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경제 = 이한성 옛길 답사가)
긴 대관령을 넘어 온 매월당은 구산역(丘山驛)에 닿는다. 이곳은 고개 넘어 첫 역(驛)이 있는 곳이라서 대관령 넘은 길손은 물론, 태백, 정선, 임계에서 삽당령 넘어 강릉으로 오는 길목이기도 했던 강릉의 입구였다.
우리 시대 와서도 영동고속도로가 대관령 넘어 이곳 성산면 구산리를 통과했으니 신라, 고려, 조선에 이어 강릉의 관문이었던 셈이다. 아마 매월당이 도착했을 때도 길손이 적지 않은 역(驛)이었을 것이다.
매월당이 이곳에 도착한 1460년에도 역에 별도의 정자가 있었다 하니 규모 있는 역이었던 셈이다. 매월당은 이곳에 도착하자 고단한 나그네길 힘든 심사를 내려놓는다. 평화로운 구산역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리는 듯하다.
구산역에서
구산역 정자는 작은 봉우리 곁에 있는데
꽃나무 새삼 맑고 그윽하구나
보리밭 두둑 꿩은 새끼 데리고 나오고
뽕나무 언덕에는 비둘기가 암컷 쫓네
사철 경치는 곳곳이 좋은데
세월은 괴롭게 빨리도 흐르누나
에라 신선을 벗삼아 조차
바닷가나 끝없이 바라보리
丘山驛
驛亭依小巘. 花木更淸幽. 麥壟將雛雉. 桑巓逐婦鳩. 年光隨處好. 歲月苦奔流. 耐可從仙侶. 看窮海上洲.
구산역의 구산(丘山)은 공자가 태어난 니구산(尼丘山)과 산세가 비슷하여 구산이라 했다 한다. 고려적 보현산성의 이름을 딴 성산면 구산리로 대관령 서낭님이 단오제에 아들 집(구산리 서낭당)에 들러 가는 길목이기도 하다.
이중환의 택리지 산수 편에는 백두대간 위 금강산, 설악산, 한계산, 오대산을 설명하면서 “이 고개 등뼈로부터 조금 지나 대관령 동쪽 강릉으로 통하는 구산동이 있다. 천석(물과 돌)이 매우 뛰어나다(自此領脊 稍而 大關嶺 東通江陵 有丘山洞 泉石絶勝)”라고 구산동을 소개했다.
그런데 동국여지승람에는 미처 생각 못했던 반전도 있다.
“구산역(丘山驛)은 부 서쪽 20리에 있다. 정자가 있는데 사람을 서쪽으로 전송하는 곳이다(送人西上之地)”.
매월당을 따라 가다 보니 강릉을 떠나가는 애닮은 이들의 이별의 장소이기도 한 이곳의 한 면을 놓쳤던 것이다. 이곳에서 쓴 여말선초(麗末鮮初) 문신 조운흘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구슬 같은 눈물 눈물 옥잔에 떨어진다.
양관곡(陽關曲) 세 번 불러 그대를 전송하네
태산이 평지 되고 푸른 바다 말라야,
비로소 구산의 이별 눈물 그쳐지겠지.
珠淚雙雙落玉卮 陽關三疊送人時 太山作地滄溟渴 始斷丘山泣別離
* 양관곡: 당나라 시인 왕유는 서역으로 떠나는 친우 원씨 집 둘째 아들을 양관에서 보내며 이별의 노래 양관곡을 부르는데 아쉬움에 후렴을 세 번 불렀다.
이렇듯 오는 자 가는 자가 저마다 사연을 안고 교차하던 성산면소재지 구산동은 2001년 영동고속도로에 대관령 터널이 뚫리면서 한가로운 한촌(寒村)이 되었다. ‘성산먹거리촌’이라고 쓴 안내판이 무색하게 점심 한 끼 먹으려고 두리번거려야 했다. 매월당은 역(驛)에서 나그네 밥 드셨겠지.
매월당이 그 다음 들른 곳은 남대천가 언덕에 자리 잡은 홍제원(弘濟院)이었다. 지금은 흔적도 없는데 남대천길 따라 강릉 IC로 가는 길, 강릉교도소 입구 지난 곳 언덕에 강릉시가 세운 작은 홍제원 터 표지석이 때 가득 낀 채로 앉아 있다.
이제 누가 홍제원에 관심 있겠는가? 매월당을 그리는 이 있다면 행여 궁금해 할까. 구산역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다.
강릉은 정3픔 당상관이 도호부(都護府)의 부사를 맡은 큰 도읍이다 보니 객(客)도 많아서 이들이 머물다 갈 원(院)도 많았다. 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이름들이다.
