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호⁄ 2025.11.27 15:06:20
국립현대미술관(MMCA, 관장 김성희)은 한국 현대 도예의 선구자 신상호의 회고전 '신상호: 무한변주'를 11월 27일(목)부터 2026년 3월 29일(일)까지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서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60여 년간 흙으로 보여준 작가의 조각적·회화적 창작 여정을 조명하면서 한국 현대 도예의 확장된 범주를 소개한다.
신상호(1947~)는 한국 현대사의 흐름 속에 사회와 미술의 변화에 호응하며 흙을 매체로 독자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해 왔다. 다양한 도자 형식과 이를 뒷받침하는 탁월한 기술력으로 한국 현대 도예를 이끌어 온 대표 작가이다. 1960년대 경기도 이천에서 장작가마를 운영하며 전통 도예의 길에 들어선 그는, 이후 시대의 변화와 내면의 예술적 탐구심에 따라 도자의 경계를 확장하며 흙의 세계를 다채롭게 펼쳐왔다.
윤소림 학예연구사는 “이번 전시는 196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 현대 도자의 흐름을 주도한 신상호 작가의 작품 세계를 통해 시대에 따른 현대 공예의 다양한 면모를 소개한다. 신상호 작가가 선보인 창작 실험들을 조명해 국내 도자 예술의 다양한 범주를 소개해 확장성을 제고한다. 또한 회고전으로서 한국 전통과 자아의 관계를 모색하는 범위에서 현재 인류 문화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가의 도전적인 예술 세계를 확인하고자 이 전시를 기획했다”라고 기획 의도를 소개했다.
먼저 한국 도자의 흐름과 신상호 작가의 발자취의 관계를 살펴보자. 도자는 한국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그것이 요구되는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 왔다. 1960년대 국가 정체성을 정립하려는 민족 중흥 정책으로 전통 도자가 국가의 주요 수출품이 되었고, 1970년대에는 대학에서 공예과가 설립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1980년대에는 88서울올림픽 등 국제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현대 예술로서의 도자 조각이 등장하게 된다. 1990년대 2천년대에는 다원화 그리고 지자체의 문화 인프라인 공예 비엔날레가 생겨나 도자 영역이 미술, 건축 등으로 확장되었다. 2010년대 이후로는 장르의 부분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혼종의 양상이 보여지면서 매체들 간의 크로스 오버가 자유로워졌다.
이번 전시의 제목 ‘신상호: 무한 변주’는 이런 전통 도자, 도자 조각, 건축 도자, 도자 회화 등 기존 흙의 질서를 부정하며 매번 새로운 형식을 끊임없이 구축하는 작가의 반골적 기지에 의한 창작 가치를 형상화한 것이다.
전시는 크게 5부로 나누어져, 시대 순으로 작가의 작품 세계를 보여준다.
1부 ‘흙, 물질에서 서사로’에서는 1960-1990년대 신상호의 전통 도자 세계를 조명 한다. 작가는 1965년 홍익대학교 공예학부에 입학한 해, 경기도 이천의 가마를 인수하여 전통 도자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한일 국교 정상화(1965) 이후 일본에서 한국 전통 도자기에 대한 관심과 수요가 높아지며 전통 도자가 국가 수출품으로 주목받던 시기, 그는 이천의 다른 도자 장인들과 함께 일본 전시에 참여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신상호는 전통을 재현의 대상이 아닌 현대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고 실험해야 할 개념으로 인식했다. 국내 최초로 가스 가마를 도입하고 정교한 디자인의 생활 식기 제작과 화가들과의 협업 활동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전통의 현대화’를 도모했다.
작가는 1979년 나고야에서 가스 가마를 들여왔다. 당시 국내 최초의 가스 가마인데 나무 장작을 때는 전통 가마에 비해 손실률이 50% 이상 차이가 났다. 한국 전통을 등지는 일이라는 반대의 시각도 있었지만 가스 가마는 도자의 양산화를 가능케 했다. 이렇듯 신성호 작가는 전통의 가치를 지키기보다는 그것의 가치를 현대적으로 확장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한편, 1973년 국내 첫 개인전을 계기로 선보인 〈아(我)〉 연작(1973-1980년대)은 작가로서의 초기 정체성 확립에 대한 관심을 살펴볼 수 있다. 1990년대 〈분청〉 연작(1990-1994)에서는 신상호 특유의 전통 기법과 호방한 회화적 표현이 어우러진 원숙한 도예의 경지를 감상할 수 있다. 분청은 어두운 흑색의 바탕 위에 여러 회화적 표현이 가능한 도자 양식이다. 전시장 초입에서 전통 기법으로 제작한 분청사기 청자, 백자를 만날 수있다.
2부 ‘도조의 시대’에서는 1986년부터 선보인 신상호의 도자 조각, 도조(陶彫)를 선보인다. 1984년 미국 센트럴 코네티컷 주립대학 교환교수 시절,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도자를 경험한 신상호는 조각과 회화적 요소가 결합된 예술의 조형성을 추구하며 〈꿈〉 연작(1990-1995)을 발표했다. 신상호는 한국 도예의 국제화를 위해 88 서울올림픽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자신의 작업장인 부곡도방에서 ‘국제도예워크숍’을 운영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1995년 영국에서 아프리카미술 전시를 경험하고 타문화의 원시성에 매료되어 흙의 원초적 생명력과 구조적 힘을 형상화 한 〈아프리카의 꿈〉 연작(2000- )을 제작하며 형태적 언어를 확립하였다. 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큰 부피의 작업이나 뾰족한 형태와 같이 이전에 둥그런 도자기의 반대되는 형태적 언어를 시도한 시기가 80년대 중후반이다.
