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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성의 옛절터 가는 길 - 48] 여주 고달사지

황제의 칙령 깃든 천년의 위용, 400년 고목이 길손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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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73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4.04.07 14:03:07

봄이 찾아오면서 문득 남한강변 여주(驪州)에 가고 싶어진다. 터미널로 나와 여주행 버스에 오른다. 동서울터미날과 강남고속버스터미날에서는 30~40 간격으로 여주행 버스가 떠난다.

지난 해 9월 여주는 시(市)로 승격하였다. 여주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궁금한 것이 이 땅의 지명이다. 검은 말 려(驪), 무슨 까닭으로 글자도 쉽지 않은 려(驪) 자를 쓴 것일까? 여주군사(驪州郡史)나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보니 여주는 여러 지명을 가지며 변화해 왔다.

고구려 때 순수한 우리말 지명인 골내근현(骨乃斤縣)에서 후기신라(後期新羅) 경덕왕 때에는 우리나라 땅이름이 한자화했는데 신라 땅이 된 이 지역 이름은 황효(黃驍)로 바뀌었다. 드디어 말을 나타내는 글자 효(驍: 누런 바탕에 흰 빛이 섞인 말이라 함) 자가 나타난다.

고려가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23년(940년)에는 황려현(黃驪縣)으로 바뀌었다는데 이 때 얼룩이 말(驍)에서 검은 말(驪)로 바뀌게 된 것이다. 고종 때 잠시 영의(永義)가 되었다가 충렬왕 때(31년, 1305년)에는 그 어머니 김씨가 이 고장 출신이기에 높여 여흥군(驪興郡)으로 승격되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여흥민씨들은 이 곳 출신이다. 이 곳 지세(地勢)가 좋아서 그랬는지 원경왕후, 인형왕후, 명성황후, 순명황후 모두 4명의 왕비를 조선왕조에서 배출했으니 만만치 않은 땅이다. 임금도 두 분을 그 품에 품었다. 조선의 성군 세종대왕(世宗大王)의 영릉(英陵), 북벌의 꿈을 끝내 펼치지 못한 효종(孝宗)의 영릉(寧陵)이 그것이다.

다시 지명(地名) 이야기로 돌아가면, 우왕(禑王)은 이 곳을 황려부(黃驪府)로 더욱 승격시켰다(14년, 1388년). 그러나 공양왕이 즉위하면서(1년, 1389년) 다시 군(郡)으로 낮추었으며 조선조 예종 1년(1469년)에는 세종대왕의 영릉(英陵)을 내곡동 헌인릉 자리에서 이 곳으로 천장(遷葬)하면서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시켰다. 이 날 이후 이 땅은 여주(驪州)란 이름으로 550년 가까이 그 이름을 지키고 있고, 이 곳을 지나는 남한강도 여강(驪江)이라는 이름으로 짝을 이루고 있다.

그래도 검은 말(驪)에 대한 궁금증은 풀리지 않는다. 다행히 동국여지승람에 해답의 힌트가 있다. 여주목 고적(古跡)조에는 마암(馬巖: 말바위)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용은 이렇다.

▲광활한 고달사지


“말바위는 주 동쪽 1리에 있다. 이야기에 전하기를: 황마(黃馬;누런 말)와 여마(驪馬;검은 말)가 물에서 나왔기에 이로 인해 군 이름붙이기를 황려라 하였다. 바위도 마암(말바위)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馬巖: 在州東一里 談傳;黃馬驪馬出水 因名郡爲黃驪 巖之得名以此)
이규보(李奎報)의 시에,
雙馬雄奇出水涯(쌍마웅기출수애) 두 말이 웅건, 기이하게 물가에서 나오니
縣名從此得黃驪(현명종차득황려) 현 이름은 이를 따라 황려(黃驪)라 했다네
詩人好古煩徵詰(시인호고번징힐) 시인은 옛것 좋아하여 까딸스럽게 증거를 따지지만
來往漁翁豈自知(래왕어옹기자지) 오가는 늙은 어부 어찌 제 알리요”

이규보가 살던 800여년 전 고려시대에도 황려(黃驪)라는 지명에 대해 이것저것 캐묻던 지식인들이 있었던 모양이다.

