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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구의 한국 재벌사 _ SK그룹 편 2화]80년 유공 민영화 때 “나홀로 대박”

60~70년대엔 정부 지원에 힘입은 사업다각화로 재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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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292호 박현준⁄ 2012.09.17 11:54:58

선경이 재벌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1960년대 군사정부 출현과 함께 개시된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하면서부터였다. 선경은 1962년 4월에 ‘닭표’ 안감 10만 마(1만1300달러 상당)를 홍콩에 처녀 수출했다. 이후 선경은 해외수출에 주력하기 위해 같은 해 8월 1일에 자본금 1000만 원의 선경산업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최종건의 아우 최종현이 경영에 참여한 것이 결정적이었다. 최종현은 수원농고와 서울대 농대를 거쳐 미국에 유학하여 시카고대학에서 경제학석사를 받고 귀국, 1962년 11월에 선경직물 부사장에 취임했다. 이후부터 선경은 형제가 공동으로 경영하였는데 최종현은 무역 업무를 전담했다. 수출드라이브 정책에 편승하면서 재벌화 정부는 국제수지 개선을 목적으로 1963년 1월 5일부터 제품의 수출을 전제로 원료수입을 허가하는 내용의 수출입 링크제를 실시했다. 수출촉진을 통해 균형무역을 달성하고 수출산업을 육성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해 3월 최종현이 홍콩에 출장, 레이온능직 300만 마(42만6000달러) 수출 건을 성사시켰다. 선경이 처녀 수출한 레이온 능직에 대한 홍콩 바이어들의 평판이 좋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홍콩 바이어들이 일본 메이커들의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수입선 다변화를 고려하고 있었던 점도 계약에 영향을 미쳤다.

수출대금 42만6000달러 중 인견사 1500고리를 확보하기 위해 15만 달러를 확보하고 나머지 27만6000달러로 나일론 원사의 구상무역 허가를 신청하였다. 구상무역이란 일명 바터무역으로 국제간의 물물교환무역을 의미한다. 당시 나일론직물은 인기절정이었으나 원사수입용 달러가 대폭 감소되어 1963년의 국내 나일론 생산실적은 전년도 350만 마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여 나일론 생산업체들 간에 나일론원사 수입달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했다. 이에 최종현이 수완을 발휘하여 원사 수입불 9만 달러를 확보함으로서 선경은 일거에 8000여만 원을 벌어들였다. 선경이 재벌로 부상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65년부터 화섬산업에의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였다. 당초 선경은 일본 데이진(帝人)과 합작해서 폴리에스텔 공장을 건설할 계획이었으나 데이진이 거절함에 따라 대신 아세테이트원사를 제조하기로 하였다. 당시 아세테이트원사 제조업은 국제적으로 사양산업화돼 국내 기업들도 진출을 꺼려하는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국내적으로는 아세테이트에 대한 수요가 많았으므로 차제에 선경이 진출하면 독점화가 가능해 사업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때문이었다. 선경에서는 아세테이트원사 공장 건설을 위해 일본 이또주(伊藤忠商事)로부터 550만 달러의 차관을 확보하고 1968년 3월 25일 아세테이트 공장을, 같은 해 6월 10일에는 폴리에스터 공장의 기공식을 거행하였다. 폴리에스터 공장은 일본 데이진 측의 협조로 건설되었는데 공장건설자금은 정부 보유불 694만 달러를 확보하여 조달하였다. 당시 정부는 폴리에스터원사를 전량 수출한다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하였다. 1966년 6월에 자본금 1억 원의 선경화섬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수원 정자동 600에 일본 데이진과 50:50 합작으로 건설한 아세테이트원사 공장(일산 5.5톤, 1968년 준공)의 본사로 설립된 것이다. 1969년 7월에는 건설 중인 폴리에스텔 공장을 모체로 선경합섬주식회사를 설립하였다. 일산(日産) 7톤으로 국내 생산능력의 26%를 점하여 국내 최대 규모였다. 선경은 국내 최초로 폴리에스텔원사와 아세테이트원사를 동시에 생산하게 되어 국내원사 메이커의 일인자로 부상했다. 선경합섬에 대한 정부의 정책변화도 선경의 재벌화에 일조했다. 당초 정부는 폴리에스텔원사의 전량 수출을 조건으로 선경에 폴리에스텔원사 생산공장 건설을 허가했으나 원사생산이 개시되던 1969년에 선경합섬이 생산하는 폴리에스텔원사 전량을 국내에 시판하도록 정책을 변경했던 것이다. 국내 폴리에스텔원사 수요량이 급증한 결과 1968년의 원사수입량은 1967년 대비 114% 증가한 2928톤에 이르렀을 뿐만 아니라 1969년에는 수요량이 전년대비 92%가 증가할 예정이어서 국내 수요도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선경의 폴리에스텔원사인 ‘스카이론’은 주름이 잘 지지 않아 세탁 후 다림질과 잔손질이 불필요해 국내 소비자들 간에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화섬산업에의 진출이 지방의 중소기업이었던 선경으로 하여금 굴지의 재벌반열에 등극케 했던 천금의 기회가 되었던 것이다.