홍제원(洪濟院), 제민원(濟民院), 대령원(大嶺院), 독산원(禿山院), 인락원(人樂院), 인부원(人富院), 자인원(慈仁院), 장연원(長淵院), 무응구리원(無應仇里院), 장수원(長壽院), 대제원(大濟院), 송현원(松峴院).
매월당은 홍제원 사화루(使華樓)에 올라 강릉을 바라본다.
홍제원 누각에 올라 바라보며 - 강릉에서
십리길 꾀꼬리와 꽃은 오랜 원(院) 깊이 있어
누(樓)에 종일 기대어 맑은 하루 보냈네
안개 낀 먼 포구에 고깃배 돌아오고
바람 멎은 맑은 물결 물새는 멱을 감네
풀색은 더부룩하게 마을길 덮었는데
버들가지 간드러지게 뜰에 그늘 드리웠네
초가 몇 집은 모두 그림 같이
전부 푸른 이내 대숲에 잠겨 있네
弘濟院樓登眺 江陵
十里鶯花古院深. 倚樓終日費淸今. 煙生遠浦回漁艇. 風定晴波浴水禽. 草色蒙茸侵巷陌. 柳條腰䙚壓庭陰. 幾家茅舍渾如畫. 都在靑煙翠竹林.
강릉에서의 매월당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편했던 것 같다. 강릉을 읊은 또 다른 그의 시도 한가롭다.
강릉
개와 닭 소리는 용궁까지 이어지고
뽕밭 삼밭은 바닷길에 닿았네
비릿한 바람은 저녁 포구에 불어오고
고깃배는 꽃마을로 돌아온다네
江陵
鷄犬連鮫市. 桑麻接海門. 腥風吹晚浦. 漁艇返花村.
이렇게 마음 편했던 매월당에게도 강릉이 언제나 따듯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중년이 되어 들른 강릉은 매월당에게 힘든 곳이기도 했다. 그의 또 다른 시 한 편을 보자. 역시나 매월당 시집 속 시(詩)다.
강릉 옥벽(獄壁)에 짓다
슬프다, 기린이 때를 못 맞추어 나왔구나
서쪽 수렵 당시 사냥꾼의 과실이었네
공자(유력한 儒士?)가 상처 한 번 쓰다듬지 않았다면
천추 만세에 사슴이라 불렀으리
題江陵獄壁
吁嗟麟也出非時 西狩當年過獵師 不是宣尼傷一撫 千秋萬歲謂麕麋
도대체 무슨 일일까? 매월당이 강릉 옥사에 갇혀 그 벽에 쓴 시인가? 아니면 누군가 지인의 갇힘을 듣고 황망히 옥으로 가서 지은 시인가?
전후 사정은 알 수가 없는데 사냥꾼(獵師)의 과실이라 했으니 무엇인가 관가에 오해로 투옥된 정황이다. 다행히 니(尼: 공자 중니/仲尼의 제자. 즉 어느 유사/儒士이거나 또는 니승/尼僧)의 도움으로 노루나 사슴 무리가 아닌 기린(麒麟: 상서로운 상상의 동물)임이 알려졌다는 내용이다. 다행히 오해가 풀린 것이다. 글의 내용으로 보면 매월당 자신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훨씬 높다. 욕보셨네 매월당님.
강릉의 아름다운 별칭 ‘임영’
복원해 놓은 강릉대도호부 동헌(東軒) 마당에는 죄인을 취조하는 형구들이 무섭게 놓여 있다. 매월당이 투옥되었다면 욕을 보지 않았을까?
강릉대도호부 관아 뒤에는 객관(客館) 임영관(臨瀛館)이 자리잡고 있다. 고려 태조 19년(936) 83칸의 건물을 짓고 임영관(臨瀛館)이라 이름 붙였다. 임영(臨瀛)이란 바다에 임(臨)해 있다는 뜻이다. 이후 시인 묵객들은 강릉을 강릉이라 부르기보다는 임영이라 부르는 일이 더 많아졌다.
사임당도 대관령에서 고향집을 내려다보며 ‘머리 하얀 어머니 임영에 계시는데(慈親鶴髮在臨瀛)’라 읊고 있다. 이처럼 고장의 옛 이름이 객관의 이름이 되고, 이어서 객관의 이름이 그 고장의 별칭으로 사용하는 일은 자주 있었다.
삼척의 객관은 진주관(眞珠館)인데 진주는 삼척의 별칭이 되었다. 나주의 옛 이름이며 객관 이름인 금성(錦城)은 이름 자체가 아름다우니 후세 사람들도 금성이란 이름을 자주 사용하였다.
임영관의 건물들은 객관의 쓰임새가 없어진 후 뜯어져 나가 다른 누각에 건축 자재로도 쓰이고 퇴락하고 허물어졌다. 다행히도 객관 정문인 삼문(三門)은 살아남아 강릉을 대표하는 고려 목조건물로 인정받아 국보가 되었다.
