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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피지] 가난해 행복한 얼굴들이 가슴 씻어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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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66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1.21 09:01:50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3일차 (수바 → 난디) 

킹스로드 vs 퀸스로드

월요일이라서 도시가 매우 분주하다. 오전 10시 버스로 수바를 떠난다. 어제 저녁 빨아서 널어놓은 양말이 여전히 축축한 것을 보니 습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간다. 피지 섬 동서 횡단 도로는 수바와 난디를 잇는 남쪽 해안길 퀸스로드(Queens Road)와, 수바와 라우토카(Lautoka)를 잇는 북쪽 해안길 킹스로드(Kings Road)가 있다. 버스는 퀸스로드를 따라 달린다. 눈 닿는 곳 어디든 아름답다. 멀리서 보면 파랗고 가까이서 보면 녹색인 바다, 전혀 사람의 발길이 닿은 적 없는 것 같은 해변에 자기 멋대로 자란 야자나무, 그리고 열대 우림과 높지 않은 산…. 온통 자연 뿐이다.

한가로운 사탕수수 밭

한 시간 후 버스는 퍼시픽 하버(Pacific Harbor)를 지난다. 은퇴 후 지내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평화로운 마을이다. 좀 더 달리니 시가토카(Sigatoka) 중간 정류장에 닿는다. 버스터미널과 맞붙은 시장은 연말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붐빈다. 비가 오락가락하는 사이 잠시 볕이 나니 무척 덥다. 섬의 서쪽으로 올수록 열대 우림이 사라지는 대신 초원과 사탕수수(sugar cane) 밭이 많아진다. 섬의 서북쪽 해안은 높은 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피지 가족이 해변에 피크닉 나왔다. 우리나라처럼 대가족이 움직인다. 사진=김현주

불라(Bula)! 난디

난디 외곽 항구 야적장은 외국에서 들여오는 각종 소비재와 내구재로 가득하다. 기술도 빈약하고 생산 기반도 별로 없는 피지는 거의 모든 것을 수입에 의존하다 보니 언제나 무역 적자라고 한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난디에 도착했다. 난디 중심가에서는 각 방송사가 연합해 진행하는 송년 공연 준비가 한창이다. 늘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이곳 기준으로는 오늘 밤 초대형 이벤트가 열리는 셈이다. 시민들은 더 좋은 자리를 잡으려고 벌써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다. 호텔을 찾아 들어가는 길에서는 눈빛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이 웃으며 “불라(Bula)” 하며 인사를 건넨다. 

▲여행 도중 만난 피지 남성들은 국가에 대한 자부심과 행복감이 대단했다. 주어진 행복에 만족하는 그들의 모습이 인상깊었다. 사진=김현주

난디의 제야(除夜)

지금 여행일지를 쓰는 시각 밤 11시 30분. 피지의 밤공기가 참 맑다. 게다가 오늘 오후 비까지 내려줬으니 이 땅의 모든 추한 것들이 씻겨 내려간 느낌이다. 이와 함께 지난 한 해, 각박한 세상을 사느라 내 마음 속에 쌓인 피로와 번민, 갈등과 미움도 모두 맑은 공기에 씻겨 나가기를 바란다. 막바지에 이른 공연 분위기가 창 너머로 들려온다. 성직자가 나와 시리아, 남수단, 말리 등 세계 각 분쟁 지역의 평화를 기원하는 기도를 열정적으로 올린다. 신년 메시지의 범지구적 스케일에 놀란다. 

세 시간 먼저 맞이한 새해

벌써 몇 십분 째 이어지는 기도에도 청중들은 하나도 흐트러짐 없이 진지하게 고개를 숙이며 동참한다. 곧이어 흥겨운 가스펠 합창이 울려 퍼지며 축제는 클라이맥스에 다다른다. 한국보다 세 시간 표준시가 앞선 곳에서 새해를 먼저 맞이했다. 한국의 가족, 그리고 전 세계 인류의 건강과 행복, 평화의 염원을 담아 새해 기도를 올리는 피지 난디에서의 제야(除夜)는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4일차 (난디)

난디의 새해 풍경

새소리와 함께 새해 첫 날을 맞는다. 더없이 푸른 남국의 새해 첫 하늘처럼 건강한 한 해가 펼쳐지기를 바라며 한국의 가족들에게 문자로 새해 첫 안부를 띄웠다. 오랜만에 편안한 휴식 속 아침을 맞는다. 오전 10시 호텔을 나오니 이미 아침 해가 뜨겁다.