당시까지 선경은 섬유 중심의 수직다각화 위주였을 뿐만 아니라 다각화속도도 느렸다. 선경이 오늘날과 같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한 것은 1973년 창업주 최종건의 사망을 전후한 시기부터였다. 국제적으로 사양산업이던 아세테이트 원사 사업에 ‘전량 수출’ 조건으로 진입 허가받았지만 정부가 ‘국내 판매 허용’ 하면서 국내 1인자로 부상 1973년에는 최종건의 사망과 함께 최종현이 선경그룹 회장에 취임하였다. 최종현은 오일쇼크의 여파로 초래된 경영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력 계열사들에 대한 증자를 단행하여 재무구조를 개선하였다. 또한 1973년에는 선경개발(관광)과 서해개발(조림), 스카이메리트(봉제), 선경유화(DMT공장), 선경석유(정유공장) 등을 설립하고 극동창고를 인수하는 한편, 영남방직의 경영에 참여했다. 수출에도 주력하여 1976년에는 (주)선경(선경직물의 후신)이 종합무역상사에 지정되었다. 당시 정부는 종합무역상사 지정요건으로 (1) 수출실적 1억 달러 이상 (2) 15개국에 100만 달러 이상 수출 (3) 100만 달러 이상 수출품목 15개 이상인 업체로 제한했다. 또한 정부는 종합무역상사를 육성하기 위해 1975년 12월 3일에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중소기업의 계열화를 적극 지원하였다. 선경도 삼성, 현대, LG, 금호그룹처럼 종합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평적 다각화에 주력했다. 1976년 1월에는 경상북도 경산에서 볼트, 너트, 톱니 등을 생산하는 자본금 10억 원의 신생공업사를 인수한 것을 필두로 6월에는 서울 남대문로 5가 5-3의 동화빌딩(대지 230평, 지하 3층, 지상 9층)을 16억810만 원에 구입, 본사사옥으로 전환했다. 같은 해 9월에는 자본금 3억 원의 선경기계를 선경산업의 자회사로 설립했으며 10월에는 서울 광진동에 지하 4층, 지상 18층(연건평 1만5900평)의 특급호텔인 쉐라톤워커힐(540객실)을 개관해서 관광업에도 진출했다. 이때 워커힐호텔은 국영기업에서 민영화되면서 거듭난 것이다.

