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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이야기가 있는 길 19] 삼천사-진관사 上

“밥은 먹었냐”며 손잡아 끌던 그 산지기는…
서울 서쪽의 두 큰절 삼천사-진관사 둘러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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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13호 박현준⁄ 2011.03.14 14:17:22

이한성 동국대 교수 70년대에 경복궁에 나들이 가면 여러 개의 석물(石物)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안정감 있고 기품 있는 5층 석탑이 유난히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새롭다. 미륵사탑의 기품과 정림사탑의 안정감을 동시에 가진 듯한,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듬직한 기품의 느낌이 드는 탑이었다. 그 탑의 이름이 ‘홍제동오층석탑’이다. 지금은 그 탑이 용산 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는데 이름은 역시나 ‘홍제동오층석탑’이다. 필자가 학교를 다니던 70년대에는 홍제동에 화장터가 있었다. 그래서 때로는 비오는 늦은 밤 가끔 장난 전화질을 하곤 했던 기억이 새롭다. 아무 번호나 누른 후 상대가 전화를 받아 어디시냐고 물으면 ‘홍제동 화장터다, 흐흐흐’ 이렇게 겁주고 전화를 후닥닥 끊어버리는 장난을 친 날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유치하고 순진한 짓이었다. 오늘 이 탑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 탑이 북한산 서쪽 지역, 곧 지금의 통일로와 가까운 곳에 있던 고려적 절 사현사(沙峴寺)의 탑이었기 때문이다. (개인 소견으로는 이제라도 ‘사현사오층석탑’으로 그 출처를 알 수 있게 바꿔 주었으면 좋겠다) 북한산에 있는(던) 옛 절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성 밖 서쪽에 있음을 알게 된다. 승가사, 진관사, 삼천사, 문수사와 지금은 없어진 사현사, 신혈사, 향림사, 장의사…. 근래에 커진 도선사는 논의 대상이 아니니 그렇고, 화계사 정도가 타 지역에 있는 사찰이다. 왜 이랬을까? 개성을 비딱하며 째려보는 데다 왕의 기운까지 서렸다는 서울 땅을 제압하기 위해 고려인들은 서울 서쪽에 집중적으로 절을 지었으니… 가만 생각해 보면 고려의 수도였던 송도(개성)를 기준으로 보면 서울의 삼각산은 그렇게 마음에 드는 산은 아니었다. 풍수 하는 분들의 말을 들어 보면 삼각산의 세 봉우리는 우뚝 서서 송도를 삐딱하게 넘겨다보는 규봉(窺峰)이다. 사람들은 이런 규봉을 싫어한다. 더구나 이 곳 한양에는 이(李) 씨의 왕기(王氣)가 서려 있다는 도참사상까지 있었다. 비딱하게 송도를 바라보는 것도 싫은데 그걸 지나 왕기까지 있다지 않는가. 그래서 고려 적에는 삼각산 넘어 벌리(지금의 수유리 옆 번동)에 오얏(李)을 심어 자랄 만하면 잘라냈다는 구전이 전해지고 있다. 벌리(伐李)는 오얏(李氏)을 베어낸다는 의미다.

이렇게 마음에 안 드는 삼각산 안쪽보다는 송도와 남경(서울)을 직선으로 잇는 곳에 집중적으로 절을 세웠으니, 고려의 기준으로 보면 수도 송도와 제2의 도시 남경(서울)을 잇는 길을 따라서다. 조선 입장에서 보면 ‘국도 1번’이랄 의주대로변이고, 지금 기준으로 보면 통일로변이 된다. 불교국가였던 고려에서는 접근성도 좋고, 풍수적 거리낌과도 먼 이 지역에 절을 세웠을 것이다. 그러다 보니 우리 시대의 관점에서 보면 북한산 좋은 곳 다 놔두고 서쪽 변방에 유수한 절들이 모여 있게 된 것이리라. 오늘은 그 절 중 현존하는 절 두 개(삼천사, 진관사)를 이어 가 보려 한다.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에서 내려 3번 출구로 나온다. 역 주변에는 길에다 푸성귀를 놓고 장사하시는 할머니들이 많다. 언제든 그 철에 나는 채소들인데 대형마트보다 싼 값으로 무더기를 지어 놓았다. 예전에는 당신네 집 텃밭에서 나오는 푸성귀를 내어다 팔고 손주들 과자 값이라도 벌어 보실 요량으로 나온 분들이 많았는데 요즈음은 생계 수단으로 나오는 분들이 많은 것 같다. 다 늦은 저녁에 북한산에서 이 길로 내려오는 날이면 무조건 두세 무더기는 산다. 