여지승람 고적조에는 이어서 사우당(四友堂)이라는 당(堂)을 소개하고 있다. 사우란 경(耕)ㆍ목(牧)ㆍ어(漁)ㆍ초(樵) 네 벗을 뜻한다는데 초야에 묻혀 욕심없이 살려는 선비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말이다. 거기에도 마암(馬巖)이 등장하고, 이색(李穡)의 시에도 마암(馬巖)이 등장한다. “물을 막는 공은 마암석(馬巖石)이 높고, 하늘에 뜬 형세는 용문산(龍門山)이 크구나.” (捍水功高馬巖石 浮天勢大龍門山)

▲고려 석실묘(石室墓)


조선왕조 4명 배출한 여주, 왜 검은 말 여(驪)를 썼을까?

마암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흥민씨 시조와 관련된 전설에도 등장한다. 깎아지른 듯한 벼랑에 괴이하게 생긴 바위가 바로 마암(馬巖)인데 근처 암혈에서 여흥 민씨의 시조가 태어났다는 구전의 이야기가 있다 한다.

이래저래 여주라는 지명은 마암(馬巖)과 그 곳 물가에서 나타났다는 두 마리 전설의 말로 귀착된다.

마암 건너 봉미산 자락의 고찰 신륵사(神勒寺)도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벌써 눈치 채신 독자도 있을 것이다. 어찌해서 고삐를 나타내는 글자 륵(勒)을 절 이름에 쓴 것일까? 누군가가 만들어 낸 구전의 전설에는 마암(馬巖)에서 나와 날뛰는 용마(龍馬)에게 재갈(勒)을 물린 신륵사 스님이야기가 전해진다. 이곳에서 열반한 나옹선사라기도 하고 다른 선사 이름도 오르내린다. 어쩌면 신륵사의 륵(勒)자는 미륵불(彌勒佛)의 륵(勒)일지도 모른다.

어느 사이 버스는 여주터미날에 도착한다. 여주는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버스터미널에서 시내(군내) 각지로 떠나는 버스가 없다. 시내버스를 타기 위해서는 2가지 방법으로 이동한다.

첫째는 터미널 앞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하리정류소(여주시 산림조합 앞)로 이동하는 방법이다. 이곳에서는 오늘의 목표지인 고달사지 가까이 가는 버스편들이 비교적 많다. 둘째 방법은 터미널 남쪽 터미널사거리에 이어진 영릉로 버스정류장을 이용하는 것이다. 장점은 이동거리는 걸어서 5분인데 단점은 버스가 하리정류소보다 적다는 점이다.

▲혜목산 가는 길


여주의 시내버스는 적은 인구가 각지에 흩어져 살다 보니 버스편이 분산되어 있다. 따라서 승객이 많지 않은 지역은 버스편이 하루에 1~2회에 불과하다. 고달사지가 있는 상교리도 오후에 1~2차례밖에 버스편이 없다.

따라서 약간 다리의 수고로움이 필요하다. 상교리에서 2km 거리에 있는 교통요지 ‘주암리4거리’를 이용하는 것이다. 주암리4거리를 통과하는 버스는 용문행과 양동행 버스들이다. 용문행 버스는 987번대 버스들이다.

즉 987, 987-1, 987-2…버스를 타고 주암4거리에서 하차. 양동행 버스는 988번대 버스와 989번대 버스들이다. 즉 988, 988-1, 988-2…버스와 989, 989-1, 989-2…버스를 이용하여 역시 주암4거리에서 하차한다. 주암4거리에서 하차하여 서쪽 도로로 2km 이동하면 상교리에 닿는다.

오늘은 양동행 버스에 오른다. 버스는 여강(驪江)을 건너 신륵사 입구를 지난다. 다시 북내면 소재지를 지나 이윽고 주암4거리에 도착한다. 한적한 2차선 도로를 따라 나지막한 고개를 하나 넘으면 상교리에 닿는다. 약 2km의 거리이다. 옆으로는 요즈음에 세운 신고달사라는 절이 낯설게 서 있다.

우향우(북쪽)하여 앞 쪽 산을 바라보며 한적한 길로 잠시 접어들면 400년 고목이 길손을 맞는다. 그 너머로는 넓디넓은 절터가 펼쳐져 있다. 인적은 없고 넓게 펼쳐져 있는 옛절터가 어째 휑하다는 느낌이 든다.

▲고달사지 느티나무


고달사(高達寺). 빈터만 남았다. 봉은본말사지에 따르면 신라 경덕왕 23년(764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신라 말 고승 원감국사(圓鑑國師) 현욱(玄昱: 788~869)이 중국에서 귀국하여 이 곳에 28년간 머물면서 사세가 커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新羅景德王二十三年, 甲辰刱 圓鑑國師自華歸國 居于慧目山). 원감국사 현욱은 신라귀족 출신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마조(馬祖)계의 백암장경(百巖章敬)의 심인(心印)을 전수받은 법사(法嗣: 정식 법통을 이은 後嗣)이다.