그러나 필자의 눈길을 끄는 것은 임영관이라고 쓴 현판. 안정감 있게 쓴 글씨다. 전해지기로는 공민왕의 글씨라고도 하는데 그랬으면 좋겠다. 저 글씨가 공민왕의 친필이라면 매월당도 읽었을 것이다.
또 하나 임영관을 찾는 이유는 임영관 담 아래 피는 매화를 만나는 즐거움에서다. 삼동(三冬)이 지날 무렵이면 남녘에서 매화 소식이 전해진다. 강진이나 해남이나 통도사의 봄소식이 오면 공연히 내 마음에도 봄이 온다. 멀리까지 갈 수 없으면 이제는 편리해진 KTX를 타고 임영관 돌담에 오면 중부지방 이른 봄소식이 이곳에 숨어 있다. 임영관 돌담 아래 햇빛은 어느 곳보다 따듯하다. 이날 점심길은 임영이다.
사계가 아름다운 남대천가
임영관 들렸다가 아쉬움이 남아 남대천가로 간다. 매월당 시절에는 서낭제가 지금처럼 남서낭과 여서낭의 합방의식은 아니었을 것이지만 우리 시대에까지 사랑받는 강릉단오제 여서낭이 사시는 대관령국사 여성황사(大關嶺國師 女城隍祠)를 찾아간다. 홍제원 터에서 길 건너 남대천 변에 새로 집을 마련하셨다.
단오가 다가오는 음력 4월 15일 이른 아침, 대관령 산신당에서 산신제를 지낸 후, 국사서낭당에서 국사성황(범일국사)제를 지낸다. 이어서 국사서낭 신위를 신목(神木)에 모시고 강릉 시내로 행차가 떠나는데 도중 구산서낭당에 들러 잠시 굿을 한 후 이곳 여성황사로 행차하면 여서낭 신위와 합사(合祀)함으로 1년간 헤어졌던 부부 남서낭(대관령 국사서낭)과 여서낭(국사여서낭)의 합방(合房)은 이루어진다. 서낭신도 그리웠을 것이다. 이때부터 단오제 잔치가 흐드러지게 펼쳐지는 것이다.
기왕 남대천가로 왔으니 강릉 여행에 빼놓으면 서운할 신복사 터를 찾아간다. 무심하게 지나면 잘 모르지만 곰곰 살피면 강릉은 영동지방의 불국토다. 구산선문 범일국사의 사굴산파가 번성했던 지역답게 곳곳에 수준 높은 불교 유적이 숨어 있다. 현존하는 강릉의 명찰 보현사를 비롯하여 등명낙가사, 굴산사지, 신복사지, 한송사지, 석탑, 석불, 당간지주가 산재한다.
신복사 터에는 월정사에서와 마찬가지로 석탑에 경배하는 공양보살상이 빼어난 모습으로 현존한다. 매월당이 이곳에 들러 갔는지는 기록이 없어 알 수 없지만 필자의 강릉 길에는 즐겨 들르는 코스다. 이곳의 사계(四季)를 놓치기 아까워서다.
더 번듯해져야 할 매월당 기념관
이제 매월당이 푸른 바다를 바라본 경포대를 향해 출발이다. 가는 길 도중 들러야 할 곳들이 있다. 매월당 시대에는 없었지만 우리에게는 강릉 여행길에서 뺄 수 없는 곳들이다.
처음 들르는 곳은 중앙시장과 월화거리다. 강릉대도호부 길 건너 동편인데 오랜 동안 시민들과 시간을 함께 한 서민의 전통시장이다. 그 동편 광장이 월화거리인데 먹거리도 있고 자주 거리 공연도 열린다. 이곳 옹심이의 순박한 맛이 인공 맛에 지친 우리를 편하게 한다. 월화거리에서 공연을 보다가 추우면 아무리 기다려도 기차는 오지 않는 월화역에서 커피 한 잔 하자.
다음 들르는 곳은 오죽헌이다. 율곡과 사임당을 만나는 곳이다. 그다지 볼 것은 없지만 강릉 여행길에 한 번은 들러 볼 만하다.
다음은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이다. 300여 년 전 효령대군 후손 이숙번이 지은 개인집이다. 경포호를 배다리(船橋)로 넘어 다닐 수 있게 지어서 선교장이란 이름이 붙었다 한다. 개인집이지만 건물의 규모나 산등성이까지 껴안은 터서리가 넉넉하여 조선시대로 돌아간 것 같은 한 나절 힐링의 공간이다.