번번이 다 먹지 못하고 아까운 야채가 시들어버리지만, 예전 우리 어머니들도 콩나물 덤 더 받으려고 지악스럽다가도 애엄마나 할머니 물건은 아무 말 없이 넉넉히 사 주지 않으셨던가? 범서쇼핑을 끼고 우회전하여 50여m 가면 버스정류장이다. 7211번 버스를 타고 진관사 입구(하나고등학교 건너편)에서 내린다. 2~300m 내려가면 삼천사 안내판이 서 있다. 달리 샛길도 없어 이 길로 쭉 오르면 삼천사(三千寺, 옛 자료에는 三川寺)다. 입구에서 약 5분 오르면 좌측으로 돌기둥이 서 있는데 ‘삼각산 적멸보궁 삼천사(三角山 寂滅寶宮 三千寺)’라고 쓰여 있다. 적멸보궁이란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眞身舍利)를 모신 곳이란 뜻이다. 고려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의 통일로는 서울-개성 연결하는 ‘1번 국도’나 마찬가지. 북한산 좋은 땅 다 놔두고 이곳에 큰절 지어. 이제 시멘트관 위를 포장한 계곡을 건너 언덕바지 길을 오르면 발해석등을 본뜬 것 같은 석등이 길손을 맞는다. 앞 쪽으로 지장보살상과 5층석탑이 있는데 모두 근래에 조성한 석물들이다. 5층석탑은 네 마리 사자가 탑신을 받들고 있기는 구례화엄사의 모양새인데 어찌나 어설픈지…. 일주문을 지나 삼천사 경내로 들어간다. 삼천사에 대한 신증동국여지승람(1530년)과 북한지(1745년)의 기록을 보자.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삼천사를 ‘삼각산에 있다. 고려 이영간(李靈幹)이 지은 비명이 있다(在三角山 有高麗李靈幹撰碑銘)’라고 간단히 적고 있다. 성능의 북한지(北漢誌)에는 ‘소남문 밖에 있었는데 지금은 폐사 되었다. 고려 이영간이 지은 비가 있다. 원효화상과 진관조사가 이 절(삼천사)과 진관사를 세웠다. 그 유지가 완연하다. 모두 각자 큰 돌 통이 하나씩 있다. 이는 그 당시 목욕 그릇이었다 한다.(在小南門外 今廢 有高麗李靈幹所撰碑 元曉和尙與眞寬祖師建此寺及眞寬寺 其遺址宛然 皆各有大石槽一 是其時沐浴之器云)’라는 기록이 있다. 두 책 사이의 기간인 185년 사이에 삼천사가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유학이 국시인 시대이다 보니 가람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이다. 문득 작년 겨울, 눈이 발목까지 쌓인 날 이곳에 왔던 기억이 새롭다. 늦은 점심도 지난 시간에 군고구마 장수 벙거지, 허름한 방한복, 낡은 배낭 차림으로 털레털레 눈에 꺾인 설해목(雪害木)을 보려고 왔더니, 북한산 관리사무소의 나이 드신 관리원께서 내 몰골이 그랬던지 굳이 손을 잡고 삼천사 공양간으로 끌고 가는 것이었다. 당신도 늦은 점심이면서 “이렇게 혼자 다니지 말고 여자친구라도 함께 다니고 밥은 꼭 먹고 다니라”는 간곡한 말씀과 함께 따듯한 점심을 먹게 해 주셨다. 눈 쌓인 빈 산에 홈리스 같은 모습으로 나타난 나의 모습이 당신에게는 참 안쓰러웠던 것이리라. 오늘도 이곳에 오니 그 따듯한 마음이 다시 느껴진다. 돌아보면 이 지역은 1980년대까지만 해도 군사보호지역으로 출입이 통제됐다. 그래서 이 지역에는 지금도 수영장 등 훈련시설과 휴양시설들이 남아 있다. 경내에서 길손을 맞는 것은 대웅전 앞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과 세존진신사리비(世尊眞身舍利碑)다. 불가에서는 불승(佛僧) 등 수행자(修行者)들이 입적(入寂: 적멸에 든다는 말인데 곧 죽음을 의미함)하면 다비(화장)를 하는데 다비(茶毘) 후 남은 뼈들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사리(舍利: 수행자들의 시신이 타고 나서 재가 된 뼈에서 나오는 구슬 모양의 고형물, 수양이 깊을수록 많이 나온다는 속설이 있음)가 남는다.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은 다비(화장) 후 많은 사리(진신사리)가 나왔는데 이 사리들을 탑에 봉안했다. 이 곳 삼천사에 봉안된 석가여래 진신사리는 1988년 주지 성화화상이 미얀마 마하시다탄 사원에서 봉안해온 것으로 사리 3과(顆)를 모셨다 한다. 사리 이야기가 나오니 문득 친구들이 술자리에서 떠들던 조크가 떠오른다. 어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화장을 했는데 그 유골을 수습하는 과정에 며느리가 있었다. 보니 아버님의 탄화되어 하얗게 탄 뼈 속에 사리가 7개나 남아 있었다. ‘우리 시아버님은 정말로 수도승처럼 사셨구나.’ 감동에 사로잡힌 며느리는 시어머니께 말씀 올렸다. ‘어머님은 정말 외롭게 사셨군요. 아버님이 얼마나 수도승처럼 사셨으면 사리가 7개나 나왔겠어요.’ 시어머니가 시큰둥 말했다. ‘얘야 그것은 다마(구슬)란다.’

