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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서로 못 믿으면서 선진국 될 수 있나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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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156-157호 최영태⁄ 2010.02.08 16:56:07

최영태 편집국장 지난 호 글에서 ‘아포스티유’라는 글로벌 스탠더드에 없는 문서를 한국 대학들이 외국에서 대학을 다닌 편입 지원 학생에게 강요한다는 사례를 얘기했다. 외국에서 학교를 다녔다는 기록을 ‘무조건 불신하고 보는’ 한국인의 일상적인 태도의 한 사례였다. 이런 지적에 대해 “얼마나 한국인들이 거짓말을 잘하는지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필자에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을 듯 싶다. 그래서 말하는데, 미국에도 사기꾼이 있고 허위신고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미국인들은 신기하게도 기본적으로 일단은 믿어준다. 상호신뢰 위에 구축된 사회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상호신뢰는 우선 멈춤(Stop) 표지판이 있으면 한밤중이라도 완전히 멈춰 선 다음에 출발한다는 것, 그리고 네거리의 신호등이 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 차량들이 약속된 순서대로 교차로에 진입하기 때문에 교통정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우리는 이렇게 서로 믿을 수 있나? 네거리 신호등이 나갔는데, 반대편 한국인 운전자가 먼저 코를 들이밀 게 뻔한데, 여기서 내가 그를 믿고 차례를 기다릴 수 있나? 신호등이 나간 지 몇 시간이 지나도록 네거리가 완전 불통 상태가 되지 않는다고 장담할 자신이 있는가? 사기꾼이 있는데도 미국인들이 우선 믿고 보는 방식으로 사회를 운영하는 데는 나름의 철학이 있다. “한 명의 사기꾼을 막기 위해 99명의 선량한 시민이 불필요한 부담을 지는 건 불합리하고 낭비적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다. 선량한 99명을 위주로 사회 시스템을 만들고, 사기꾼 1명을 잡아내는 별도의 시스템을 운영하는 게 돈이 적게 들고 편리하다는 원리다. 서유럽에 살다 온 사람들의 경험을 들어봐도 사회 구성 원리는 마찬가지다. 반면, 한국의 사회 구성 원리는 ‘99명의 민간인 거짓말쟁이와 1명의 믿을 만한 공무원’이란 룰을 따르는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많은 도장과 서류를 중복으로 요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근본 불신’ 시스템 때문에 99명의 시민들이 엄청난 경제적·시간적 부담을 져도 아랑곳 않는 게 한국 시스템이다. 잘못이 없어도 평생 ‘기본적으로 거짓말쟁이’란 의심을 받으며 살아야 하는 게 한반도에 사는 한국인의 운명이다. ‘부정적 피그말리온 효과’ 철저히 실행하는 한국 시스템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게 있다. 어떤 학생에게 “어쩜 넌 그렇게 잘하니”라고 칭찬부터 해주면 이 학생은 우등생이 된다. 반면, 아무 이유 없이 그에게 “넌 어쩜 그렇게 못하니”라고 반복적으로 말해주면 그 학생은 ‘선생님의 기대에 맞춰’ 문제학생이 된다는 이론이다. 여러 실험이 이 원리를 증명했다. 한국 사회는 피그말리온 효과를 철저히 실행하는 사회다. 공부 못하는 사람의 인생은 반드시 망가뜨린다. 한 번 실수한 사람에게 다시는 재기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 아무리 선량한 사람이라도 끊임없이 ‘증명서를 복수로 떼어 오라’는 압력을 받는다. 이렇게 도장, 증명서를 겹겹으로 받는 와중에 정부 부처, 공무원들은 ‘신의 자리’에 저절로 올라앉게 된다. 한국 만한 경제 규모의 나라에서 공무원 자리가 ‘신의 직장’이 되는 나라가 다른 나라에 있었던가? 후쿠야마가 한국에 던진 저주는 아직 풀리지 않았다. 서로 못 믿기 때문에 엄청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고, 그래서 모든 일이 삐걱거리고 결국 실패하게 된다는 그의 저주를 우리는 풀었는가? 요즘 세종시 수정안을 놓고 미생지신(尾生之信)이니, ‘증자(曾子)의 돼지’니 하는 신뢰·믿음과 관련된 말들이 회자되고 있다. 신뢰의 논란이 단순히 세종시 문제에 머물지 않고 한국 사회 전체의 시스템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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