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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태국] 1600년경 조선 쑥밭일 때 日, 태국 진출해 정착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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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56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5.11.12 08:48:34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4일차 (캄보디아 시엠립 → 방콕 경유 → 태국 아유타야)

어수선한 캄보디아-태국 육로 이동

아침 8시 30분 태국 국경으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시엠립을 떠난다. 버스는 언덕이라고는 전혀 없는 들판을 서쪽으로 곧장 3시간 30분 달려 국경 도시 포이펫(Poipet)에 도착했다. 140km…. 멀지 않은 길이다. 요즘은 시엠립에서 국경까지 국도가 포장돼 그나마 나아졌으나 한두 해 전까지만 해도 먼지 날리거나 비 오는 날에는 진흙 구덩이로 변하는 험한 길이었다고 하니 덜컹거리지 않고 와준 것만으로도 고맙다.

캄보디아 출경 수속을 위한 줄이 길다. 얼마인지는 모르겠으나 급행료를 지불하면 신속히 출국 수속을 해준다고 한다. 이것이 전형적인 후진국 시스템이자 공무원 부정부패의 시작이니 안타깝다. 캄보디아 출경 사무소와 태국 입경 사무소 사이 중립 지대엔 카지노가 여러 개 들어서 있다. 그리고 더러운 개천이 하나 있어 두 나라의 경계를 이룬다. 참으로 어수선한 국경이다. 태국 입경 줄도 길다. 태국 입경을 완료하니 캄보디아 출경 수속을 시작한 지 두 시간 가까이 지난 오후 2시 10분이다.

많은 여행자가 얘기했듯 캄보디아 → 태국, 혹은 태국 → 캄보디아 어느 방향이든 관계없이 두 나라 국경을 육로로 이동하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 항공 루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엠립-방콕 구간은 방콕 에어웨이가 독점 운행하며 매우 비싼 요금을 받는다. 육로 이동이 힘들고 성가시다는 것을 잘 아는 항공사의 상술이다. 비싼 항공기를 탈 수 없는 여행객에겐 육로 이동이 유일한 방법이다.

▲일본 정부가 공을 들여 일본식 정원으로 가꾼 일본인 정착촌. 태국 푸미폰 국왕 80세 생신을 맞아 정원을 조성했다는 기념비가 서 있다. 사진 = 김현주

태국 국경 도시 아라냐프라텟(Aranyapra thet, 현지인은 줄여서 Aran이라고 부름)은 여전히 어수선하지만 건너편에 비하면 정돈된 상태다. 제3세계에서 제2세계로 들어왔음을 실감한다. 새콤달콤한 냄새를 풍기는 태국 음식이 시장기를 자극하지만 마침 방콕 모칫(Mochit) 버스 터미널행 밴이 출발한다. 숨 돌릴 겨를 없이 마지막 한 자리에 올라타니 오후 2시 20분이다(국경에서 방콕까지 밴 요금 180바트, 한화 7000원). 

방콕행 토요타 밴

승객을 가득 채운 토요타 밴은 빠른 속도로 300km 가까운 먼 길을 달린다. 태국 땅에 들어오니 지형은 변한 것이 없으나 효율적인 토지 이용과 관리로 사방이 훨씬 푸르다. 잘 가꿔진 태국의 농지가 캄보디아의 메마른 농지와 대조를 이룬다. 국가의 부는 이런 부분에서까지 차이가 나는 것일까?

국경을 떠난 밴은 두세 차례 검문소를 통과한다. 검문소에선 여권과 신분증을 엄격하게 검사한다. 태국 불법 입국자가 많다는 것 말고도 아직 캄보디아 쪽 정정이 완전히 안정되지 않았음을 말해 준다. 근래 태국-캄보디아 국경 밀림에선 희귀종 삼림을 훼손하는 캄보디아 도벌꾼과 태국 군이 충돌해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등 정정이 불안한 나라와 육지로 국경을 접한 태국은 경계를 늦출 수 없을 것이다.

▲캄보디아에서 태국 육로로 이동하면서 국경 도시 포이펫의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육로 이동이 힘들고 성가시지만 항공기 이용료가 비싸 육로 이용 관광객이 많다. 사진 = 김현주

밴은 국경 출발 3시간 30분 만에 방콕 외곽까지 단숨에 달려 왔다. 그러나 악명 높은 방콕 교통체증에 갇혀 많은 시간을 길 위에 허비했다. 다행히 운전기사의 재치로 모칫 터미널까지 들어가지 않고 방콕 외곽에서 아유타야행 밴으로 바꿔 탈 수 있었다(40밧, 1400원). 밴은 40분 만에 아유타야(Ayutthaya)에 도착한다. 그동안 방콕은 두세 번 와봤지만 불과 한두 시간 북쪽 아유타야를 들르지 못해 늘 아쉬웠는데 드디어 오늘 기회가 생긴 것이다. 호텔에 체크인 하니 저녁 8시…. 

오늘 거의 12시간 동안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고 국경을 건너 약 500km를 이동했다. 아유타야 리버사이드 호텔 부근에는 기차역이 있고 음식점이 즐비하다. 아무 집에나 들러 시켜 먹은 국수가 너무 맛있어 연달아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운다.


