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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든 챔피언 ⑪ 라이카]100년 역사 독일 광학기술 대표, 소형 카메라로 ‘사진미학’ 창조

퓰리처상 받은 사진 다수 배출, 100주년 맞아 미러리스 카메라 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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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387호 정의식 기자⁄ 2014.07.17 08:49:52

▲라이카 공장의 바디 생산 모습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올해로 탄생 100주년을 맞은 라이카는 소형 카메라 시대를 연 선구자적 브랜드다. 1914년 독일의 기술자이자 포토그래퍼였던 오스카 바낙에 의해 탄생한 이래 100년간 끝없는 혁신과 도전으로 명성을 유지해왔다. 오늘날까지 수많은 포토그래퍼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품으로 사랑받고 있는 독일 광학기술의 대표주자 라이카의 진면목을 확인해보았다.』


지난 100년간 라이카(Leica)는 ‘포토저널리즘’으로 불리는 새로운 사진 미학의 가장 중요한 도구로 사용되어 왔다.

스페인내전에서 촬영된 로버트 카파의 ‘총 맞는 병사(Falling Soldier)’, 알베르토 코르다가 촬영한 쿠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초상화, 닉 우트가 베트남 전쟁에서 촬영하여 퓰리처상을 받은 어린 소녀의 사진,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의 1945년 전승기념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촬영한 ‘VJ-DAY Kiss’ 등 수많은 전설적 사진들은 라이카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줬다.

이 같은 라이카의 전설적 명성은 1914년 에른스트 라이츠의 직원이자 포토그래퍼였던 오스카 바르낙(Osca Barnack)이 35mm 필름 포맷(24×36mm)의 스틸 카메라를 발명하면서 시작됐다. 라이카(Leica)는 ‘라이츠 카메라(Leitz Camera)’의 준말이다.

원래 라이카(Leica Camera AG)는 1849년 칼 켈너(Carl Kellner)가 설립한 현미경 제조사 옵티셰스 인스티튜트(Optisches Institut)에서 비롯된 회사다. 1869년 에른스트 라이츠 1세가 회사를 인수한 후 사명을 ‘에른스트 라이츠 옵티셰스 베르케(Ernst Leitz Optische Werke)’로 바꾸고, 카메라와 쌍안경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왼쪽부터)로버트 카파의 ‘총 맞는 병사’(1936). 베트남 전쟁의 실체를 보여준 닉 우트의 사진. 퓰리처 상을 수상했다(1972). 알프레드 아이젠슈타트가 1945년 대승기념일 뉴욕 타임스퀘어에서 촬영한 사진(1945).


이 회사의 기술자였던 오스카 바르낙의 꿈은 특별한 카메라를 제작하는 것이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카메라는 지나치게 무겁고 큰 기기였다. 외부에서 사진을 찍으려면 커다란 카메라와 삼발이, 암막을 가지고 나가야했으니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필름도 매번 바꿔 끼워야 했다.

바르낙은 어려서부터 사진찍기를 좋아했으나 몸이 허약해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닐 수 있는 소형 카메라를 상상했고, 결국 최초의 실용적인 소형 카메라를 개발하는데 성공했다.

‘우르-라이카(Ur-Leica)’라 불린 이 최초의 카메라는 바르낙의 사진 철학인 ‘작은 네거티브 – 큰 사진’을 담고 있었다. ‘우르(Ur)’는 최초, 기원 등을 의미한다.

▲라이카 카메라의 창시자 오스카 바르낙


우르-라이카의 발명은 사진계의 혁명으로 받아들여졌다. 지금까지 대형 건판 카메라를 사용해왔던 포토그래퍼들에게 새로운 창작의 장을 열어줬기 때문이다.

‘우르-라이카’라는 이름이 붙기 전, 오스카 바르낙은 휴대성이 좋은 이 컴팩트 카메라의 프로토타입을 ‘릴리퍼트(lilliput)’라 불렀다. 릴리퍼트는 조나단 스위프트가 지은 소설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소인국의 이름이다.


라이카 M3, 전설의 시작

우르-라이카는 24×36mm 필름을 사용했고, 금속으로 된 바디(Body)와 프레임 카운터, 36매용 카세트, 프레임 타입 뷰파인더를 위한 액세서리 슈와 침동식 렌즈 등을 갖추고 있었다.

라이츠 사는 우르-라이카의 시장성이 충분하다고 판단, 바로 판매하고자 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영향 때문에 10여 년의 시간을 기다리게 된다. 1925년에 이르러서야 우르-라이카를 기반으로 개발된 최초의 시판용 소형 카메라 ‘라이카 I’이 양산되어 시장에 출시됐다.

