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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인드 사이드, 사랑이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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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168호 편집팀⁄ 2010.05.03 15:25:35

글·윤영상 (ysangyn@naver.com) “사람은 태어날 때 그랬듯이 죽을 때도 혼자서 죽는다. 그만큼 외로운 존재이다. 그러나 어떤 쾌락일지라도 우리를 언제까지고 즐겁게 해주지는 못한다. 관능적인 쾌락에는 더욱 큰 자극이 필요하고, 남용이 되풀이되면 마침내 중독 상태로 빠진다. 그것은 이미 쾌락이 아니라 고통이요, 질병이요, 죽음이다.” 법정 스님의 ‘물소리 바람소리’ 중에서… 알콜중독·도박중독·일중독·성중독 등등 중독의 종류도 참 많거니와, 우리는 누구든지 무엇인가에 중독된 채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법정 스님은 중독의 원인을 외로움에서 찾으셨다. 만약 내 마음 안에 악마가 살고 있다면, 그 악마는 나의 외로움을 호심탐탐 노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타는 외로움은 죄에 대한 중독마저 불러일으킨다. 오늘은 지난 주에 보았던 두 편의 영화와 두 권의 책을 통해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고 싶다. ‘사랑이 희망이다’ 법정 스님은 외로움을 인간의 숙명으로 보셨나보다. 외로움은 중독을 낳는다. 중독을 이기기 위한 해결책으로 스님은 ‘절제’를 제시하셨다. 그래서 스님의 정갈하게 절제된 삶은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필자는 ‘절제’보다 더 좋은 해결책으로 ‘사랑’을 제시하고 싶다. 외로움으로부터 시작된 중독, 그 근본적인 해결책은 ‘사랑’일 것이다. 이번 주에 읽었던 <사랑이 희망이다>란 책은 어느 목사님이 운영하는 알콜중독치료센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그 가운데 다음과 같은 부분이 있다. “어느 중독자가 술을 이기지 못하여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으로 가는 도중, 음주에 대한 갈망이 그를 압도하였다. 소주 대신 사준 콜라를 벌컥벌컥 마시고는 ‘목사님, 이 맛이 아니에요’ 하며 실망하는 중독자. 앰뷸런스 창밖으로는 드넓은 대청호반이 바다처럼 펼쳐져 있다. ‘목사님, 저 대청호 물을 다 마셔도 내 속의 갈증을 채울 수는 없을 거예요.’” 그곳에 모인 환자들은 주로 가정과 사회로부터 소외와 단절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필는 앰뷸런스에서 중독자가 느낀 갈증을 ‘타는 외로움’, 즉 ‘사랑에 대한 갈증’으로 정의하고 싶다. 책의 저자 윤성모 목사님 역시, 법정 스님께서 중독의 원인을 외로움에서 찾았던 것과 같이, ‘모든 중독은 사랑의 결핍에서 생긴 병’이라고 정의 내리고 있다. 그리고 그 갈증은 버려지고 소외될수록 더욱 깊어지는 갈증이다. 그 갈증의 해법은 바로 ‘사랑’인 것이다. ‘그 청년 바보의사’ 역시 지난 주에 읽었던 <그 청년 바보의사>는 불타오르는 사랑을 가진 어느 젊은 의사의 삶을 그린 책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고(故) 안수현 씨는 진정 참의사로서, 타인을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우다 33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마음과 몸이 병든 사람들을 위해 늘 말벗이 되어주고, 그들의 보호자가 되어주었다. 그의 사랑은 외로운 영혼에는 기쁨을 주고, 죽어가는 영혼에는 생기를 주었다. 그가 떠난 장례식장에는 동료·선후배들뿐 아니라, 병원 청소부, 식당 아줌마, 침대 미는 도우미, 구두닦이 등 조문객들이 물밀듯이 넘쳐났는데, 생전에 그의 사랑을 나누어 받았던 이들로 인해 그의 장례식장은 그 어느 곳보다 더 큰 생기를 띠었다. 그것이 사랑의 힘이다. 사람을 살리는 생기…. 안수현 의사가 주로 사용하던 아이디는 ‘스티그마’이다. 안수현 의사는 예수의 삶을 닮고자 ‘예수의 흔적’이란 의미로 ‘스티그마’라는 아이디를 사용했지만, 본래 스티그마는 ‘낙인’이란 뜻이다. 심리학 혹은 경제학에는 ‘스티그마 효과’와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다. 주변의 부정적인 평가나 선입관에 노출되면 실제로도 부정적인 방식으로 행동하여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 ‘스티그마 효과’이고, ‘피그말리온 효과’는 타인의 기대나 관심에 부응하여 행동하면 실제로도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현상을 일컫는다.