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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경제의 심장, 재벌을 말하다] 삼성그룹 편-1화

무역업 성공을 토대로 삼성의 기둥을 쌓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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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79호 박현준⁄ 2012.06.18 13:43:34

1945년 광복 이후 1950년대까지 한국 경제는 일본인들이 남겨둔 귀속재산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승국들의 경제원조에 의지해 빠른 성장을 지속했다. 그 와중에 당시 GNP의 10~20%에 달하던 소비재 위주의 경제원조로 말미암아 국내 소비재산업이 급신장함으로써 생산재와 소비재 산업 간의 불균형을 초래했다. 한국경제의 대외의존성 심화와 밀, 면화, 대마 등 경쟁력 없는 국내 농산물의 구축, 국민생활문화의 서구화도 병행되었다. 관치금융도 이때부터 비롯되었다. 더욱 주목되는 것은 이상과 같은 환경을 배경으로 ‘재벌’이라 불리는 대규모 민간 기업집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 재벌 형성의 주요 원천으로는 ①수입쿼터제 및 수입허가물량의 비경쟁적 배정 ②귀속기업들의 민간불하 ③원조자금 및 물자의 선별적 배분 ④특혜 저리융자 및 재정지원 ⑤군납과 관급건설공사 등 정부납품사업에 대한 선별적 혜택 제공 등이 있었는데, 이에 편승한 기업들은 단기간에 재벌로 부상할 수 있었다. 살인적인 전쟁 인플레는 부채경영에 또 다른 특혜로 작용했다. 정부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엄청난 규모의 귀속기업들을 일괄 소유했음은 물론 흥업, 신탁, 조흥은행 등 모든 시중은행들의 최대주주인 데다, 대부분의 원조물자까지 확보한 최대자산가였다. 3년여에 걸친 전쟁으로 전국의 산하가 폐허로 변한 상황에서 각종 정부발주 건설공사도 매력이 컸다. 극심한 물자부족 탓에 수입무역도 대박 비즈니스였으나 정부는 달러화 등 외화 배정권마저 독점했던 것이다. 사업에 필요한 은행대출을 비롯한 주요 물적 자원들이 정부에 집중된 구조여서 기업가들은 오로지 정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광복 후 특이한 경제구조가 고질적인 정경유착을 부채질했던 것이다. 정경유착은 여명기의 한국 경제 발전을 위한 필요악이었다. 이병철, 무역업에 뛰어 들다 195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 특징인 재벌자본주의의 출발점이다. 최대 재벌인 삼성그룹도 이 무렵에 도약기를 맞이한다. 삼성그룹 창업자 이병철은 1910년 2월 12일 경남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에서 1000석 지기 부농인 이찬우의 차남으로 출생하였다. 그는 진주의 지수보통학교를 거쳐 서울 중동중학 속성과를 수료하였다. 1930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전문부(오늘날의 전문대학 과정) 정경과에 입학하였으나 각기병 때문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했다.

