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오대산 운수행각(雲水行脚)을 마친 매월당은 바닷가 강릉 땅으로 발길을 향한다. 오대천을 돌아 내려오면 다시 성오평(省烏坪)을 지나고 이어서 월정사 입구 삼거리에 닿는다. 이곳에서 추령(杻嶺) 넘어 횡계(橫溪)에 닿았으니 우리 시대에 평창 동계올림픽이 열린 곳이다. 횡계에는 대관령을 넘는 길손을 위한 역(驛)이 있었다. 안흥의 문재를 넘으면 운교역 ~ 방림역 ~ 대화역 ~ 진부역 ~ 횡계역에서 마지막 준비를 마쳐야 길고 긴 대관령을 넘을 수 있었다. 매월당이 횡계역에 도착한 때는 1460년. 전 시대부터 있던 옛 횡계역을 지났을 것이다. 매월당이 지나간 2년 뒤, 1462년(세조 8년)에 새로 역이 정비되었다.
지금은 평창군이 되었지만 이 지역은 본래 강릉도호부 도암면(道岩面)이었다. 벽촌 중에 벽촌, 겨울이면 눈에 쌓이는 눈 고장이었다. 근세에 들어서면서 생긴 우리나라 스키장의 원조 대관령스키장도 이곳 지루메산 경사를 슬로프로 사용한 스키장이었다. 용평스키장이 생기고 동계올림픽과 관광 붐을 타면서 지금은 대관령면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매월당을 따라 횡계를 지나면서 동계올림픽 현장도 둘러보고 스키박물관도 들러 본다. 상전벽해도 이런 상전벽해가 있을까? 황태를 말리던 덕장은 펜션과 호텔이 되었고 논밭은 상가로 바뀌었다. 호구지책의 언덕 밭에는 관광객용 교회도 들어서 있다. 배도 곯고 짚신도 떨어진 채 이곳을 지났을 매월당을 생각하면 모시고 와서 시원한 황태해장국이라도 대접하고 싶구나.
횡계에서 이제 대관령으로 향한다. 고속도로는 대관령 나들목에서 직진하여 터널을 통과해 강릉 방향으로 내달리니 대관령에는 오를 수가 없다. 옛 고속도로(456 번 지방도)와 그 옆길 작은 포장도로 두 길이 대관령과 연결되어 있다. 이제는 차를 타고 오르는 대관령이지만 1900년대 초까지는 걷거나 또는 말이 아니면 갈 수 없는 곳이었다. 1911년부터 이천 ~ 강릉간 신작로를 뚫었는데 대관령 구간은 1913년부터 1917년까지 구불구불 차량 통행이 가능한 대관령 고갯길이 열렸다. 현재 고속도로의 대관령 터널이 뚫리기 전까지 우리가 달리던 길이다. 이때의 일을 대관령 고개에서 반정 내려가는 길옆 바위에 ‘준공기념(竣工記念)’이란 각자를 새기고 내용을 가록했는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각자(刻字)는 선명하게 남아 있다.
그러면 매월당이 넘어간 대관령 길은 어디였을까? 신라에서도, 고려에서도, 조선에서도 1917년 이전까지 넘어 다닌 대관령 고갯길은 이제 ‘대관령 옛길’이라는 이름으로 트레킹 명소가 되어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물론 매월당도, 허균도, 난설헌도, 사임당도, 율곡도 넘었던 그 길이다.
굳센 기운 가득했던 옛 대관령 정상
옛 고속도로 옆 작은 포장도로를 따라 오르면 대관령 정상에 닿는다. 옛 영동고속도로 대관령 휴게소가 있던 광장이다. 그때의 영동고속도로 대관령은 추억을 찾는 이들이 많이 찾는 명소였는데 혹서기에는 더위를 피해 오르는 이들의 피서지가 되기도 한다. 고갯마루에는 고속도로 준공비가 아직도 위용을 자랑한다. 가난하던 시절 ‘민족의 대동맥’이라는 벅찬 글귀도 선명하고 ‘고속도로 준공 기념비’라고 쓴 박정희 대통령의 강기(剛氣) 가득한 추억의 글씨도 남아 있다.
이곳은 백두대간이 지나는 길이다. 고루포기산 ~ 능경봉 ~ 대관령 ~ 선자령 ~ 소황병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 산줄기의 대동맥이다. 또한 옛사람들은 함부로 넘어 다닐 수 없는 공포의 길이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숙종이 총애하고 다산이 인정한 문신이 있었다. 희암(希菴) 채팽윤(蔡彭胤). 그의 문집 속 기록인데 이 지역 고개를 넘으면서 범에 대한 공포를 기록했다.
