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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저커버그에게 “픽션 읽으라”고? 한국에선 어떤 픽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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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14호 최영태 CNB저널 편집국장⁄ 2015.01.22 09:10:42

▲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최영태 CNB저널 편집국장) 새해 벽두부터 재미있는 기사가 나왔다. 페이스북 창립자로 억만장자인 마크 저커버그가 새해결심으로 “2주에 한 권씩 책을 읽겠다”는 독서계획을 밝히면서 최근 읽은 책으로 베네수엘라의 저널리스트 모이세스 나임 저 ‘권력의 종말’(The End of Power)을 소개했다. 덕분에 이 책의 판매량은 크게 늘었다.

억만장자가 ‘열렬 독서’ 각오를 밝힌 것도 재밌지만, 한수 더 뜬 건 졸지에 유명 작가가 된 나임의 반응이다. 감사해 하기는커녕 “내 책 말고 소설을 읽으라니까”라고 지적질을 하고 나선 것이다. 나임은 “픽션은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이상적인 입문서이며, 리얼리티를 파악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만들어낸 가공의 이야기(픽션)를 읽으면 새 세계가 보이고, 현실이 더 잘 보인다고? 좋게 말해 픽션이지, 나쁘게 말하면 ‘구라’에 불과한 픽션이 현실 파악을 도와준다니 믿기지 않는다. 픽션이 도대체 뭐기에….

과거 읽은 책 중에 ‘픽션’이 들어가 있는 부분을 다시 들춰봤다. 일본 근대 사상사의 아버지라는 마루야마 마사오가 명저 ‘현대 정치의 사상과 행동’에서 픽션에 대해 언급한 부분이 눈에 띈다.

그는 ‘비근대적 사회의식이 픽션에서 불안을 느끼’는 이유를, ‘사회관계가 고정되어 있는 곳에서는 픽션이란 생각은 나오지 않으며… 거꾸로 말하면, 근대정신이란 픽션의 가치와 효용을 믿고, 그것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정신으로 나타’난다고 설명했다.

마루야마의 주장은 쉽게 말하면 이런 거다. 양반은 양반이고 상놈은 상놈이며, 양반이 상놈 될 리 없고 상놈이 양반 될 리 ‘절대로’ 없는 전통(비근대적) 사회에선, 양반과 상놈이란 사회제도가 인간이 만든 것(픽션)이란 생각이 들 리 없고, 하늘 또는 신이 만든 절대-영원 진리로만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이러던 인류가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양반과 상놈이 섞이는 시대가 돼서야 비로소 “아, 양놈과 상놈이란 게 원래 씨가 다른 게 아니라 인위적으로 만든 거구나”라고 깨닫게 되고, 그 시점부터 사회를 만들기(픽션하기) 위한 구상으로서 픽션(소설)을 쓰게 됐고, 이런 소설을 대중적으로 읽게 됐다는 소리다.

우리가 익히 알듯, 19-20세기 서양과 동양에서, 그리고 일제시대와 해방 뒤 대한민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선두 역을 맡은 것은 바로 소설이었다. 이런 식이다. “조국근대화를 합시다”란 주장은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치지만, 조국근대화를 위해 농촌으로 뛰어드는 동혁과 영신(심훈 저 ‘상록수’의 주인공들)의 사랑 이야기는 온 국민이 읽으면서 “그래 나도 해야지”라는 각오를 갖게 되는 식이다.

이론적인 주장이 아니라 ‘실례처럼 들리는’ 이야기를 해줌으로써 세상을 정말로 파악하게 하고, 리얼리티를 알게 해준다는 픽션을 읽자는 나임의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또 한편으론 “한국에서 도대체 어떤 소설-픽션을 읽으란 말인가?”라는 질문 또한 생겨난다.

일본의 거물 사상가 가라타니 고진은 지난 세기말 “일본의 근대문학은 죽었다”고 선언했고, 그 뒤 아직도 사회진보의 선두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한국 문학에 일부 기대를 거는 듯 했으나 결국 그 기대를 접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도 “한국 근대문학도 죽었다”는 아픈 주제가 화두가 됐다.

양반과 상놈이 고정돼 있던 세상이 뒤엎이고 ‘너나 나나 다 개인’이라는 픽션정신의 근대사회가 열리는가 싶던 한반도는, 최근의 갑질논란에서 드러나듯, 다시 양반과 상놈이 섞이지 않는, 즉 ‘불가촉 천민’을 두는 사회를 향해 한발 두발 다가서고 있다. 계속 굳어져가기만 하고, 가소성(plasticity)이 증발해버린 사회에서 더 이상 픽션은 생산 불가능한 건지, 아니면 아직도 이 땅 어디선가는 새 세상을 열기 위한 픽션 작업이 몰래 숨어서 진행되고 있는지, 두리번거려 보이지만 딱히 보이는 건 아직 없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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