가지고 있다. 작가는 그래서 헤레디움에서 미래와 기후변화에 대한 주제로 작품을 전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전시장에 들어서는 순간, 마치 영상 속 세계를 거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이번 전시는 기후 변화, 생태 위기와 같은 무거운 주제를 관객이 쉽게 공감할 수 있도록 해준다.
한편, 작가 로랑 그라소는 2008년 마르셀 뒤샹 프라이즈 수상, 파리 퐁피두 센터 전시를 비롯해 국제 무대에서 주목받아 왔다. 2015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기사장)’을 수훈했고, 2020년 오르세 미술관 영상 작품 발표 등으로 세계적인 입지를 확립했다. 최근에는 불가리 시계 디자인과 루이뷔통 런웨이 협업을 통해 패션계에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며, 예술과 패션을 넘나드는 독창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