학업을 청산하고 귀국한 이병철은 부친으로부터 5만 원(쌀 300석)을 받아 1936년에 경남 마산에서 동업자 2명과 함께 협동정미소를 경영하면서 사업과 인연을 맺었다. 당시는 일본에 대한 쌀 수출의 절정기로 마산은 군산, 목포 등과 함께 쌀의 일본 수출 전진기지였다. 도정물량이 풍부했던 탓에 협동정미소 경영은 성공적이었다. 이병철은 정미소 경영을 통해 얻은 이익금으로 부동산 투기를 시작, 경남 김해 지역의 논, 밭 등을 싼 값으로 매입하였다가 비싸게 되파는 방법으로 거금을 모았다. 특히 저리의 은행자금을 동원해서 부동산투기에 열중한 나머지 한때는 경남 일대의 엄청난 토지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후 은행대출이 여의치 못해 자금난에 직면하면서 부동산 투기를 청산하였다. 1938년에 그는 대구 서문시장 부근인 인교동 61-1에 660㎡(200평)짜리 사무실을 마련하고 자본금 3만 원(圓)의 삼성상회를 설립하였다. 만주, 북경 등지에 청과물과 오징어 등 건어물을 수출했을 뿐만 아니라 상회 내에 제면기를 설치하여 국수도 생산, 판매하였다. 이병철은 일본 와세다대학 출신인 이순근을 지배인으로 영입해 사업 일체를 맡기고 자신은 주로 은행융자와 거액의 상담을 담당하였는데 직원 수가 40여 명에 달할 정도로 사업이 잘 되었다. 1943년에는 삼성상회의 흑자경영을 통해 발생한 이익금으로 조선양조장을 인수했다. 조선양조는 소주, 탁주, 청주(월계관) 등 연간 생산능력 7000석으로 대구지방 최대의 양조장이었다. 그는 조선양조의 경영에 주력하여 인수 1년 만에 생산능력을 1만석으로 올렸다. 이병철 최초의 사업다각화였다. 삼성상회와 조선양조의 흑자에 힘입은 이병철은 사업지를 대구에서 서울로 옮겨 1948년 11월 종로2가 부근에 삼성물산공사를 설립, 동향인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자)를 전무로 영입하여 무역업에 주력하였다. 무역 전문가들이 태부족이어서 절대 다수 무역업체들이 인재난으로 어려움을 겪곤 했는데, 당시 삼성 직원들 간에 ‘무역백과사전’으로 불렸던 조홍제의 영입은 대단히 큰 성과였다. 삼성물산은 홍콩, 싱가포르 등 동남아에 오징어, 한천 등을 수출하고 면사를 수입해 왔는데 수입품은 국내에서 수입가액의 약 10배 정도로 거래되어 사업은 점차 활기를 띄었다.

동남아 무역을 통해 자신을 얻은 삼성물산은 이후 철판 등 시설재와 재봉틀, 실, 바늘에 이르기까지 수백 종의 물품을 수입해서 대박을 터뜨리는 등 사세는 날로 확장되었다. 그러던 중 이병철에게 최대의 시련이 닥쳤다. 승승장구하던 사업을 1950년 한국전쟁의 발발에 따라 접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서울 등 수도권에서 사업을 영위했던 대부분의 경영인들처럼 이병철도 북한군의 느닷없는 남침에 거의 적수공권으로 황망히 서울을 떠나야했다. 전쟁 폐허 속에서 무역으로 위기 극복 이병철은 1950년 12월 15일 부산에서 ‘삼성물산주식회사’란 간판을 걸고 사업을 재개했다. 전쟁이란 특수한 환경이 초래한 물자부족 문제를 손쉽게 해결해줄 수 있는 것은 무역업이었다. 관건은 수입물품 대금 결제용 달러화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무역업자들에 한해 정부가 제공하는 달러화는 조족지혈이었다. 차제에 무역업자들은 암달러상들로부터 달러화를 확보하는 한편, 외화벌이가 될 만한 것은 전부 수출했다. 이 무렵엔 정부 차원의 밀수입 단속 또한 매우 느슨해 밀수가 기승을 부렸는데, 한국에서 일본에 밀수출한 고철 더미에서 대포, 탱크 등 멀쩡한 군수품들까지 발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은 국내에서 고철 등을 수집해 일본에 수출하고 대신 홍콩으로부터 설탕, 비료를 수입하며 재기의 발판을 다져나갔다. 수입한 설탕은 부산 국제시장에서 도매상을 하던 이양구(동양그룹 창업자)에게 넘겼다. 이북 출신의 이양구는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월남, 서울 남대문시장 부근에서 밀가루, 설탕 등 식품유통에 뛰어들어 굴지의 상인으로 성장했는데 당시 이양구는 삼성에서 수입한 식품의 국내 시판을 독점하다시피 했던 것이다. 더구나 설탕에 대한 수요 점증으로 시판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다익선이어서 보다 많은 물량을 여하히 수입해오느냐가 최대의 관건이었다.