1930년에는 렌즈 교환이 가능한 ‘라이카 C’가 개발됐고, 1931년에는 라이카 쓰레드 마운트 (Leica Thread Mount)를 기반으로 한 렌즈 교환식 카메라 시스템이 개발됐다. 이때부터 라이카는 다양한 렌즈들을 사용해 최적의 작품을 찍을 수 있게 됐다.

1932년부터는 RF 카메라인 ‘라이카 II’가 시판됐다. RF 카메라(Range Finder Camera, 거리계 연동)는 촬영하는 렌즈와 분리된 별도의 삼각 측량방식을 이용한 거리 측정장치(Range Finder)를 이용하여 초점을 잡는 카메라다.

1934년에는 인물사진에 적합한 렌즈 ‘탬버(Thambar) 90mm F2.2’가 출시됐다. 이후 저속 셔터를 지원하는 ‘라이카 III’와 ‘라이카 llla’ 등이 생산됐으나, ‘라이카 llla’를 마지막으로 설계자인 오스카 바르낙이 사망했다. 최초의 우르-라이카에서 1957년 출시된 ‘Leica lllg’까지를 흔히 ‘바르낙 카메라’로 부른다.

전쟁 이후인 1954년 라이츠 사는 세계최대의 사진분야 전시회 ‘포토키나’에서 완전히 새롭게 설계된 RF 카메라 ‘라이카 M3’를 출시했다. 새로운 렌즈 마운트인 ‘라이카 M 베이요넷 마운드(bayonet Mount)’가 채택됐으며, RF(거리계)의 설계가 확립됐다. 

M3는 0.92 배율 파인더와, 새로운 필름 로딩 시스템, 황동 베럴, 포컬 플레인 셔터 등을 갖추고 1956년부터 판매되며 전설적인 명성을 날리게 된다.

라이카 역사상 가장 훌륭한 카메라로 알려진 M3는 교환하는 렌즈에 따라 프레임이 변하는 아주 밝은 뷰파인더를 내장하고 있었다. 덕분에 다른 렌즈를 장착할 때마다 별도의 뷰파인더를 장착해야만 했던 불편이 제거됐다. 이같은 편의성은 전문 포토그래퍼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까지 큰 인기를 끄는 요인이 됐다.

▲우르-라이카(1914)


당시 기준으로 너무나 진보된 카메라였던 M3는 판매량도 엄청난 수준이었다. M3는 출시 후 3년간 10만대 이상 판매되는 대기록을 세웠다. 생산된 지 60년이 넘어가는 카메라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M3를 사용하는 포토그래퍼들이 많이 있다.

1957년 라이츠 사는 M3의 보급형 기종인 ‘라이카 M2’를 출시했고, 1959년에는 M2의 기능을 보다 축약한 ‘라이카 M1’을 생산했다.

1967년 발표된 M4는 이전 모델에 비해 조금더 인체공학적인 디자인을 채택한 제품이다. 필름을 갈아끼우기 위해 필름 스풀을 빼내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앴고, 필름 되감기가 더욱 편리해졌다.

M5는 1971년 발표됐다. 최초로 TTL 노출계를 사용해 카메라 자체에서 노출 측정과 배터리 체크가 가능했으며, 긴 레인지 파인더를 채택해 보다 정확한 포커싱을 지원했다. 하지만 M5는 디자인이 이전과 많이 달라 기존의 라이카 팬들에게 외면당한 비운의 모델이기도 했다.

▲전설의 명기 ‘라이카 M3’(1954)


일본과 경쟁…위기와 재도약

라이카 M3의 놀라운 성능을 따라잡기 위해 전력하던 일본 카메라 업계는 결국 SLR 방식으로 방향을 바꿨고, 1970년대부터는 전자식 장치가 내장된 일본제 SLR 카메라가 세계 시장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SLR(Single Lens Reflex, 일안 반사식) 카메라는 렌즈와 필름 사이에 거울 등의 광학 장치를 사용하여 화상을 뷰파인더에 투사하는 카메라를 말한다. 대부분의 SLR 카메라는 렌즈로 들어온 빛을 거울과 펜타프리즘으로 돌려서 뷰파인더로 쏘아주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1971년 출시된 M5는 디자인 등 여러 문제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후 SLR 방식으로 개발한 ‘라이카플렉스(Leicaflex)’와, 저가형 시장을 노리고 일본의 미놀타와 공동개발한 ‘라이카 CL’ 역시 마찬가지였다.

결국 라이츠 사는 1974년 스위스 회사인 와일드 히어브러그(Wild Heerbrugg AG Switzerland)에 흡수합병되었으며, 이후 1986년 회사명을 ‘에른스트 라이츠’에서 ‘라이카(Leica, LEItz CAmera)’로 개명하게 된다.