5일차 (태국 아유타야 → 라오스 비엔티안)

고도 아유타야

방콕에서 북쪽 76km 지점, 인구 5만 5000명의 도시 아유타야는 1350년 우통(U-Thong) 왕이 북쪽 롭부리(Lop Buri)에 창궐한 천연두를 피해 이곳에 도시를 건설한 이후 아유타야 왕조(혹은 Siam 왕국)의 수도로서 번성했고, 수코타이(Sukhotai) 왕조 때까지 수도로서 기능한다. 불탑과 거대 사원으로 상징되는 아유타야 유적은 이 도시의 과거 영화를 웅변한다.

17세기에 인구 30만, 18세기 중반에는 100만에 육박해 당대 세계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였던 아유타야는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폐허가 된다. 돌만 남기고 모든 것이 불타 버렸고 처참한 살육이 일어난다. 지금 아유타야 유적은 모두 불에 타지 않는 돌 구조물에 해당한다. ‘동방의 베니스’라고도 불릴 만큼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형성돼 번성했던 이 도시는 1991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여유롭게 호텔에서 나와 야유타야 기차역 앞에서 오토바이 택시를 대절했다. 역사가 오래 됐고 한때 규모가 컸던 도시였던 만큼 유적지가 흩어져 있어서 포르투갈 유적지(주거터)까지 꽤 오래 달린다. 아유타야 왕조는 무역을 중시했으나 외래인을 도시 내에 거주하지는 못하게 했다. 대신 강 건너 외곽에 터를 잡게 허락했으므로 포르투갈 정착촌을 방문하기 위해 지금 오토바이를 타고 멀리 도시 바깥으로 나가는 중이다.

인생과도 같은 국가의 운명

간혹 교통체증이 있지만 날쌘 오토바이 택시는 요리조리 자동차들을 헤치고 바람처럼 달린다. 400년 동안 시암과 수코타이 왕조의 수도였고 차오프라야 강을 통해 지금의 방콕, 그리고 남중국해로 연결되므로 일찍부터 동서양이 만난 곳이다. 당시 세계무대에서 활동한 포르투갈, 네덜란드, 영국, 자바, 중국, 아랍, 인도, 심지어 일본 상인까지 앞 다퉈 달려와 왕래하고 거주했다.

▲머리 없는 불상이 가득하다. 목 없는 불상들은 처절한 파괴의 역사를 증명한다. 사진 = 김현주

아유타야는 당시 유럽 지도에도 금빛 찬란한 왕궁과 범선으로 가득 찬 도시로 묘사된 곳이지만 1767년 버마의 침공으로 하루아침에 허무하게 멸망했다. 한편 당시 인도차이나를 호령했던 강국 버마(미얀마)는 현재 초라한 빈국으로 전락했으니 새삼 한 국가의 흥망 또한 인생처럼 덧없다.

강 서안(西岸)에 자리 잡은 포르투갈 정착촌은 1995년 고고학 발굴이 끝나면서 작은 하얀 도미니칸 교회와 함께 16세기 초 어느 한 때를 얘기해 준다. 교회 앞 바울상과 베드로상을 담은 작은 불교식 상자가 인상적이다. 1511년 이곳에 도착한 포르투갈인은 왕조로부터 정식으로 허가받고 교역에 종사해 왔지만 도시 멸망과 함께 정착촌도 폐쇄됐다.

불탑의 도시 아유타야

포르투갈 정착촌 바로 강 건너편에는 일본인 정착촌과 네덜란드 정착촌이 있지만 도강 수단(도선)이 없으니 시내로 다시 나와 먼 길을 돌아간다. 전원 풍경이 한가로운 들판을 가로질러 왓 차이왓타나람(Wat Chaiwatthanaram) 사원 앞을 지난다. 잘 보존된 불탑이 즐비한 사원을 카메라에 담으니 아주 멋진 풍경이 나온다. 체코 프라하를 ‘백탑(百塔)의 도시’라고 하지만 아유타야도 불탑수가 족히 수백은 돼 보인다. 도시 어디에서든 어느 방향으로도 보이는 크고 작은, 오래된 혹은 새로 지은 불탑이 멋진 스카이라인을 이룬다.

아유타야의 사무라이

일본인 정착촌은 일본 정부가 공을 들여 작은 일본식 정원으로 가꿨다. 공원 내엔 아유타야 역사학습센터 부속건물도 있어서 일본과 아유타야 왕조의 오랜 교역사를 정리해 준다. 1589년 류구(오키나와) 왕국 출신 첫 일본인이 왔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정식 교역이 이뤄졌다. 한때 시암 왕조 내정에도 간섭해 미움을 살 정도로 규모가 커진 일본 커뮤니티는 2000명 혹은 3000명 규모로 성장했다. 하지만 1633년 일본 본국 정부가 기독교를 막기 위해 쇄국 정책을 시행하면서 기독교도였던 이곳 일본인 정착자들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고 정착촌도 소멸했다.