난디 중심 도로 남쪽 끝에 위치한 힌두 사원을 먼저 찾아간다. 남태평양에서 가장 규모가 큰 힌두 사원은 이 지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인지 매우 화려하다. 많은 신자들이 새해맞이 기도를 드리러 방문 중이다. 가족마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담아 힌두 신께 봉양한다. 사원 주변 눈 닿는 곳은 모두 사탕수수 밭이다. 사람 키 높이의 몇 배가 되는 수수가 거대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사탕수수밭은 바다 다음으로 흔히 볼 수 있는 피지 풍경이다. 사진=김현주

부지런한 인도계 피지인

정초인데 난디 시내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열었다.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다. 피지 전역이 그렇듯 여기 또한 인도계가 상권을 장악하고 있다. 자본력과 해외 네트워크에 부지런함까지 갖춘 인도계 피지인을 원주민들이 당해내기 쉽지 않을 것이다. 시내 가게 중에는 헤어 스타일리스트가 유독 많다. 대개 중국인이나 한국인이 경영하는데 곱슬머리를 펴주는(deperm, relaxing perm) 기술이 뛰어나 인기라고 한다. 지금은 경쟁이 심해졌지만 초기에는 한국인들이 돈을 많이 벌었다고 한다.

남인도 같은 난디

수바와는 달리 난디의 거리는 압도적으로 인도계 피지인이 많다. 날씨로 보나 시민들 생김새로 보나 남인도 어디쯤 와 있는 것 같다. 시내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시내라고 해봐야 두세 블록이 전부지만 활기가 넘친다. 터미널 부근 위치 좋은 곳에 또 다른 힌두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서 있다. 열대 문양을 넣은 성당의 전면 장식이 단순하면서도 토속적이다.

▲피지 버스 안 풍경. 피지인의 다양한 얼굴을 본다. 피지는 시내 교통수단이 잘 갖춰져 있다. 사진=김현주

편리한 피지 시내버스

피지는 시내 교통수단이 잘 갖춰져 있다. 버스 중심으로 짜였고 버스가 닿지 않는 지역은 승합차가 담당하는 시스템이다. 에어컨이 나오는 중국산 현대식 버스도 가끔 있지만 대부분은 우람하게 생긴 피지산이다. 소리가 요란하지만 버스는 잘 달린다. 피지 시내버스는 창유리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비가 오면 말아 올렸던 천막을 내려 비를 피하도록 돼 있다. 

해변 가는 길

라우토카(Lautoka)행 시내버스를 타고 와일로아로아 해변(Wailoaloa Beach)으로 향한다. 오늘은 휴일이라서 해변 공원까지 들어가는 버스가 운행하지 않아 큰길에서 내려 한적한 시골길을 걸어서 들어간다. 북쪽으로는 슬리핑 자이언트(Sleeping Giant) 정원이 위치한 삼베토(Sabeto)산이 웅장하게 버티고 있고 좌우로는 갈대밭, 그리고 앞으로는 야자 숲 너머 바다가 넘실거린다. 열대에서만 볼 수 있는 풍경에 취해 작열하는 태양이 성가신 줄 모르고 걷다 보니 금세 피부가 구릿빛으로 변한다. 15분쯤 걸었을까? 드디어 해변이다. 

행복한 피지인

정월 초하루 휴일을 맞은 많은 시민들이 야자 숲 아래에서 해변을 즐긴다. 마침 현지인 한 사람이 반갑게 나를 부른다. 어제 저녁 터미널에서 시내버스로 여기 오는 방법을 세세히 알려준 버스 기사다. 여기 웬일이냐고 물으니 시민들이 대절한 버스를 운전하고 왔다고 한다. 야자수 그늘 아래 얌전히 세워둔 버스에 따라 오르니 이것저것 마실 것과 먹을 것을 권한다. 한국에서 나의 직업, 한국이라는 나라, 내 여행의 목적 등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삶은 팍팍하지만 피지인으로 피지에 사는 것에 자부심과 행복감이 대단하다. 주어진 행복에 만족하지 못하고 언제나 남과 비교해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더 높은 것만 바라보며 사는 우리네 삶의 방식에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낀다.