전통한옥의 멋도 느낄 수 있다. 사랑채 열화당(悅話堂) 주인은 예술전문출판사 열화당을 열어 지금도 친근한 책이름 열화당문고를 펴냈다. 필자의 책꽂이를 지키고 있는 열화당문고 몇 권을 보면서 봄이 오면 다시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입장료가 있는데 큰 집 유지보수비라고 생각하면 된다.
다음 들를 곳은 조선의 천재들을 되살린 허균 허난설헌 공원이다. 허균과 난설헌의 아버지 초당(草堂) 허엽의 고택을 되살려 주변을 공원으로 조성하고 남매의 기념관도 문을 열었다. 공원에는 문장으로 뛰어났던 이들 허씨 집안 사람들의 시비(詩碑)를 세웠는데 특히 초희 아씨 난설헌의 좌상도 조성하고 그녀의 가슴 아픈 시 곡자(哭子: 죽은 애들을 곡함)도 새겨 놓았다. 초희 아씨 댁 담장 너머로 매화가 꽃을 피울 때 들르면 더욱 좋다.
그 다음 들를 곳은 매월당 기념관이다. 물론 매월당 시대에는 없었다. 매월당이 경포호수를 지날 때 그 옆에 후대에 자신의 기념관이 생길 것이라고는 추호도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매월당이 강릉 김씨였기에 후대 강릉 김씨의 뜻있는 이들이 경포호 주변에 매월당 기념관을 세웠다. 규모는 작고 전시물은 소략하다.
오백여 년 전 남긴 것 없이 살다간 한 거사의 삶을 이렇게라도 되돌아 봐 주는 이들이 있는 것은 고마운 일이다. 그가 남긴 글, 필적과 초상화가 우리 시대를 바라보고 있다. 더 많은 자료가 모이고 전시관도 더 번듯해지기를 기원한다.
바다 코앞에 있었던 경포대
이제 경포대다. 경포대는 고려시대부터 하도 이름이 알려져 글과 그림을 모으면 책 몇 권은 묶어야 할 것이다. 경포대는 고려 충숙왕 13년(1326) 박숙정이 방해정 뒤 인월사 터(현 경포대보다 바다에 가까운 곳. 신라 화랑의 심신 단련 터)에 세웠는데 조선 중종 3년(1508)에 강릉부사 한급이 현재 자리로 옮겼다 한다.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보니 호수 주변에는 누정이 많이 자리 잡았다. 경포대(鏡浦臺), 금란정(金蘭亭), 방해정(放海亭), 해운정(海雲亭), 활래정(活來亭), 경호정(鏡湖亭), 석란정(石蘭亭), 상영정(觴詠亭), 취영정(聚瀛亭), 호해정(湖海亭), 천하정(天河亭), 월파정(月波亭). 이름도 의미깊다.
동국여지승람에는 경포를 찬(讚)한 글이 넘치고, 이곳을 그린 그림도 겸재, 단원, 이방운, 송기성 등 여럿이다. 대표적인 시와 그림은 경포대 주변에 그림 판과 시비(詩碑)를 조성하여 방문하는 이들의 길잡이가 된다.
매월당은 경포대에 올라 어떤 마음을 읊었을까?
경포대
만리 해 뜨는 곳 바라보니 아득한데
창파는 아물아물 아침 놀에 잠겨 있네
진시황은 도 넘게 삼신산 약 사랑했고
사자(使者)는 헛되이 팔월에 배 띄웠네
흰 물결 높이 솟아 자라 등을 때리고
붉은 구름 땅에 꽂혀 신기루로 비껴 있네
이제 문득 신선놀음이 장하게 여겨져
푸른 바다 언덕에서 동해 보며 술잔 드네
鏡浦臺
萬里扶桑望眼賖. 蒼波淼淼蘸朝霞. 秦皇謾愛三山藥. 漢使空浮八月槎. 白浪滔天鼇背抃. 紅雲揷地蜃樓斜. 從今陡覺仙遊壯. 杯視東溟碧海涯.
현재의 경포대보다 훨씬 바다에 가까웠던 옛 경포대에 올랐으니 바다가 코앞이었을 것이다. 그래 술잔 한 번 높이 들자구나.
임금도 예외는 아니었다. 숙종과 정조는 경포대에 오르지는 못했지만 그림을 보고 흥을 이기지 못했다. 숙종의 어제시(御製詩)가 경포대에 걸려 있다.
물가의 난초 언덕의 지초 동서로 둘러싸고
십리 물안개 물속에 비치누나
아침 으스름 저녁 그늘 천만 가지 형상인데
바람 앞에 술잔 드니 흥은 무궁하구나
汀蘭岸芷繞西東 十里煙霞暎水中 朝曀夕陰千萬狀 臨風把酒興無窮
임금도 필부도, 남자들은 어찌하여 멋진 경치 앞에 술잔을 높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