정사년(1717년)에 새벽밥을 먹고 강릉을 향해 출발했다. 성오평(省烏坪: 월정사 입구)부터 꾸불꾸불 동쪽으로 가서 추현(杻峴) 고개로 들어섰다. 빽빽한 교목들이 숲을 이루고, 골짜기는 깊고 그윽했다. 지나가던 행인이 말하기를, “이 고개는 바로 호랑이와 표범의 소굴입니다. 올봄에 행인들이 많이 죽어, 봄부터 여름까지 길이 막혔습니다”라고 했다. 이어서 나무가 쓰러져 있는 곳을 가리키며 “저것이 호랑이 발자국입니다”라고 한다.
이에 동행하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두려워했다. 바람이 조금만 불어 나무 흔들리는 소리가 나도, 번번이 말고삐를 쥐고 좌우를 둘러보며 소리쳤다. 말 위에서 시 한 수 읊는다.
말에 채찍질하며 앞뒤를 둘러보니,
행인의 마음과 간담이 서늘하네.
깊은 숲에 아침 해 숨어 있는데,
호랑이 발자국이 쟁반만큼 크구나.
策馬前後顧. 行人心膽寒. 深林隱朝日. 虎跡大如盤.
이렇듯 두렵던 범도 이제는 시베리아로 쫓겨 갔다. 지리지는 대관령을 어떻게 기록했을까? 신증동국여지승람을 보자. 강릉대도호부 편에, “대관령(大關嶺)은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남쪽으로 뻗어 내리면서 동햇가에 자리 잡은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아흔 아홉 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면서 고려조 문신 김극기의 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 시(詩) 속 한 부분이 대관령의 형세를 읊었는데 그 표현이 참으로 절묘하다.
아슬아슬 길 한 가닥 높은 나무에 걸렸는데,
긴 뱀처럼 구불구불 무릇 몇 겹인지.
畏途一線掛喬木 脩蟒縈紆凡幾重.
이제 대관령 옛 고속도로 휴게소를 벗어나 매월당이 넘었을 대관령 옛길로 향해 간다. 휴게소에서 북쪽으로 가면 대관령 성황당을 만나는데 재궁골 삼거리에서 1킬로 남짓 거리에 있다. 포장이 되어 있지만 버스는 들어갈 수 없고 승용차는 비껴서면 교행이 가능하다. 길 끝에는 작은 주차장도 있고 화장실도 있다. 치성을 드리는 이, 대관령 옛길 넘는 이, 백두대간 길 가다가 잠시 들르는 이, 관광객 등 많은 이들이 들르다 보니 편의시설을 갖춘 것이다. 매월당이 범의 무서움을 이기고 오른 길, 고려의, 조선의 많은 이들이 넘던 고개를 이제는 차로 지나가는 시대가 되었다. 그곳에는 두 채의 당집이 있다.
큰 집은 대관령 성황님의 집이고 작은 집은 대관령 산신님이 계신다. 대관령 성황님은 범일국사(梵日國師)이니, 그는 신라말(新羅末) 당나라에 유학하고 이곳 명주(강릉)에서 구산선문(九山禪門)의 하나인 사굴산파를 개창한 당대의 선승이다.
또한 대관령 산신님은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니 대관령 고개가 “쎄긴 쎄다”고 느끼게 해준다.
이곳에 들러 글을 남긴 강릉 출신 교산 허균의 글을 보자.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실린 글이다.
대관령 산신 찬양과 설명글(大嶺山神贊 幷序)
계묘년(1603, 선조 36) 여름, 나는 명주(溟州, 지금의 강릉)에 있었는데, 고을 사람들이 5월 초하룻날에 대령신(大嶺神)을 맞이한다. 하기에, 그 연유를 수리(首吏: 윗 아전)에게 물으니, 아전이 이렇게 말하였다.
