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쇄
  • 전송
  • 보관
  • 기사목록

230년 전 ‘선배 기자’의 속 깊은 글을 읽으며

  •  

cnbnews 제167호 최영태⁄ 2010.04.26 15:59:43

최영태 편집국장 한국인들 사이에 유명한 책이 있죠. 바로 연암 박지원이 쓴 ‘열하일기(熱河日記)’입니다. 워낙 유명한 책이지만 엄청 두껍습니다. 최신 번역판(김혈조 교수 번역)은 500페이지가 넘는 책이 세 권입니다. 230년 전(서기 1780년)에 연암이 중국 황제를 알현하는 조선 사신 일행을 따라가면서 썼다는 이 두꺼운 책을 과연 읽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그간 요리조리 이 책을 피해 다녔습니다. 완역본을 읽기보다는 ‘이 책에 대한 책’을 읽으면서 주요 내용만 파악하려 들다가, 결국 완역판을 손에 들었습니다. 완역본이니 큰 흐름과는 상관없는 자잘한 내용도 많습니다. 그런데, 원본을 읽으니 역시 맛이 다르군요. 소개서와는 달리, 연암의 체취가 그대로 느껴집니다. 이런 게 바로 원본을 읽는 맛임을 새삼 느낍니다. 그 아득한 옛날에 그가 청나라 곳곳을 휘젓고 다니면서 써놓은 글들은 참으로, 오늘날 인터넷 정보검색이란 엄청난 수단을 장착하고 중국을 방문해도 웬만한 글쟁이가 근처에도 못 갈 정도로, 낱낱이 자세하게 당시 청나라의 문물과 사람을 보여줍니다. 연암의 글을 읽으니 “아, 이 사람은 내 선배 기자구나”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가 일기에 쓴 글은 자세한 숫자와 데이터로 현지 사정을 보여주는 ‘스트레이트 기사’부터, 자기 생각이나 감정을 풀어내는 칼럼 또는 기자수첩 같은 글들, 잠입기자처럼 술집·여염집에 몰래 들어가본 이야기들, 웃기려고 쓴 코미디 같은 글들, 울리려고 쓴 탄식까지, 정말 ‘일급 저널리스트’가 풀어낼 수 있는 온갖 기교와 글 종류를 망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기자’라는 직종이 없던 그 당시에, 조선의 일급 지식인이며 양반 중의 양반 출신인 그가 이처럼 자기 한 몸 사리지 않는 ‘취재 열정’을 발휘하고, 길에서 말을 타고 가며 먹을 갈아 글을 쓰고 현지 문물을 그림으로 그린 이유는, 책의 곳곳에서 감지되지만, ‘통곡할 만한 자리’라는 글에서 가장 잘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만주 벌판을 지나던 연암은 툭 터진 벌판에서 “좋은 울음터로다. 한바탕 울어볼 만하구나!”라고 외칩니다. 옆에 있던 사람이 “웬 울음?”이라고 묻자, 그는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을 확 풀어버리는 것으로 소리쳐 우는 것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소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좁은 조선반도 안에서 양반들이 백성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 생각은 안 하고, 이랬다저랬다 별의별 핑계를 들이대며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죽이는 모습을 ‘호랑이의 꾸짖음(虎叱)’이라는 글로 비판한 연암은, 경제 수준이나 제도·문물이 조선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앞서 나간 청나라를 거리거리에서 확인합니다. 조선 사람들이 ‘오랑캐가 세운 나라’라며 우리끼리는 청나라를 업신여기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청 황제의 부름에 꼼짝 못할 뿐 아니라, 사는 형편이나 경제 수준은 현격한 차이가 난다는 사실을 확인한 그의 가슴에는 ‘답답하고 울적한 감정’이 가득 찼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만주 벌판에서 통곡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넘겨짚어봅니다.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 이렇게 청나라의 앞선 문물과 제도를 속속들이 보여주면서 개선점을 제시했지만, 그런다고 조선은 달라지진 않았죠. 그리고 130년 뒤(1910년)에 조선은 패망합니다. 230년 전 참담한 조선의 현실을 바꾸기 위해 실성한 사람처럼 보고서를 써댄 ‘박지원 대선배’의 글을 보면서, 그리고 오늘날 우물 안 개구리처럼 답답하고 울적하게 살아가는 한국의 현실을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왜 이렇게 작고 속 좁게 사는지 묘한 동일감을 느끼면서 저도 ‘한바탕 울어볼 만한 좋은 울음터’를 찾아보고 싶어집니다.

배너
배너
배너

많이 읽은 기사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