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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심원 “피고에게 살인혐의 유죄를 평결한다”

서울 남부지법 ‘살인사건’ 형사재판… 배심원단 참여 12시간 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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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77,78호 박성훈⁄ 2008.08.05 18:12:21

<런어웨이>라는 미국 영화가 있다. 존 그리샴의 소설 <사라진 배심원>을 각색하여 제작된 영화로, 극 중에는 12명의 배심원단과 이들을 매수해 판결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왜곡시키려는 변호인단이 등장한다. 그 밖의 미국 법정영화나 드라마에서도 국민이 배심원으로 재판에 참여해 평결하는 모습이 자주 등장한다. 이처럼 영화에서만 볼 수 있던 재판제도가 우리나라 법정에서도 시행되고 있다. 2008년 1월 1일부터 시행된 ‘국민참여재판’이 그것이다. 국민참여재판은 시민이 배심원이나 예비배심원 자격으로 참여하는 형사재판이다. 배심원이 피고인의 유·무죄 평결을 내리고, 유죄 평결이 내려진 피고인에게 형량을 제시할 기회를 갖게 된다. 물론, 배심원의 평결과 양형이 재판부의 판결에 구속력을 갖진 않지만, 재판부도 배심원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하겠다는 입장이다. ■ 서울 남부지법, 사상 처음 배심원 재판 방송공개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도입된 지 7개월이 흐른 지금까지 23건의 강도·상해살인·성범죄·살인미수·상해치사·마약 등 강력 형사사건이 배심원들에 의해 평결됐다. 배심원 평결과 재판부의 판결이 일치한 재판은 21건. 배심원들의 의견이 재판부에 적절히 반영된 것으로 해석된다. 대다수의 배심원들도 공판절차와 평의에 만족한다는 의견을 갖고 있다. 7월 22일에는 서울 남부지방법원의 첫 국민참여재판이 있었다. 이날 남부지법은 배심원들이 공판과정에 참여하는 모든 장면을 촬영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재판의 전 과정에 촬영이 허가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법원에 촬영허가신청서를 내 판사가 허락하면 재판 도입부에 한해서만 촬영이 허용됐다. 대법원은 ‘재판관의 판단하에 촬영을 허가할 수 있다’는 규정을 두고 있지만, 개인정보 보호 차원에서 재판 전의 과정에 대해 촬영 허가를 낸 경우는 없었다. 이처럼 남부지법에서 이례적으로 방송 촬영을 허가한 까닭은 ‘국민참여재판’을 자세히 알리고 홍보하기 위해서다. 법원의 한 관계자는 “국민의 알 권리를 보장하고 국민참여재판에 대한 시민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라며 공개 이유를 설명했다. 공판을 4시간 앞둔 오전 9시 30분. 서울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남부지방법원(형사11부) 406호 대법정은 배심원 선정기일 출석통지서를 받고 나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50대 아주머니와 아저씨에서부터, 말끔한 와이셔츠 차림의 회사원들, 야구모자를 쓴 20대 청년까지 연령도 차림새도 다양한 이들은 모두 38명의 배심원 후보들이었다.