만년에 그 법은 진경대사(眞鏡大師) 심희(審希: 855~923년)에게 전해지고, 진경대사의 법은 다시 원종대사(元宗大師) 찬유(瓚幽)에게로 전해져 꽃을 피웠다. 당시에는 당(唐)의 유학승들로부터 전해진 선종(禪宗)이 신라불교의 주류를 이루어 구산선문(九山禪門)이 열렸는데 이 곳 고달사에 세 스님으로 이어지는 혜목산문(慧目山門)을 별도의 산문으로 본다고 한다. 한편 2세인 진경대사는 창원 봉림사(鳳林寺)에 봉림산문을 개창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창건한 고달사, 원감국사 현욱 머물며 사세 커져

이제 절터로 발길을 옮긴다. 1998년 이래 발굴을 거쳐 절터는 잘 정돈되어 있다. 동국여지승람 불우(佛宇)조에는 “취암사, 상원사, 고달사는 모두 혜목산에 있다고 하였고(鷲巖寺 上院寺 高達寺 俱在慧目山)”, 산천(山川)조에는 혜목산은 주 북쪽 이십오리에 있다 하였다.(慧目山在州北二十五里).

지금은 취암사나 상원사를 찾을 수 없으니 고달사와 같은 폐사의 운명을 맞은 것이다. 한편 근래에 부르고 있는 고달사지 뒷산인 고래산, 우두산, 옥녀봉은 동국여지승람에는 찾을 수 없고 단지 해동지도, 여지도, 광여도 등에서 고달산(高達山)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고래산은 근래에 생긴 산 이름이며 원래는 고달사(高達寺)의 이름을 따서 고달산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원종대사탑비 귀부와 이수


언제나 보듯 지명은 생명이 있어 세대가 바뀌면 바뀌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인 것 같다.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있다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는 그 진리가 있을 뿐이다.

한편 혜목산(慧目山)이라는 이름은 ‘지혜의 눈을 가진 산’이란 뜻이니 다분히 사유적(思惟的)이다. 불교적 의미를 담고 있는 듯하다. 원각경(圓覺經)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慧目肅淸 照耀心鏡(혜목숙정 조요심경:지혜의 눈은 맑아 마음거울은 밝게 비춘다)

고달사지에는 여러 개의 문화재가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석조(石槽) 2기(基)
*국보 4호와 보물 7호로 지정된 승탑(僧塔, 浮屠) 2기(基)
*보물 6호로 뛰어난 솜씨의 비석의 귀부(龜趺)및 이수(螭首)와
 소박한 귀부(龜趺). 파손되어 중앙박물관에서 복원된 원종대사탑비
*보물 8호 부처의 앉을 자리인 石造臺座
*중앙박물관 뜰로 옮겨진 보물 282호 쌍사자석 등

▲원종대사 승탑 보물 7호


석조(石槽)는 용도에 따라 수조(水槽)와 연조(蓮槽)로 나눈다고 한다. 수조는 물통으로 쓰는 것이고 연조(蓮槽)는 연지(蓮池)를 갖추지 못한 사찰에서 부처님을 공양하기 위해 연(蓮)을 키우는 그릇이라 한다. 고달사의 석조는 어디에 속하는지 궁금하다.

승탑이 두 기 있는데 절터 우측 동남쪽에 있는 것이 보물 7호 원종대사 혜진승탑(부도)이다. 뛰어난 균형미와 조각솜씨가 일품이다. 또 하나의 승탑은 서북쪽에 서 있는 국보 4호 승탑이다. 나말려초 승탑 중 일품이다. 누구의 승탑인지 불분명한데 일제 강점기에 일인 학자 시께노 다다시(關野貞), 이마니시 류(今西龍), 가쓰라기 스에하루(葛城末治)가 조사한 일이 있다. 이 때 시께노는 원감국사 부도설을 내 놓기도 하였다. 그 후 의견은 있었으나 누구의 승탑인지 알 수 있는 근거는 아직도 발견되지 않았다. 심증적으로는 이 곳에서 28년 주석한 원감국사의 승탑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 이 두 승탑의 구조를 곰곰이 살피면 승탑에 대한 공부는 충분히 될 것이다.