“대령신이란 바로 신라(新羅)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公庾信) 공입니다. 공이 젊었을 때 명주에서 공부하였는데, 산신(山神)이 검술(劍術)을 가르쳐 주었고, 명주 남쪽 선지사(禪智寺)에서 칼을 주조(鑄造)하였는데, 90일 만에 불 속에서 꺼내니 그 빛은 햇빛을 무색하게 할 만큼 번쩍거렸답니다. 공이 이것을 차고 성을 내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오곤 하였는데, 끝내 이 칼로 고구려를 쳐부수고 백제를 평정하였답니다. 그러다가 죽어서는 대령의 산신이 되어 지금도 신령스러운 이적이 있기에, 고을 사람들이 해마다 5월 초하루에, 번개(旛蓋: 깃발과 일산)와 향화(香花: 향과 꽃)를 갖추어 대령에서 맞아다가 명주 부사(溟州府司: 강릉도호부 관사)에 모신답니다. 그리하여 닷새 되는 날, 여러 놀이(雜戲)로 신(神)을 기쁘게 해 드린답니다. 신이 기뻐하면 하루 종일 일산(蓋)이 쓰러지지 않아 그 해는 풍년이 들고, 신이 화를 내면 일산이 쓰러져, 그 해는 반드시 태풍이 불거나 가뭄이 든다 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는 이상하게 여겨, 그날 가보았다. 과연 일산이 쓰러지지 않자, 고을 사람들이 모두 좋아하고 환호성을 지르며, 경사롭게 여겨 서로 손뼉 치며 춤을 추는 것이었다. 내 생각하건대, 공은 살아서는 왕실에 공(功)을 세워 삼국 통일의 성업(盛業)을 완성하였고, 죽어서는 수천 년이 되도록 여전히 이 백성에게 화복(禍福)을 내려서 그 신령스러움을 나타내니, 이는 진정 기록할 만한 것이기에 이에 기록한다. (찬/贊은 글이 길어 줄입니다.)
大嶺山神贊 幷序
歲癸卯夏. 余在溟州. 州人將以五月吉. 迓大嶺神. 問之首吏. 吏曰. 神卽新羅大將軍金公庾信也. 公少時游學于州. 山神敎以釗術. 鑄釗於州南禪智寺. 九十日而出諸爐. 光耀奪日. 公佩之. 怒則躍出韜中. 以之滅麗平濟. 死而爲嶺之神. 至今有靈異. 故州人祀之. 每年五月初吉. 具旙蓋香花. 迎于大嶺. 奉置于府司. 至五日陳雜戲以娛之. 神喜則終日蓋不俄仆. 歲輒登. 怒則蓋仆. 必有風水之災. 余異之. 及期往看之. 果不俄. 州人父老悉驩呼謳詩. 相慶以抃舞. 余帷公生而立功於王室. 成統三之業. 死數千年. 猶能福禍於人. 以現其神. 是可紀也已.
그랬었구나. 허균의 시대에는 강릉단오제의 신령님이 대관령 산신인 김유신 장군이었구나. 그런데 우리 시대에 강릉단오제 신령님은 대관령 성황님(범일국사)로 바뀌어 있다. 단오제는 국가무형문화유산이면서 유네스코의 ‘인류 구전 및 무형유산 걸작’으로 우리나라 봄철 큰 굿판이 벌어지는 신나는 행사로 자리 잡았다.
당대의 선사께서 성황님이 되어 개울가 집 여성황과 합방(合房)하러 내려오시는 테마 굿이니 아니 신날 수 없다. 그렇지, 어느 날부터 관(官)에서 행사하기 시들해지니 무가(巫家)에서 맡아 명주의 대표 인물 범일국사를 성황신으로 모시고 장가들이는 행사로 신나는 한판 굿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사람 사는 일, 다산(多産)과 풍요(豊饒)만한 일이 어디 있을까 보냐?
매월당이 지나갔을 그때에는 성황당과 산신각이 다 있었는지 모르겠다. 고려사(高麗史)에도 왕순식 장군이 후백제 토벌 전 대관령에서 제사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조선 초 남효온의 문집 ‘추강냉화’(秋江冷話: 1477년)에도 강릉단오제 관련 기록이 있다. 물론 매월당도 이곳 당집을 지나가며 시 한 수 읊었다.
대관령에서
(고개 동쪽은 영동, 서쪽은 영서라 함)
대관령에 이제 구름 걷히니
가파른 고개에 눈은 아직 남아 있네.
양장(羊腸)처럼 산길은 험하고
새나 나는 길 역참(驛站)은 멀기만 하네.
늙은 나무 신당을 에워싸고
맑은 이내는 바닷가 산에 이어졌네.
높이 오르며 한 수(首) 짓기 참으려 하건만
풍경은 사람 마음 들뜨게 하네.
大嶺
(嶺以東稱嶺東. 以西稱嶺西)
大嶺雲初捲. 危巓雪未消. 羊腸山路險. 鳥道驛程遙. 老樹圍神廟. 晴煙接海嶠. 登高堪作賦. 風景使人撩.
그는 가파른 고개, 구불구불 구절양장(九折羊腸)을 보며 저 아래 먼 역참을 걱정하다가 역시나 풍광에 빠져 시 한 수 잊지 못했다.