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이 완벽한 여신상을 조각하고 나서 그 조각상을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신께 간구하자, 아프로디테 여신이 그의 간절함에 감응하여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었던 데에서 유래됐다. ‘블라인드 사이드’ ‘스티그마’, 즉 ‘낙인’은 처절한 실패를 앞당길 수도 있지만, 깊은 관심과 사랑은 성공과 발전을 견인한다. 안수현 의사가 외로운 이들을 위한 피그말리온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사람이었다면,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에는 낙오자·가난뱅이로 낙인찍힌 사람들의 모습이 등장한다. 바로 부자 백인들이 사는 지역의 아랫동네, 즉 흑인 거주지의 아이들이다. 빛이 비치지 않는 이곳에서 태어난 이들은 거리를 헤매다 언제 총에 맞아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아이들로 낙인찍힌 인생이다. 그들은 외로움 속에서 꿈과 소망 없이 마약과 범죄에 중독되어간다. 그러나 영화의 주인공 마이클 오어는 운 좋게도 어느 부유한 크리스천 가정에 입양되어 관심과 사랑 속에서 미국 최고의 풋볼 선수로 성장해간다. 이 영화에는 ‘크리스천’이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 단어는 자연스레 중의적 의미를 가진다. ‘크리스천’이라는 단어에 ‘사랑’의 의미가 함축되었을 때는 피그말리온 효과와 같이 죽은 인생에 새 삶을 부여하는 멋진 단어가 된다. 그러나 그 단어에 ‘사랑’의 의미가 결여되었을 때는, 단지 공화당이나 부유한 가정이 상징하듯, 때론 보수적인 기득권층을 가리키는 단어가 될 뿐이다. 마이클 오어가 입양된 가정은 전형적인 WASP(White Anglo-Saxon Protestant : 앵글로색슨계 백인 기독교인) 가정으로서, WASP는 미국의 주류 지배계층이다. 그들에게는 소외된 이웃들을 돌볼 책임이 있지만, 그것은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상의 것, 즉 ‘사랑’이어야 한다. 영화의 제목인 ‘블라인드 사이드’는 풋볼에서 쿼터백이 미처 감지하지 못하는 곳, 즉 사각지대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의 취약지대를 의미하기도 한다. 영화는 마이클이 쿼터백을 보호하듯 우리가 서로를 보호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칭 기독교 국가인 미국이 잃어버린 참기독교 정신이며, 우리가 잃어버린 정신이다. 이 영화에서 아쉬웠던 부분은, 오언을 입양한 가족이 한 인생을 바꾸는 주도적 인물들로 그려지는 반면, 주인공 오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책임질 수 없는 지나치게 빈약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이란 나의 기대에 상대방을 맞추는 게 아니라, 신이 부여한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 즉 상대의 가능성과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다. 그 가능성과 아름다움은 타인이 부여하는 것도 아니며, 보잘것없어 보이는 그 어느 누구에게나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은 외로움의 가시를 딛고 내면의 가능성이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오르게끔 한다. 마치 피그말리온 효과처럼…. ‘모겐족의 월드컵’ 역시 지난 주에 감명 깊게 보았던 <모겐족의 월드컵(소명2)>이라는 영화는 태국의 어느 작은 섬에서 아이들에게 축구를 가르치는 한국인 축구 코치의 모습을 담은 다큐 영화이다. 그는 선교사의 이름으로 그곳에 있지만, 교회를 세운 것도, 종교를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가 그곳에서 살아가는 방식은 오직 사랑으로 아이들을 대하는 것, 단지 사랑으로 그 땅 가운데 서 있는 것뿐이다. 그는 아이들의 천진난만함에서 아름다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거기에 집중하였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곳 아이들의 삶을 바꾸어놓게 된다. 천안호의 침몰 원인부터 시작하여, 그 밖의 정치문제·사회문제들의 원인 찾기에 급급한 우리들이다. 그러나 그 모든 문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사랑의 결핍’에 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모두가 떠안고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이다. 내가 바라보아야 할 ‘블라인드 사이드’는 어디일까? ‘블라인드 사이드’에 사랑의 ‘흔적’을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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