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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구 음악 에세이]여자와 결혼 못하는 고통을 음악으로

차이코프스키, 연상녀와 안 만난 채 편지 1200통만 주고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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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2호 박현준⁄ 2011.03.07 13:39:29

이종구 박사 (이종구심장크리닉 원장) 차이코프스키는 모차르트, 베토벤과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사랑받는 위대한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피오트르 차이코프스키는 1840년에 우랄산맥에 있는 지방도시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부친은 광산 기술자로서 큰 광산의 감독관이 되어 부유한 가정을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음악에 대한 특별한 관심이나 재능은 없었다. 차이코프스키의 아버지는 첫 부인이 사망한 후 차이코프스키의 어머니와 재혼했다. 그녀의 가족은 프랑스로부터 이민 온 개신교 신도였다. 그 당시 러시아의 부유층은 대리모를 두었는데 대리모는 아이들의 교육을 책임지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대리모에게 교육을 받았다. 차이코프스키가 네 살이 되던 1844년에 그의 어머니는 스물두 살의 파니 뒤르바흐를 대리모로 고용하여 같은 집에서 살게 하였다. 파니 역시 프랑스계의 스위스 사람이었다. 그리하여 차이코프스키는 순수한 러시아적 가족 분위기보다는 프랑스식 서방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이것이 후일 그의 음악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많은 자녀를 출산하고 키우느라 바빴던 어머니는 차이코프스키가 원하는 만큼 충분한 시간과 사랑을 주지 못했을 것이며 차이코프스키는 대리모가 생기자 그녀 곁을 떠날 줄 몰랐다. 차이코프스키는 영리한 아이였으며 여섯 살 때 이미 러시아어는 물론 프랑스어까지 유창하게 읽고 썼으며 독일어까지 배웠다. 그러나 대리모에 의하면 피오트르는 아주 예민하고 신경질적인 아이였으며, 잘 깨진다는 의미로 ‘도자기 아이’라 불렀다. 피오트르는 피아노와 놀기를 좋아했으며 다섯 살 때 피아노 레슨을 받기 시작했는데 3년 뒤에는 아마추어 출신의 피아노 선생보다 악보를 더 잘 이해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그는 “음악이 내 머리를 가득 채워 떠나지를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대리모에 모든 것을 의지하면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가 여덟 살이 되던 해인 1848년에 그의 아버지가 은퇴하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주하자 대리모 파니와 작별하게 됐고 이 사건은 그에게 크나큰 충격이 되었다. 그가 열 살 때 그의 부모는 다시 시골에 살면서 차이코프스키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법률학교(대학) 준비 학교에 입학시켰으며 그는 기숙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차이코프스키에게 또 다른 시련이 닥쳐왔다. 그가 그토록 사랑하고 의지하던 어머니가 그의 나이 열네 살 때 콜레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그때 그는 마음에 큰 상처를 받았다. 후일 그는 “그때 내게 음악이 없었다면 미쳐버리고 말았을 것이다”라 회상하기도 했다. 차이코프스키는 열아홉 살에 법률학교를 졸업했는데 이미 학생 시절에 동성연애를 경험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가 학생시절에 피아노 레슨을 받고 로시니, 베르디, 모차르트 오페라를 자주 보았지만 음악 공부는 제대로 하지 못했으며 졸업 후 법무부의 하급공무원으로 취직했다. 대리모 파니와 8살 때 헤어지면서 큰 충격. 28살 때 유일하게 사랑한 소프라노 가수는 다른 남자 품에. “그녀가 내 유일한 사랑…” 그러나 차이코프스키는 공무원 생활에 만족하지 못하고 스물한 살에 음악 강의를 듣기 시작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에 공무원직을 사임하고 안톤 루빈스틴이 설립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 입학해 스물다섯 살에 졸업했으며, 스물여섯 살에 졸업 작품 ‘심포니 1번’을 발표했다. 차이코프스키는 러시아 민요를 인용하는 등 자신의 음악이 러시아에 뿌리를 두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러시아 음악을 고수한 러시아 민족 음악 5인방(보로딘, 쿠이, 발라키레프, 무소르그스키, 림스키-코르사코프)은 “차이코프스키 음악은 독일과 프랑스 등 서방 세계의 음악에 가깝다”고 생각하며 어느 정도 거리감을 두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와 그가 무척 따랐던 대리모까지도 사실상 프랑스인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어린 시절의 성품 교육이 그의 음악 세계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1866년부터 피오트르는 니콜라이 루빈시테인이 창립한 모스크바의 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스물여덟이 되던 해인 1867년에는 러시아를 방문 중이던 베르디의 소프라노 가수 데지레아르토와 약혼했으며, 그녀에게 ‘Romance in F minor Piano 작품 5번’을 헌정했다. 그러나 그녀는 갑자기 다른 남자와 결혼했으며 피오트르는 후일 “그녀는 나의 유일한 사랑이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결혼 안 해주면 자살하겠다”는 여자와 결혼하지만 곧 스스로 집 뛰쳐나오며 “나는 여자랑 살면 미친다”는 사실 깨달아 차이코프스키에 대한 사랑을 고백하는 여자도 있었다. 1877년 4월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작곡을 공부한 여자 밀류코바가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보내면서 자신과 결혼하지 않으면 자살하겠다고 협박했다. 차이코프스키는 6월에 밀류코바를 처음으로 만나기 시작해 그 다음 달에 그녀와 결혼했다. 그러나 결혼이 자신을 미친 사람으로 만들 것이라 확신하고 집을 뛰쳐나왔으며 별거에 들어갔다. 아마도 이때 차이코프스키는 결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 같다.