또 비석을 세웠던 귀부(龜趺) 두 기가 있다. 원종대사 혜진탑비의 이수(螭首)가 지금이라도 포효할 것 같은 귀부인데 비석은 도괴된 것을 수습하여 국립박물관에서 복원하였다. 보물 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한편 1917년 시게노(關野)가 조사할 당시에는 비석이 서 있었다 하니 근세에 와서 도괴된 것이다. 참으로 아쉽구나. 그 옆 10여m 지점에 소박한 귀부가 하나 더 있다. 비석은 언제부터인가 사라져 찾을 길이 없다. 발굴에서도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오래전에 누군가 가져갔을 것이다. 이 절터에 두 기의 귀부와 두 기의 승탑이 있으니 아마도 승탑과 여기 서 있었을 비석은 짝이 맞을 것이다.

▲고래산 우두산 등산로


또 하나 안타까운 것이 보물 8호 부처가 앉았을 석조대좌(石造臺座)이다. 부처는 어디 가시고 텅 그렇게 빈자리만 남았단 말인가?


석고대좌, 부처는 어디 가고 어찌 빈자리만 남아 있는가?

다행히 보물 282호 쌍사자 석등은 비록 자리는 떠났어도 국립박물관 뜰에 가면 만날 수 있으니 반갑다. 원종대사가 이곳에서 주석할 당시인 고려 광종22년(971년)에 황제는 조칙을 내려 ‘국내 사원 중에 도봉원, 고달원, 희양원 오직 3곳은 전통을 지켜 문하의 제자들이 상속하여 대대로 주지가 되도록’ 하였다. 이른바 황제의 칙령을 받은 부동사찰(不動寺刹)로서 중요성이 인정된 사찰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고달사의 위용은 높았다. 다행히 복원한 원종대사의 비문에는 이런 내용을 비롯하여 당시 상황을 알 수 있는 많은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던 고달사는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에 가담했다가 점차 지방의 이름없는 절로 전락해 갔던 것 같다. 동국여지승람까지는 기록에 남았던 고달사가 범우고(梵宇攷:1799년)에는 폐사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 뒤 절터에 남아 있던 고려초 걸작품 석물들도 수난을 당했다. 이 빈 터에 근년에 고달사라는 이름을 다시 걸고 조그만 절이 자리잡았다. 아직 기와도 한 장 얹지 못한 절이다. 아담한 사찰로 자리잡아 가기를 기원해 본다.

▲승탑의 구조


국보4호 승탑을 지나 혜목산 등산길을 오른다. 이제는 혜목산은 잊혀지고 우두산이라 부른다. 잠시 뒤 고려시대 석실묘(石室墓)를 만난다. 고래산 주변에서 북쪽 구둔역, 석불역으로 이어지는 산줄기에는 석곽묘, 석실묘 등이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다. 민간에서는 고래산이라는 이름이 고려장(高麗葬)에서 온 이름이라는 이야기도 지어냈고 이들 무덤들을 가리켜 고려장터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 시간여 능선을 오르면 헬기장으로 보이는 평탄지가 있다. 여기에서 직진하면 국사령~ 고래산 정상~ 옥녀봉을 거쳐 출발점으로 원점 회귀할 수 있다. 차량을 가져갈 때에는 이 코스를 택하는 것이 좋다.

대중교통으로 왔으면 헬기장에서 북쪽 능선길 50m 지점에 우두산 정상으로 가자. 자그마한 정상석이 기다리고 있다. 동북쪽으로는 골프장이 내려다보인다. 이 능선 길은 북서 방향으로 이어지는 하산길인데 양평과 여주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길이다. 잠시 후 국가시설물 펜스를 끼고 내려오면 70번 지방도 곡수리에 도착한다. 이 길에는 양평과 용문으로 나가는 버스가 자주 있다. 전철로 즐겁게 귀가하자.


교통편
동서울 또는 강남터미날 ~ 여주버스터미날
(환승)여주시내버스 987번대, 988번대, 989번대~ 주암사거리 하차

걷기 코스
주암4거리~ 상교리~ 고달사지~ 석실묘~ 우두산~ 곡수리 (또는 우두산~ 국사령~ 고래산~ 옥녀봉~ 상교리)

※‘이야기가 있는 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월 마지막 토요일에 함께 모여 서울 근교의 옛절터 탐방을 합니다. 3, 4시간 정도 등산과 걷기를 하며 선인들의 숨겨진 발자취와 미의식을 찾아가니, 참가할 분은 comtou@hanmail.net(조운조 총무)로 메일 보내 주시면 됩니다.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정리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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