■ 배심원 후보들, 연령도 직업도 각양각색 약 7개월 간의 국민참여재판에서 배심원 후보자에게 보낸 소환통지서는 평균 143통이다.이 중 평균 42명이 출석했다고 한다. 이날 재판에서 남부지법 측이 지역 주민들에게 보낸 소환통지서는 총 180통이다. 소환통지서가 발송되면 일정 구속력이 있어 불가피한 사정이 없는 한 반드시 참여해야 한다. 사정이 있을 때에는 위임장을 보내고, 담당판사가 위임을 허락할 경우에 한해 불참할 수 있다. 만약, 소환통지서를 받았음에도 소환에 불응하면 일정액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재판부의 한 관계자는 “대개 시민들은 법원 분위기에 친숙하지 않아, 소환통지서를 받으면 더러 긴장을 한다”며 “청구서에 ‘불참시 과태료가 청구된다’는 규정이 명시돼 있어, 이에 대한 거부감으로 화를 내는 시민들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배심원도 공무수행이기 때문에 직장에서도 반드시 양해를 하도록 돼 있으며, 소정의 급여도 제공된다”고 설명했다. ■ 사건설명과 질문 거쳐 배심원 선정 오전 10시가 되자 38명의 후보 중 진짜 배심원을 뽑는 선정절차가 시작됐다. 이는 배심원 후보들의 신상보호 차원에서 비공개로 진행된다. 이 과정에서 검사와 변호인은 사건에 대한 설명과 함께 갖가지 질문을 던져 부적격자를 가려내는 작업을 한다. 후보자들은 서울 남부지역(영등포구·구로구·강서구·양천구·금천구)에서 무작위로 뽑힌 20세 이상의 시민들이기 때문에 각자의 이해관계와 판단력이 다를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사건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아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거나 자진 탈락 의사가 있는 사람들을 솎아내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배심원 선정절차가 진행된 지 2시간 가량이 지나면서, 선정되지 못한 배심원 후보자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했다. 검찰 측에서 탈락시켰다는 한 배심원 후보는 “내가 건설업종에서 일하다 보니, 피고인과 같은 조선족을 고용해 함께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며 탈락 이유를 추측했다. 한 50대 여성 후보는 “몸이 안 좋아 공판시간 동안 버틸 수가 없을 것 같아 중도에 탈락하기로 했다”면서도 좋은 경험이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법무사무실에서 근무하고 있는 20대 후보는 “직업 특성상 이런 일들을 가까이 접해왔기 때문에 경험이 낯설지 않았다”며 “앞으로 회사업무를 해나가는 데 많은 공부가 됐다”고 선정절차에 참여한 소감을 전했다. 30대 초반의 한 후보는 “질의를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길어 따분했다”면서도 “2~3명의 인원이 40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을 평가하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했다. 이들은 줄지어 급여 5만 원씩을 받고 귀가했다. 선정절차를 통과한 배심원은 예비배심원들까지 포함해 총 11명. 이들은 배심원으로 선정된 순간부터 신변보호를 위해 일체의 언론 접촉과 신상 공개가 금지된다. 재판 중에도 각자 부여된 번호에 따라 불리우게 된다. ■ 배심원 이해 돕기 위해 파워포인트 등장 오후 1시 30분 공판이 시작되고, 배심원 9명과 예비배심원 2명은 자못 엄숙한 자세로 나란히 서서 공정하게 직무를 수행할 것을 선서했다. 이어 살인과 상해치사 등 이해하기 어려운 법률용어와 사건에 대한 판사의 설명이 있었다. 이번 심리는 조선족 박모 씨가 저지른 살인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박 씨는 지난 4월 22일 자정 즈음에 서울 구로구 대림동 인근의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다 다른 좌석에서 술을 마시던 김모 씨(35)와 시비가 붙어 인근 철로변에서 구둣발로 2~3회 얼굴을 가격해 숨지게 한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쟁점은 살해 당시 박 씨의 행위에 살인의도가 있었는지 여부였다. 살인의도가 있는 것으로 판단되면 ‘살인죄’가 적용되지만, 단순한 상해의도였다면 ‘상해치사죄’로 형벌이 가벼워지게 된다. 배심원들은 재판을 지켜보며 고의성이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한다. 검찰은 대림역 주변의 CCTV 자료와 주변 목격자들의 진술을 토대로 박 씨의 행위에 살인의도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검사 측에서는 피해자 김 씨의 처참한 모습이 담긴 사건 현장 사진, 박 씨의 범행 모습이 담긴 영상, 범행에 사용된 구두, 피해자의 부검사진 등을 가지고 배심원들의 감정을 자극했고, 변호인은 박 씨의 평소 성격이 폭력적이지 않은 점과 다음날 친한 친구와 아무렇지 않게 식사를 했다는 진술을 토대로 살인을 저질렀음을 인식하지 못한 점을 들어 상해치사임을 주장했다. 재판에서는 또 배심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한 여러 노력들이 엿보였다. 눈여겨볼 점은, 검사 측과 피고인 측이 상호 반론을 벌이는 형식이 아니라, 배심원들에게 호소하고 설득하는 과정이 병행된 점이다. 판사와 검사·변호사는 배심원들이 어려운 법률용어를 이해하지 못할 것을 배려하여 구어체 어투와 법률용어의 눈높이 해설 등을 심리 중간중간마다 덧붙였다. 또한, 피고인과 검사 양측 모두 파워포인트 자료를 준비해 사건에 대한 시각적 이해를 도왔다. ■ 배심원 평결…‘살인’ 7명, ‘상해치사’ 2명 오후 8시. 예상시간을 훨씬 넘어 공판이 끝나고, 배심원들은 피고인의 유·무죄를 결정하기 위한 평의 과정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배심원 9명만 참여하고 예비배심원 2명은 제외된다. 배심원은 하나 둘 법정을 빠져 나가 평의실로 향했다. 평의 과정 역시 배심원단을 보호하기 위해 공개되지 않았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한 의견으로 만장일치된 것이 아니라, 서로 의견이 분리돼 다소 어려움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오후 9시 30분. 법정에 다시 입장한 배심원들 중 대표가 평의 결과가 적힌 봉투를 재판관에게 전달하면서 장내에는 순간 정적이 감돌았다. 평결 결과는 유죄. 양형 결과는 배심원 9명 중에 살인 의견을 낸 사람이 7명, 상해치사 의견이 2명으로 살인 쪽에 힘이 실렸다. 배심원들이 결국 검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서울 남부지법 형사11부(부장판사 한창훈)는 판결을 하며 “피해자가 바닥에 넘어져 저항할 수 없는 상태에서 구둣발로 강하게 짓밟는 행위를 하고도 피해자를 현장에 방치한 채 현장을 이탈한 사실이 인정된다”며 “폭행 경위와 정도, 위험성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피해자 사망 사인에 미필적 고의가 있었다고 판단한다”며 박 씨에게 징역 9년형을 선고했다. 이어 “다만, 한국에 돈을 벌기 위해 와서 그 동안 다른 죄가 없었고 우발적으로 사건을 일으킨 점은 참작한다”고 덧붙였다. 또, 박 씨가 범행에 사용한 구두도 몰수했다. 배심원 선정을 시작으로 9시 반부터 진행된 이번 재판은 12시간이 경과한 뒤에야 끝이 났다. 이날 재판에 참여한 배심원들은 대체로 보람을 느낌과 동시에 국민참여재판 제도가 올바르게 정착돼야 한다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한 배심원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하게 되는데 이렇게 해도 되나 싶어 더욱 심사숙고했다”면서 일반 시민에게도 판단의 여지를 제공하는 배심원 재판제도에 대해 “바람직한 제도”라고 평가했다. 법을 잘 모르는 평범한 시민이 판결에 참여하는 모습이 다소 위험하다는 지적도 없지 않다. 그러나 사법부의 친절한 설명과 판단 근거의 제시를 통해 민의가 반영된 판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민주법조문화를 이룩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 국민참여재판을 통해 멀게만 느껴졌던 법정이 보다 국민에게 가깝게 느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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