그해 10월 러시아 철도왕의 미망인인 나데츠다 폰 메크 여사가 ‘서로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차이코프스키에 연 6,000루블이라는 거금을 지원해 주기 시작했다. 그 당시 하급 공무원의 연봉이 300~400루블이었으니 엄청난 거금이었다. 그 결과 피오트르는 음악원의 교수직을 사임하고 작곡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서른여덟 살이 된 그는 ‘심포니 4번’을 완성해 폰 메크 여사에게 헌정했으며 오페라 ‘에브게니오네긴’도 완성했다. 폰 메크 여사는 차이코프스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은 전혀 여성답지 않은 여자이며 결혼 무용론자라 털어놓았다. 즉 결혼이란 자식을 낳기 위해서, 그리고 사회적 지위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가족들까지 멀리하면서 사업에 몰두했으며 젊은 시절부터 음악을 사랑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차이코프스키뿐만 아니라 니콜라이 루빈시테인과 프랑스의 드뷔시도 지원했던 관대한 음악의 후원자였다. 이 두 사람은 한 번도 만나지 않았지만 13년간 총 1,200통의 편지를 교환했다. 편지에서 차이코프스키는 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않았던 자신의 내면을 고백했다. 어쩌면 폰 메크에게 차이코프스키는 ‘사랑하는 친구’이자 ‘플라토닉 애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1890년 폰 메크는 1년분의 후원금을 보내면서 자신을 잊지 말라고 당부하는 편지를 보낸다. 이러한 갑작스런 이별에 대해서는 여러 추측이 있지만 폰 메크의 재정적 불안정과 가족의 반대가 중요한 원인으로 보인다. 일설에는 차이코프스키가 동성연애자임을 알게 된 것이 또 하나의 이유라고도 한다. 폰 메크 여사는 심한 폐결핵을 앓았으며 1893년 차이코프스키가 사망한 지 두 달 후에 그녀도 생을 마쳤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손에 마비가 오기 시작해 편지를 쓰기가 어려워졌으며, 이에 따라 제3자에게 편지를 쓰게 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동성연애자들이 성적 관계를 배제하고 연상의 여인을 사랑하는 것은 흔히 볼 수 있는 일이라고 한다. 여하튼 폰 메크 여사의 도움으로 차이코프스키는 학생을 가르치는 의무를 떠나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며 전 유럽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그의 음악은 국경을 넘어 국제적 색체를 띠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주 오가는 편지로 차이코프스키는 정서적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세기 러시아에서 예술을 후원하는 사람은 예술가에 버금가는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즉 한 예술가가 자신의 후원자에게 작품을 헌정하면 그 공의 절반은 후원자에게 돌아갔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음악을 사랑하는 귀족들과 부유층은 예술가를 후원함으로써 대리만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만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 풍부한 자금을 지원해 준 연상녀 폰 메크 덕에 그는 생업걱정 없이 작곡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고… 세계적인 작곡가들은 편안하고 안온한 시절보다는 사랑, 실연, 절망, 죽음과 직면할 때 더 위대한 음악을 만드는 것 같다. 베토벤은 사랑과 실연을 반복하면서 ‘월광 소나타’ 같은 명곡을 작곡했으며 음악가로서 거의 치명적인 청각 장애인이 되면서 그 고뇌를 이기기 위해 ‘피아노 협주곡 5번’이나 ‘심포니 9번’ 같은 대작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말러는 유태인으로서의 고뇌, 사랑하는 부인의 외도, 사랑하는 딸의 죽음, 치명적인 심장병에 대한 공포에 절망하면서 위대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차이코프스키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그도 동성애자라는 성적 소수자가 용납될 수 없는 세상에 태어나 갈등과 고난을 겪으면서 자신의 음악을 더 감동스럽게 만든 것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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