▲시암 왕궁터는 주춧돌만 남아 허망한 모습을 보인다. 사진 = 김현주

일본인 정착촌

정착촌 공원 내엔 일본 각지에서 온 방문자의 기념식수가 있고 2007년 태국 푸미폰 국왕 80세 생신을 맞아 정원을 조성했다는 기념비가 서 있다. 마침 한 무리의 일본인 단체 관광객이 진지한 모습으로 답사에 나선다. 이처럼 일찍 바다로 나간 일본은 우리나라보다 훨씬 앞서서 서양식 근대화를 이뤘으니 이것 또한 역사의 가르침이다. 이곳과 근접한 네덜란드 정착촌은 이제 막 발굴 작업 중이다.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면서 일찌감치 해외 무역에 뛰어든 네덜란드인은 1608년 아유타야에 무역 사무소를 세웠고, 1630년 왕으로부터 정식 허가를 받아 차오프라야강 동안(東岸) 바로 이 자리에서 아유타야 왕조 멸망 시까지 활동했다. 유적지에는 네덜란드식 작은 2층 벽돌 건물이 복원됐다. 바로 옆엔 강을 왕래하는 옛날식 선박을 건조하고 수리하는 조선소가 옛날 그 모습, 그 방식으로 아직도 열심히 작업 중이다.

황성 옛터 시암 왕궁터

이어서 구 도시 중심으로 나와 왓 프라시산펫(Wat Phra Si Sanphet) 사원을 찾는다. 옆엔 거대한 청동 불상을 모신 사원이 있어서 방문자가 많다. 옛 왕궁터 초입에 있는 왓 프라시산펫 사원은 오로지 왕실 불교 행사만을 전담했던 곳이다. 이곳엔 340kg의 금을 녹여 입힌 16m짜리 거대 불상이 있었으나 버마 침략군들이 녹여버렸다고 한다. 태국식 스투파(stupa, 불탑)와 정연히 서 있는 사원 모습은 어디선가 사진으로도 본 익숙한 풍경이다. 아직 남아 있는 돌기둥들은 사원의 원래 규모를 짐작하게 할 만큼 방대하다. 왕궁터는 주춧돌만 남아 허망하다. 여기가 바로 황성 옛터 아닌가? 세계 어디든 고도(古都)에 가면 그렇듯 묘한 여수(旅愁)가 피어오른다. 

왓 마하탓의 불탑들

바깥 거리에 나오니 코끼리들이 관광객을 태우고 거리를 오간다. 열대 지방 관광지다운 풍경이다. 덩치도 놀랍지만 느리게 걷는 것 같아도 상당히 빠른 속도에 놀란다. 과거 고대 전투에서 코끼리 부대가 기갑부대(탱크 부대) 역할을 했음이 당연하다. 주말 거리 장터를 지나니 왓 마하탓(Wat Mahathat)이다. 버마 군대의 파괴를 모면한 불탑들이 기울어진 모습으로 수백 년 세월을 견디고 있다. 목 없는 불상들은 처절한 파괴의 역사를 증명해 준다. 이곳엔 부처의 머리를 감싼 기이한 나무가 있어서 많은 관광객의 눈길이 머문다. 

허망한 고도(古都)

방빠인(Bang Pain)에 있는 아유타야 왕조 여름 별장을 오후에 방문하려고 시간을 남겨 뒀으나 이른 오후에 관람이 모두 끝난다고 한다. 이미 늦었다. 어쩔 수 없이 저녁 8시에 출발하는 태국 북부 라오스 국경도시 농카이(Nong Khai)행 열차를 지루하게 기다린다. 캄보디아에서 라오스 육로 이동을 위해 하룻밤 머물다 간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들른 아유타야에서 많은 것을 얻고 떠난다. 한 왕조, 한 국가의 운명이 이렇게 덧없는데 인간의 그것은 얼마나 더 허망한 것일까 곱씹으며 기차역으로 향한다.

▲기울고 부서진 불탑들의 모습. 한때는 화려했을 한 왕조, 한 국가의 운명이 덧없다고 느껴져 허망하다. 사진 = 김현주

태국-라오스 국경행 야간열차

기차역에서 한국 젊은이들을 만났다. 태국 치앙마이로 열차 이동 후 느린 페리를 타고 메콩강을 남하해 라오스 루앙프라방으로 가는 길이라고 한다. 먼 여행지에서 한국 젊은이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예전에는 일본 젊은이들이 배낭을 메고 전 세계를 누볐지만 이젠 그 자리를 한국 젊은이들이 차지했다. 그들이 전 세계를 다니면서 쌓는 문화적 경험과 지리 지식은 우리나라의 자산이고 국력이다.

아유타야에서 북동쪽 농카이(Nong Khai)까지는 570km. 열차는 디젤 전동차라서 객실 하부에서 올라오는 엔진 소리가 요란하다. 게다가 태국 철도 폭은 표준 궤도를 사용하는 우리나라 철도보다 좁고 객실도 따라서 좁다. 에어컨이 밤새도록 돌아가니 새벽녘에는 추울 지경이다. 열차 승무원이 커다란 수건을 한 장씩 나줘 준 이유를 알았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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