같은 해 11월에는 자본금 1억 원의 선경금속과 선경매그내틱을 각각 설립했는데 오디오 테이프 제조업체인 선경매그내틱은 당초 자본금 2억5000만 원의 수원전자로 출범했었다. 또한 같은 달 대구시 북구 노원동에 소재한 자본금 5억6000만 원의 신원산업유한회사도 인수했다. 신원산업은 1969년에 설립된 자전거 제조업체였는데 선경이 인수, 1977년 3월에 선경스마트로 상호를 변경했다. 1977년 8월에는 토건업체인 협우산업을 4억6000만 원에 인수해서 선경종합건설로 재발족하고 그해 12월에는 동일 업종의 삼덕산업까지 인수해서 사세를 확장했다. 달러박스로 회자되던 중동건설특수 및 국내 부동산개발 붐에 편승하고자 건설업에 진출한 것이다. 1978년에는 전북 군산에 소재한 경성고무를 인수했다. 1932년에 이만수(李晩秀)가 설립한 업체로 1936년에는 종업원 수 100명에 일산 500족 규모로 성장한 군산 유일의 한국인 소유 고무신 제조업체였다. 초기에는 검정고무신만 생산했으나 점차 기술수준을 높여 표백기술을 적용한 흰고무신 뿐만 아니라 흑색 및 백색 운동화 등으로 제품의 다변화를 도모했다. 그 결과 해방 무렵에는 경성고무의 ‘만월표’가 서울 이남지역에서 최고 인기를 누릴 정도로 성장했다. 경성고무는 식민지 체제하에서 오로지 한국 민초들의 애호품인 고무신 생산에 주력해서 민족자본으로 성장한 드문 케이스였다. 1978년 7월에는 요트 생산업체인 선경머린을 자본금 8000만 원에 설립했다. 선경은 종합무역상사로 지정받기 위해 수출유망 중소기업에 대한 대대적인 인수 등 수평적 다각화에 박차를 가한 나머지 복합기업집단으로 변신했다. 그 결과 선경은 현대, 럭키, 삼성, 대우, 효성, 국제, 한진, 쌍용, 한국화약에 이어 재계 10위의 재벌로 급부상했다. 유공 인수와 더불어 몸집 더욱 확대 선경의 도약은 1980년대에도 계속되었는데 최대 사건은 (주)선경이 1980년 12월에 국내 최대의 정유 공기업인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 지분 50%와 경영권을 인수한 것이다. 대한석유는 정부가 1962년에 미국 걸프사와의 합작으로 설립한 국내 최초이자 유일한 독점 정유회사였다. 1980년에 대한석유는 걸프사 보유 50% 지분을 인수한 후 같은 해 말에 공기업민영화 방침에 따라 선경에 인수되었던 것이다. 당시 국내에는 호남정유, 쌍용정유, 현대석유, 경인에너지(한화에너지) 등이 있었으나 국영인 대한석유는 마켓쉐어 1위를 유지하는 리더기업이었다. 선경은 1982년에 상호를 (주)유공으로 변경하고 1985년에 대한석유의 나머지 지분 50%마저 인수해서 선경그룹의 주력기업으로 전환했다.

유공 인수를 계기로 국내 최대의 석유제품 판매업체인 ㈜흥국상사의 경영권도 확보했다. 흥국상사는 1965년 2월 10일에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설립된 개인사업체였다. 그러나 1969년 6월에 걸프가 586만 달러의 현금차관을 공여하면서 전 주식의 25%를 인수하고 경영권을 확보했다가 1972년 12월에 유공이 흥국상사의 전 주식을 인수해서 유공의 자회사화했던 것이다. 흥국상사는 1980년 말 현재 매출액 2104억 원에 매출이익률 6.53%의 초우량기업이었다. 1982년 1월에는 자본금 10억 원의 유공해운(주)을 설립하고 그해 6월과 7월에 25만 톤급의 대형 유조선 ‘아나벨라’호와 ‘야스텔라’호를 파나마로부터 용선해서 취역시켰다. 사우디아라비아의 라드라누라항에서 원유를 선적해서 정유시설이 있는 울산항으로 수송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아세아상선으로부터 26만 톤급 초대형 유조선인 ‘코리아스타’호도 용선해서 원유수송에 투입했다. 해외유전 개발사업도 이때부터 개시했다. ㈜유공이 신규로 개발하는 예멘의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원유의 10%를 가지기로 사전에 예멘정부와 컨소시엄 계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마리브유전은 1985년 11월부터 개발정 시추와 생산시설 및 수출송유관 건설 등에 착수해서 1987년 12월부터 본격생산에 돌입한 단기간 내에 성공한 케이스였다. 1988년 1월 20일 유공해운 소속의 ‘Y위너’호가 마리브유전에서 생산된 개발원유 35만 배럴을 싣고 울산항에 입항했다. 유공 인수와 함께 수직다각화 작업을 동시에 병행해서 선경그룹의 몸집은 더욱 확대되었던 것이다. - 이한구 수원대학교 경제금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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