이제 매월당이 넘었을 대관령 옛길 출발이다. 성황당 옆에는 안내 지도도 잘 그려 놓았고 선자령 가는 길 방향 나무 데크도 훌륭하게 설치해 놓았다. 고개 정상에 닿으면 옛길이 오솔길로 이어져 내려간다. 이윽고 신작로(1917년 준공 대관령 포장도로, 옛 고속도로)를 건넌다. 어머니를 그리며 대관령 길에서 읊은 사임당의 사친시비(思親詩碑)가 거대하게 서 있다. 서울 가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딸의 마음이니 다소곳하게 앉혀 놓았으면 좋았으련만….
조금 아래 공터에 차 몇 대는 세울 수 있는 편의 공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반정(半程) 안내문이 있다. 반정이란 영서 쪽의 횡계역과 영동 쪽(강릉)의 구산역을 잇는 길의 중간 지점에 해당하는 위치란 뜻이다. 대관령 정상은 바람도 심하고 터진 공간임에 비해 이곳은 대관령 고갯길에서 아늑한 곳 중 하나다. 순조 24년(1824년) 이곳에 사재를 털어 주막을 연 이가 있었다. 강릉부 향리 기관(記官: 기록 담당) 이병화(李秉華). 그의 은혜로움을 기록한 유혜불망비(遺惠不忘碑 : 끼친 은혜를 잊지 못한 비)가 조금 아래 옛길에 남아 있다. 아랫마을 어흘리 주민들이 세웠다 한다. 감사한 마음 가득하다.
많은 돈 내어 이자 늘려 이 주막 여는 은혜 베푸니
(우리 주민은) 이로써 생활하고 농사 없이도 잘 살 수 있네.
길손은 휴식할 수 있고 사는 이는 쉴 곳 있어
이 사실 한 조각 돌에 새겨 영예로움 길게 전하리.
百緡殖利惠此店幕 賴以資生不耕猶食 行旅得息居者有廬 銘之片石以永來譽
아쉽게도 우리 시대까지 저 주막이 남아 있지 않아 옛가수 박재홍은 대관령 고개에서 애타게 노래한다.
대관령 길손
1. 끝없이 가는구나 님 없는 타향 길을
오늘도 해는 지고 주막집은 멀고 멀어
방울새만 히죽히죽 나그네 울리는데
정든 고향 왜 버렸나 대관령 길손
2. 갈 곳도 없는 몸이 쉴 곳이 있을소냐.
떨어진 보따리를 베게 삼고 벗을 삼고
별을 보고 눈물 짓는 나그네 외로운 밤.
어머님을 불러보는 대관령 길손
반정에는 대관령 옛길 안내석이 듬직하게 서 있다. 이곳에서 내려다보면 강릉 시가지가 한 눈에 들어온다. 그 앞 푸른 바다. 가슴이 뻥 뚫린다.
단원도 정조의 명(命)을 받아 금강사군첩을 그릴 때 이쯤 되는 위치에서 그렸을 것이다. 구절양장 고갯길과 아련한 명주가 내려다보인다.
걸어 내려가는 옛길에는 가을이 깊이깊이 내려앉았다. 가다가 어디든 털석 앉으면 낙엽 방석이다. 고갯길이 생각보다 넓고 평탄하다. 또 한 사람, 정성과 사재를 내어 백성을 사랑한 이가 있었다. 성종 때 관에 진출해 중종 때 강원도 관찰사를 지낸 고형산(高荊山)이다. 그는 대관령 길이 너무 좁고 험난한 것을 보고 작은 수레라도 다닐 수 있게 길을 다시 닦았다. 곳곳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이 일로 해서 큰 욕을 보았다는 항간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병자호란 때 청군의 일부가 바닷길로 주문진에 상륙하여 대관령을 넘었다는 것이다. 이들이 인조를 압박한 청군의 일부였으니 대관령을 넓힌 고형산에게 부관참시하라는 명을 내렸다는 것이다. 역사에 기록이 없으니 썰(說)일텐데 길을 바라보던 옛사람들의 생각과 암군(暗君)을 보는 백성의 눈이 무섭다.
물 소리, 새 소리, 낙엽 밟는 소리 들으며 내려오면 주막을 만난다. 옛 주막 터에 재현한 주막 건물이 있다. 옛 명주의 주모와 너스레떨며 막걸리 한 잔 했으면…. 생각이 간절하다.
고개 아래 마을 어흘리 지나 내려오면 구산 서낭당이 있다. 강릉단오제 날 대관령에서 내려온 성황님이 잠시 머물면서 서낭제를 받고 가는 곳이다. 그 아래에는 대관령 박물관이 정성스레 모은 콜렉션을 보여준다. 길 아래 로타리를 지나면 매월당이 산 위에서 그린 구산역(丘山驛)이 있었던 성산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