삼성은 무역업을 통해 획득한 이익금과 정부자금을 융통해 수입물량의 확대 내지는 수입품목 다변화에 올인했다. 1950년 6월 24일 금융통화위원회는 수입품의 선적서류를 담보로 수입자금을 연리 5.4~5.1%로 융통해주었다. 민생안정 차원에서 생산재 수입업자들에게 혜택을 주기 위해 마련되었는데 특히 이 자금은 이자율이 매우 낮아 자금을 융통받는 것 자체가 특혜였다. 삼성의 외화대부 한도액도 종래 3만 달러에서 점차 10만 달러로 확대되었다. 삼성은 소비재 수입에 치중해 국내 무역업계의 기린아로 급성장했던 것이다. 제일제당, 삼성 주력 기업으로 등장 이 무렵 이병철은 새로운 사업구상에 골몰했는데 동기는 광복 이후 극심한 물자부족과 막대한 원조물자 때문이었다. 정부는 원조물자를 민생안정과 전쟁재해 복구에 우선 배정했는데 이병철은 이 점에 주목했다. 설탕의 원료인 원당이 원조물자로 국내에 대량 공급되고 있던 점에 착안한 것이다. 더구나 설탕이란 원당을 적당히 가공하면 생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기술적으로도 큰 어려움이 없었다. 궁리 끝에 이병철은 제당업에 진출하기로 했다. 당시 설탕은 대중적인 소비에 힘입어 수요는 날로 증가하였으나 국내 생산은 전무하였다. 공장 설립에 필요한 외화 18만 달러를 정부협조로 특별대부 받고 2000만 환은 상공은행으로부터 대출받아 사업자금을 확보했다. 이 자금으로 부산 전포동의 고무공장 부지 3300㎡(1000평)을 확보하고 제당 설비 일체는 일본에 발주, 1953년 6월 자본금 2000만 환의 제일제당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연건평 1040㎡(315평)의 제당공장은 하루 25톤의 설탕을 생산하도록 설계되었는데 그 해 11월부터 국내 최초로 국산 설탕을 생산했다. 국내 최초의 설탕공장은 이렇게 탄생되었는데 제일제당의 설립은 수입대체 공업화의 가능성을 확인해준 쾌거이기도 했다. 이 무렵 수입산 설탕가격이 근당 300환인 반면 제일제당산은 100환이었다. 비록 품질 면에서 외제에 못 미친다 해도 가격이 매우 저렴한 데다 수요가 격증하는 추세여서 제일제당은 생산 개시 6개월 만에 설탕 공급시설을 확대했다. 제일제당은 국내 설탕 소비량의 33.3%를 공급할 정도로 급성장,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시현했으며 1955년에는 자본금을 20억 환으로 증가하는 등 삼성의 주력 기업으로 부상했다. 제일제당이 단기간에 성공하자 이에 자극받은 다수 기업들이 제당업에 경쟁적으로 진출하였다. 1954년 8월에는 동양제당과 한국제당이, 1955년에는 삼양사가, 1956년에는 금성제당, 해태제과, 대동제당이 잇따라 설립되었다. 그 결과 국내 설탕 시장은 1955년부터 공급과잉 상태에 직면했다. 제당업체들 간에 덤핑 등 치열한 이전투구 끝인 1958년에는 제일제당, 삼양사, 대한제당(대동제당의 후신) 등이 국내 설탕 시장을 분할지배하게 되었다. 한편 제일제당은 식품 중심의 다변화에 착수하여 1956년 4월에는 동성물산(주) 소유인 포항 구룡포의 통조림공장을 인수, 통조림사업(팽귄표)에 새로 진출하였다. 또한 1957년 10월에는 제분공장을 건설하고 제분업도 겸영해 호황을 누렸다. 1950년대 중반에는 제당, 제분, 면방직 등의 소위 ‘삼백’ 산업이 리딩 섹터 역할을 담당했는데 이로 말미암아 ‘삼백 경기’가 도래했다. 삼성은 이중 제당과 제분에 뛰어들어 그룹의 기반을 확보했던 것이다. 삼성그룹 역사상 최초의 상업자본의 산업자본화였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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