일반적으로 불교신자들은 이 진신사리에 대한 믿음이 강해 우리나라에선 전통적으로 이 진신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을 중요한 기도처로 생각한다. 지금도 정성으로 기도할 일이 있으면 적멸보궁을 찾는다. 오대산 상원사, 사자산 법흥사, 태백산 정암사, 영취산 통도사, 설악산 봉정암은 이 나라 5대 적멸보궁으로서 많은 이들이 정성을 드리는 곳이다. 시아버지 화장한 자리에 사리 많이 나와 며느리가 “아버님은 참 스님처럼 깨끗하게 사셨군요“라고 했더니 시어머니 왈… 사리탑 앞 쪽으로는 보물 657호로 지정된 마애불(磨崖佛)이 자연 암반에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불을 모신 것인데 서울 근교에 있는 마애불 중 가장 균형잡힌 마애불이다. 본 ‘이야기가 있는 길’에서 만나듯, 서울에는 많은 마애불이 봉안되어 있으나 고려시대 마애불은 이 곳 삼천사마애불, 승가사마애불, 옥천암마애불, 보타사마애불 단 네 곳밖에 없다. 이 중 삼천사마애불이 가장 연장자(年長者)시다. 학자들은 삼천사마애불을 고려 초, 고려 중기로 연대 추정하고 있다. 반듯하게 연화대 위에 서서 오른손은 내리고 왼손은 복부에 댄 모습으로 서 있는 입상인데 균형이 잘 잡혀 있다. 성도(成道)의 뜻이 담겨 있다고 한다. 머리는 가지런한 소발(素髮)에 윤곽이 뚜렷하다. 여래상 양옆으로 파낸 흔적을 보면 보호각 건물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야외에 있으면서도 보호각이 있어 마모를 피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의 삼천사는 경내가 몹시 비좁다. 간신히 계곡에 붙어 절이 자리잡고 있는데 그런 까닭에 등산로는 협소하고 시멘트 포장이 돼 있어 어느 마을 골목길 같다. 고려 때 삼천사 자리가 아니라 원래는 마애불을 모신, 삼천사에 속하는 작은 암자 터였으리라. 마애불 옆으로는 산령각(山靈閣)이 2층 건물로 서 있다. 산령이란 산신(山神)을 달리 부르는 말이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금빛 찬란한 산신 부조(浮彫)가 모셔져 있다. 시멘트 건물에 금빛 산신은 눈에 익숙치 않다. 산령각 옆으로는 붉은 벽돌로 지은 얼핏 중국식 건물 느낌의 전각이 있다. 천태각(天台閣)이라 적혀 있다. 천태산에서 홀로 수행하여 깨우친 독성(獨聖) 나반존자(那般尊者)를 모신 독성각인데 특이하게 천태각이라 이름 붙였다. 이 곳 삼천사는 고려 마애불은 제외하면 모두 근래에 불사한 탑과 전각들이어서 친근한 맛이 떨어진다. 절 경내를 나와 다리를 건넌다. 비로소 삼각산 자연 품으로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길은 부왕동암문(扶旺洞暗門; 일명 소남문)으로 이어지는 계곡길인데 사계절 계절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길이다. 이 길을 타고 올라 고려 선조들은 삼천사(三千寺, 三川寺)라는 대찰을 지었다. 삼천사에서 약 1km 정도 오르면 좌측으로 희미한 옛 층계가 보이고 '등산로 아님(No trail)' 표지판이 나타난다. 사실 오늘 답사의 포인트는 마애불, 이곳 옛 삼천사 터, 다시 이곳으로부터 500 여m 위쪽의 제2 삼천사 터, 이렇게 3곳을 둘러보는 것이다. 서울 근교에 마애불 많지만 고려시대 것은 전국에 네 곳밖에 없고, 그 중 이곳 삼천사, 진관사 것이 가장 균형잡혀 예전에 이 길은 증취봉(甑炊峰)으로 오르는 등산로였다. 지금은 이 길이 폐쇄되어 부왕동암문으로 가서 성벽 길을 따라 가야 한다. 일단 삼천사 옛터를 보려고 낡은 돌계단을 오른다. 시간이 만들어 놓은 퇴락(頹落)한 계단과 흘러내린 장대석, 잡초만 훌쩍 커 버린 옛 절터는 가슴 속에 싸~한 한 줄기 바람을 일으킨다.