작가는 1986년에 크고 높은 형상물을 시도해 흙으로 만든 작품의 한계성을 실험했다.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스티로폼을 섞어서 제작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다. 신상호 작가는 1990년 홍익대학교 도예연구소 소장으로서 학술 연구 연구단을 결성하고 중국 증시 황릉의 발굴에 참여하게 된다. 그곳의 테라코타로 이루어진 인간과 동물의 표현력을 경험한 후 흙의 질감을 그대로 살리면서 어두운 안료로 입체감을 표현하는 기법을 응용해서 꿈 연작을 발표했다. 이때부터 대형 동물 형상의 조각 작품들이 등장하고 작가 고유의 형태적 언어가 드러나게 된다. 작가는 1995년 영국 로열 컬리지 오브 아카데미의 초빙 교수로 가서 런던에서 아프리카 대륙의 미술 전시를 관람한다. 아프리카 공예품을 보고 이제까지 작가가 고군분투했던 한국의 전통과는 매우 다른 미학적 가치를 발견하고 이들의 표현력을 흡수하기 시작한다.
특정 동물을 지칭하고 제작된 특정 동물을 정하고 제작된 형상이 아니라, 관람자에게 어떤 동물인지 상상의 여지를 주게 되는 작품들이다. 전시장 중앙홀에는 아프리카의 꿈의 대표작인 아프리카의 꿈 토템 작품을 설치했다. 동물 기둥들이 중앙홀을 가로지르며 런웨이를 형성하는데 관람자들은 동물들의 표정을 마주하고 걸어가며 감상할 수 있다. 작가의 도자 조각에서 동물 모티브가 중요하게 차지하는 이유는 자연의 생명력이 전달하는 염원 또는 경외감에서 비롯됐다고 할 수 있다.
3부 ‘불의 회화’에서는 2001년 이후 선보인 신상호의 건축 도자의 실험성을 600여 장의 도자 타일과 건축 아카이브를 통해 조명한다. 그는 도자와 건축의 결합을 실험하며 도자 타일로 대형 외벽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다. 서울 센트럴시티 고속터미널의 〈밀레니엄 타이드〉를 시작으로 클레이아크김해미술관, 금호아시아나 사옥(현 콘코디언 빌딩), 서초 삼성타운 등의 외벽에 〈구운 그림〉 도자 타일을 설치하였다. 〈구운 그림〉은 흙 위에서 소성된 독특한 질감과 색채를 캔버스의 물감 표현과 구분하기 위해 붙인 명칭이다. 50×50cm 크기의 도자 타일은 벽면의 표면을 감싸면서도 분리와 재설치가 가능한 유연한 탈착 체계로 설계되었다.
작가는 도자 타일 작업을 통해 도자의 회화적 색 표현의 범주를 확장하고, 건축 자재로서 흙의 기능적 잠재력과 예술적 가능성을 새롭게 펼쳐 보였다. 암수 구조의 금속 부품을 활용해서 거는 형식으로 타일을 완성하여 내구성을 높였는데 이러한 건축 외벽의 설치 작품들은 2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잘 유지되고 있다.
작가는 수집가로도 유명하다. 4부 ‘사물과의 대화’에서는 1990년대부터 시작된 타문화의 옛 물건 수집과 이를 통한 창작활동을 소개한다. 작가는 아프리카 미술의 강렬하고 원시적인 표현성에 깊은 감화를 받은 이후 아프리카 공예품을 비롯해 유럽에 수출된 중국 청화백자, 오래된 산업 기기 등 서로 다른 문명과 시대의 사물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했고 이에 영감을 받아 제작한 도자 오브제 및 도자와 수집품을 결합한 혼종적인 작품들을 선보였다.
5부 ‘흙의 끝, 흙의 시작’에서는 2017년부터 흙판을 금속 패널에 부착하고 다채로운 색을 입히는 도자 회화를 조명한다. ‘흙으로 그린다’는 생각에서 출발해 제작한 〈생명수〉(2017)와 〈묵시록〉 연작(2017- )은 흙의 유기적 패턴과 중첩된 색의 층위가 한데 어우러져 도자의 물질적 깊이를 평면 회화로 구성한다.
전시의 마지막은 관람자가 작품과 마주하며 시선을 교환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2m가 넘는 규모의 ‘아프리카의 꿈-우리는 아프리카’는 인간 두상 조각이 섬세하게 표현된 이목구비를 통해 인간 존재의 내면적 힘을 드러낸다.
1960년대부터 형태와 색채를 통해 도자의 조형 가능성을 확장해 온 신상호 작가가 궁극적으로 주목한 것은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인간과 문명에 대한 경외심이 아닐까.
이번 전시는 연계 교육프로그램 〈흙에서 태어난 상상동물〉도 마련되어 있다. 작가의 대표작 〈아프리카의 꿈〉(2000- )을 모티브로 참여자들이 상상의 동물을 직접 도자 조각으로 창작해 보는 활동이다. 미적 대상이자 조형 재료로서의 흙의 촉감, 상상력, 유희, 불에 의한 변환 과정을 밀도 있게 경험하도록 기획했다. 선착순 사전 예약을 통해 운영되며 자세한 내용은 국립현대미술관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문화경제 안용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