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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345일 만에 해결되기까지

총리 방문으로 실마리…종교계 나서 14시간 협의 끝 ‘타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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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52호 심원섭⁄ 2010.01.11 16:39:38

지난해 1월 20일 새벽 서울 용산 재개발 지역의 남일당 4층 건물을 점거 농성 중이던 철거민들을 경찰이 진압하는 과정에서 옥상 망루에 불이 붙어 농성자 5명과 경찰관 1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용산참사’가 발생했다. 그리고 345일 만인 지난해 12월 30일 보상 문제 등이 극적으로 타결돼, 해를 넘긴 1월 9일 희생자에 대한 장례를 완료했다. 이날 장례식은 오전 9시 발인식을 시작으로 운구가 퇴계로를 거쳐 영결식장인 서울역광장에 도착하는 순서로 치러졌으며, 이어 오후 2시에는 유가족과 시민의 오열 속에 행진이 시작돼 오후 3시 노제 장소인 용산참사 현장으로 이동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국민들의 애를 태웠던 용산참사 문제가 해를 넘기기 직전에 전격적으로 타결돼 일단 다행이라는 반응들이지만, 협상 과정은 말 그대로 진통과 난항의 거듭이었다. 정 총리의 분향소 방문으로 협상 ‘청신호’ 켜져 서울시와 ‘용산 철거민 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범대위)’ 등에 따르면, 지난해 1월 20일 참사 발생 직후 서울시가 꾸린 대책본부와 유족·범대위는 수많은 대화와 만남을 이어가며 보상 문제 등에 대한 타결점을 찾았지만, 양측의 입장 차이로 협상은 번번이 평행선을 달렸다. 이에 따라 타결의 실마리조차 찾지 못한 채 용산참사는 해를 넘겨 1주년을 맞는 듯했다. 더구나 협상 타결 하루 전인 12월 29일까지만 해도 참사가 일어난 남일당 건물에는 장례식도 치르지 못한 희생자들의 분향소가 마련돼 있었고, 경찰도 주변에 전·의경 1~2개 중대를 배치해 협상 타결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에 따라 유족을 대변해온 범대위도 올해 마지막 날인 31일 ‘용산참사 해결 촉구 문화제’를 2009년 마무리 행사로 열 예정이었다.

협상이 이처럼 난항을 겪은 까닭은 양측 간 입장 차이가 워낙 컸기 때문이었다. 그동안 유족 측은 경찰 강제진압의 책임자 처벌과 대통령 사과, 진상 규명 및 수사기록 3000쪽 공개 등을 강하게 요구했다. 반면, 정부와 서울시는 용산참사를 ‘철거민 과실로 일어난 사건’으로 규정하고, 유족 측의 생계유지 수단을 위한 보상 요구에 대해서도 “관련 근거법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해왔다. 양측은 8월에 합의 도달 직전까지 갔다가, 막판에 일부 이견을 좁히지 못하는 바람에 끝내 협상이 결렬되기도 했다. 이런 양측의 입장 차가 조금씩 좁혀들기 시작한 것은 10월경이었다. 당시 정운찬 신임 국무총리가 추석을 맞아 용산참사 분향소를 방문해 “사태 해결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협상 타결을 위한 청신호가 켜지기 시작했다. 유족 측은 정부 사과 요구 등에서 전향적 자세를 보였다. 그러나 정부는 수억 원이 들어갈 장례식장 비용 부담, 유족에 대한 금전적 보상, 재개발 지역 철거민 생계보장 특별법 제정 등 범대위 측의 요구가 과다하다고 판단하면서 대화는 다시 흐지부지됐다. 여기에다 법원이 지난해 10월 ‘용산참사’ 당시 화재를 일으켜 경찰관 등을 숨지게 한 혐의 등으로 기소된 철거민 7명에게 징역 5~6년의 중형을 선고함으로써 참사 원인 등에 대한 공방을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게 만들었다. 당시 서울시 관계자도 “사태 해결 방안이 구체적으로 나온 게 없다. 지금은 얘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사태가 해결 기미를 보이지 않으면서, 불어나는 시신 안치 비용과 경찰력 낭비 문제도 꾸준히 제기돼왔다. 시신이 안치됐던 순천향병원에 따르면, 희생자 5명의 장례식 비용과 시체 안치 비용 등 지금까지 병원 측이 받지 못한 비용만 5억7000만 원에 달했고, 하루 시신 1구당 9만6000원씩 매일 48만 원이 추가됐다. 용산경찰서는 분향소 주변 주차장에 전경버스 3대와 전·의경 80~90명을 항시 배치해놓고 3교대 근무를 해왔다. 종교계 중재로 범대위·정부 입장 차이 좁히기 시작 하지만 종교계가 협상 자문회의를 구성해 양측의 진지한 대화를 유도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고, 평행선으로만 달리던 양측의 입장은 이런 노력 덕분에 조금씩 접점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난해 12월 29일 서울시와 범대위 측은 종교계의 중재로 만나 막바지 협상을 시작해, 이날 오후부터 다음날 오후까지 14시간 동안 밤샘 마라톤 협상을 벌인 끝에, 결국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345일 만에 합의안을 이끌어냈다. 용산 문제는 이제 해결 수순을 밟아가고 있지만, 서울시 곳곳에서 추진 중인 재개발·재건축 현장에는 유사한 사태가 당장 일어날 수 있는 곳이 한두 곳이 아니다. 개발 사업을 추진하려는 측과 더 많은 보상을 요구하는, 또는 개발 자체를 반대하는 원주민이나 상가 세입자 등의 대립이 끊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1월 2일 마포구 용강동에서는 공원으로 재개발되는 아파트에 살던 세입자 김모(66) 씨가 지난달부터 철거가 시작됐는데도 신청해 둔 임대주택 공급이 늦어지자 이에 불안감을 느껴 철거에 항의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또한 동작구 상도4동, 정금마을 재개발 지역에서도 20여 명의 주민과 상가 세입자들이 보상비로 주어지는 3개월치 영업평가 금액만으로는 다른 지역에 새로 터를 잡고 생계를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며 “주거 대책을 마련하고 적정한 보상비를 지불하라”면서 반발하고 있다. 상가 세입자에게 이사비와 영업손실 보상비 정도를 줄 뿐 재입주 자체는 불가능한 현재의 재개발 보상 제도가 전면 재검토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용산참사 같은 참극은 되풀이될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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