▲난디 시내에서 새해맞이 공연이 한창이다. 한국에서 새해를 맞을 때 보신각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듣는 것과는 다른, 색다른 풍경이다. 사진=김현주

남태평양에 발 담그다

바닷가에서는 아이들이 물장난에 열중이고 백사장에서는 젊은이들이 배구와 럭비를 즐긴다. 그렇다. 럭비는 피지의 국민 스포츠 아닌가! 드디어 나도 남태평양에 발 담그는 세리모니를 거행한다. 멀리서는 파랗게만 보였던 바닷물이 가까이 와보니 묘한 녹색을 띠고 있다. 바닷물이 따뜻하다. 세계 여행을 하면서 오대양 육대주의 바다를 만날 때마다 세리모니를 해왔다. 남반구 남태평양 세리모니는 감격할 만한 이유가 충분히 많다. 여기 피지 시민들의 소박한 삶이 펼쳐지는 바로 그 공간에 나도 함께 있었다는 것 또한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고부가가치 관광산업 키우고 싶은 피지

아쉽지만 해변을 벗어나 큰길로 다시 나와 시내행 버스에 오른다. 터미널에서 마침 떠나는 데나라우 섬(Denarau Island)행 버스에 올라탄다. 선착장에서 페리를 타면 삽시간에 닿는 건너편 섬들이 코앞에 보인다. 방금 다녀온 와일로아로아 해변이 서민들 차지라면, 현지인보다 백인이 훨씬 많은 여기는 전혀 다른 세계다. 세계적인 고급 호텔 체인들이 모두 리조트를 갖고 있고 섬 곳곳에는 개인 선착장과 요트를 갖춘 초호화 휴양 주택들이 즐비하다.

호주나 미국의 부유층을 겨냥한 콘도미니엄 분양 광고가 곳곳에 붙어 있다. 콘도 한 동에 30만 호주달러(한화 약 3억 3000만 원)로 결코 저렴하지 않다. 그러나 물가 비싼 호주에서 항공기로 세 시간 거리에 있는 휴양지 피지는 아주 훌륭한 피서, 피한지가 되기에 손색없을 것이다. 많은 백인 휴양객들이 눈에 띄는 이곳은 피지의 새로운 고부가가치 관광산업의 상징처럼 보인다. 우리나라 제주도의 고급 콘도들이 중국 부자들에게 인기 높은 것도 같은 이치다.

▲난디 시내의 힌두사원. 인도계 피지인은 대부분 힌두교를 믿는다. 사진=김현주

피지에서 해야 할 40가지?

하루 종일 태양이 뜨거우니 웬만큼 걸으면 곧장 땀이 물 흐르듯 떨어진다. 다시 시내로 돌아오니 오전에 번잡했던 거리가 모두 철시하고 가게 한두 곳만 열려 있다. 저녁 식사가 염려돼 패스트푸드와 마실 것을 사서 호텔로 테이크아웃 하니 일단은 안심이다.

피지 난디 탐방이 끝났다. 여행안내 정보를 보면 피지에서 해야 할 40가지가 제시돼 있는데 따져 보니 나는 열 가지도 못한 것 같다. 시간과 예산, 교통수단이 각박한 솔로 여행자의 한계로 받아들이고 차분히 앉아 피지에서의 사흘 동안 만났던 여러 피지인 얼굴을 떠올려 보는 것으로 여행 기록을 마감한다.

하루 종일 무덥던 날씨가 저녁이 되니 예외 없이 스콜(squall: 열대 지방에서 대류 영향으로 내리는 세찬 소나기)을 뿌린다. 피지가 신선함을 유지하는 한 방법일 것이다. 머나먼 남쪽 끝 태평양 한 가운데에 이렇게 역동적인 문화가 존재하고, 가난하지만 우리보다 훨씬 행복한 얼굴을 한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피지 여행은 나에게 크나큰 지적, 정서적 자극이 됐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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