뒤로는 증취봉이 불뚝 솟아 있는데 이곳에 자리잡고 있었을 1000년 너머의 향취가 전해져 온다. 이제는 철저히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다만 증취봉과 빈 절터의 환상적인 조화다. 얼마나 마음 깊이가 있으면 그 옛날 이런 자리를 찾을 수 있었을까? 절로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필자는 연전 이 절터로 해서 옛 기억을 더듬어 증취봉에 오른 적이 있다. 예전 길 자취가 희미하게 있었는데 놀란 일은 사람이 안 다니는 이 길에 집나온 개들이 무리를 이루고 사는 것이었다. 반은 들개가 다 된 놈들이 떼로 짖어대는데 모골이 송연했다. 저 놈들이나 나나 상대를 알지 못하니 피차 겁만 주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집 나온 고양이, 집 나온 개들…. 모두 위협이 되니 대책을 세워야 할 것 같다. 절터에서 내려 와 다시 500여m를 오른다. 좌로 또 다시 옛 절터로 오르는 길이 있다. 지나온 절터보다는 작고 아담하나 이곳에 이영간이 지었다는 대지국사탑비(大智國師塔碑)가 있었다. 비신(碑身)은 없어지고 받침대인 귀부(龜趺)와 부도만이 수백 년을 뒹굴고 있었는데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아래 위 삼천사터를 발굴하고 석물들을 수습했다. 이 결과를 2009년 초에 ‘삼천사지 발굴유물 특별전’으로 세상에 알렸다. 대지국사 법경(法鏡)은 고려 법상종(法相宗)의 큰 선사로서 현종 때 국사, 왕사(王師)를 지냈으며, 개성 현화사와 이 곳 삼천사 주지를 역임한 당대의 고승이었다. 그런데 이 분의 행적을 기록한 비의 몸체가 없어진 것이다. 어찌 되었을까? 발굴 결과는 참담했다. 비신(碑身)은 누군가에 의해 철저히 부서져 수백 쪼가리가 되었던 것이다. 누가 그랬을까? 일부러 이 산골까지 와서 누가 돌덩이를 부셨단 말인가? 물증은 없어도 심증은 있다. 조선이 유교를 숭상하면서 유생들은 철저히 불교를 말살했다. 절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종처럼 부리고, 부처의 목을 자르고…. 석가를 불씨(佛氏)라 부르며 그 가르침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갔다. 탈레반이 종교적 이유로 인류의 소중한 유산인 바미얀(Bamyan) 골짜기의 불상을 파괴한 일과 비슷한 일이 우리 옛 지성 사이에서도 일어났던 것이다. 어느 시대나 남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는 이들은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어리석음 아니겠는가? 남의 자리를 인정하지 않으면 어찌 내 자리가 고이 지켜지겠는가? 옛 절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현재진행형이다. (다음호에 계속) 교통편 1) 지하철 3호선 연신내역 3번 출구 ~ 범서쇼핑 끼고 우회전. 버스정류장에서 환승 버스 7211 타고 진관사 입구(하나고등학교)에서 하차. 2) 지하철 3호선 구파발역 1번 출구 ~ 50m 전방 환승 버스 704번 ~ 삼천리골 입구 하차(연신내 버스보다 걷는 거리가 멀다.) 걷기 코스 버스정류장 ~ 삼천사 계곡 방향 ~ 삼천사 계곡 ~ 삼천사 ~ 옛 삼천사 터1 ~ 옛 삼천사터 2 ~ 다시 내려와 ~ 국가시설 수영장 ~ 고개 넘어 ~ 진관사 ~ 화의군 이영 묘역 ~ 하나고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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