이후 라이카 경영진은 새로운 SLR 카메라 개발에 전력하고, M형을 단종시키려 했으나, 월터 클럭(Walter Kluck)의 설득으로 1977년 M4를 모태로 한 ‘라이카 M4-2’와 ‘M4-P(Press)’를 출시하게 된다.

▲라이카 카메라 AG의 회장 안드레아스 카우프만, CEO 알프레드 쇼프, 스테판 다니엘, 스테픈 케인(좌측으로부터)


M4-2와 M4-P가 라이카의 시장 신뢰도를 다시 이끌어낸 이후 라이카는 ‘클래식한 디자인’과 ‘단순한 작동에서 오는 신뢰성’이라는 원칙을 세우고, 지속적으로 M 시리즈를 유지하고 있다.

이후 디지털 카메라 시대에 대응하기 위해 라이카는 일본 기업 파나소닉과 제휴했다. 파나소닉의 루믹스(Lumix) 바디와 라이카의 고품질 렌즈의 콜라보레이션이 추진되면서, 2005년 D-LUX2를 시작으로, 2012년 D-LUX6에 이르기까지 D-LUX 시리즈가 지속적으로 출시됐다.


100주년 맞아 ‘T 시스템’ 출시

현재 라이카는 RF 카메라와 컴팩트 카메라 2분류의 카메라를 생산하고 있다. RF 카메라로는 2006년 디지털 기술을 적용한 ‘라이카 M8’을 출시했고, 이후 2010년 4월에 풀프레임 카메라인 ‘라이카 M9’을, 2013년 3월에 ‘라이카 M’, ‘라이카 M-E’, ‘라이카 M  모노크롬(Monochrom)’을 출시했다.

컴팩트 카메라로는 2010년 출시한 X1, 2012년 출시한 X2, 2013년 출시한 X Vario가 있다.

라이카 카메라가 탄생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인 2014년을 맞아 라이카는 자사 최초의 미러리스 렌즈 교환식 카메라인 ‘라이카 T 시스템’을 공개했다.

‘미러리스 렌즈 교환식 카메라(Mirrorless Interchangeable Lens Camera)’는 기존의 디지털 일안 반사식 카메라(DSLR)에서 미러와 광학식 뷰파인더를 전자센서와 디스플레이로 간소화시킨 카메라다.

▲뉴욕 소더비 경매에 전시된 세계에서 하나뿐인 조나단 아이브의 ‘라이카 M’


라이카 카메라 100주년을 기념해 탄생한 라이카 최초의 미러리스 카메라인 ‘라이카 T 시스템’은 통 알루미늄을 장시간 손으로 직접 깎아서 만들어 매우 견고한 바디가 특징이다. 아우디 디자인을 통한 매끈하면서도 부드러운 표면과 깔끔한 선으로 이뤄진 외형은 단순함과 간결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터치스크린 디스플레이를 탑재해 사용이 간편하며 라이카 최초로 와이파이 모듈을 적용해 사진과 동영상 등을 무선으로 전송할 수 있다. iOS용 라이카 T 앱도 공개됐다.

1630만 화소 이미지 센서를 장착했으며, ISO 100-12500 고감도와 풀HD 해상도 영상 촬영 기능 등을 탑재했다. 셔터 속도는 최고 1/4000초이며 초당 5매 속도로 연속 촬영도 가능하다. 16GB 메모리가 내장되어 있어 별도 저장장치 없이 바로 사용이 가능하다.


세계 최고가 디지털 카메라

지난 2013년 11월 애플의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가 디자인한 ‘라이카 M’은 뉴욕의 소더비 옥션하우스에서 열린 ‘RED’ 경매에서 180만 달러에 익명의 기부자에게 낙찰됐다.

세계에서 가장 비싼 디지털 카메라가 된 이 특별한 ‘라이카 M’은 애플의 디자이너 조나단 아이브와 산업 디자이너 마크 뉴슨이 디자인에 참여해 경매 전부터 많은 이들의 기대를 샀다.

라이카 M 외에도 ‘RED’ 경매를 위해 만들어진 40개 제품의 낙찰 금액은 모두 아프리카의 에이즈, 말라리아, 결핵 퇴치를 위해 기부됐다.

라이카 카메라 회장 안드레아스 카우프만은 라이카의 100년 역사를 아래와 같이 표현한다. “라이카만큼 지난 100년의 사진사에 영향을 미친 브랜드는 없습니다. 라이카는 지속적으로 포토그래퍼들에게 최고의 장비와 훌륭한 렌즈를 제공했습니다. 이 덕분에 우린 이 영광스러운 100주년을 전세계 작가들의 전설적인 사진과 함께 축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정의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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