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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동티모르] 전략요충이라 피많이 흘린 반쪽 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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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75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3.24 08:52:45

CNB저널, CNBJOURNAL, 씨앤비저널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5일차 (호주 다윈 → 동티모르 딜리)

동티모르 딜리행 항공기

이젠 이번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 동티모르 하나만 남겨놓고 있다. 새벽 6시 30분 출발 에어 노스(Air North) 항공기 탑승을 위해 새벽 3시에 잠을 깼다. 공항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로버트 타일러(Robert Tyler)라는 호주 중년 신사를 만났다. 동티모르에 간다고 했더니 자기도 그곳에 간다고 반가워한다.

호주 브리즈번 대학 직원으로 은퇴해 동티모르에 개인 자격으로 자원봉사 하러 간다고 한다. 딜리 인스티튜트 오브 테크놀로지(Dili Institute of Technology)에서 티모르 학생들 상담을 해주는 심리 전문가가 그의 역할이다. 딜리행 항공기 탑승을 위해 어제 브리즈번에서 날아와 다윈(Darwin)에서 하룻밤을 묵었다고 한다.

소순다 열도

에어 노스 중소형 제트 여객기는 다윈 출발 한 시간 20분 후 티모르 섬 중앙의 높은 산을 넘어 북쪽 해안에 접근한다. 티모르 섬은 소순다열도(Lesser Sunda Islands)의 동쪽 끝에 위치했다는 이유로, 말레이 인도네시아어로 동쪽을 의미하는 티무르(Timur)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참고로, 대순다열도(Greater Sunda Islands)는 수마트라 섬, 자바 섬, 발리 섬, 롬복 섬으로 이어지는 큰 섬들을 일컫는 것으로, 소순다열도 북쪽에 동서로 뻗어 있다.

▲동티모르로 향하는 비행기. 비행기 아래 풍경이 벌써부터 어서 오라고 반기는 것 같다. 사진 = 김현주

딜리행 항공 요금

해안을 따라 가지런히 펼쳐진 딜리 시가를 내려다보며 항공기는 딜리 공항에 닿는다. 딜리 시 서쪽 해안에 자리 잡은 딜리 국제공항은 소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래도 여기서 호주 다윈으로 주 5~6회, 인도네시아 발리로 매일, 싱가포르로 주 3회 항공기들이 다닌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항공 요금이 매우 비싸다. 관광객이 아직 들어오지 않는 동티모르의 출입국자는 대개 회사나 공공 경비로 여행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일 것이다. 반환불가 프로모션 상품으로 몇 달 전에 구입했음에도 호주 다윈에서 딜리까지 1시간 30분 가까운 거리 에어 노스 편도 표를 235 호주 달러(한화 약 26만 원)에 구입해야 했다. 울며 겨자 먹기다. 

▲티모르의 교통수단. 사람들이 차량을 오르내리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사진 = 김현주

동티모르 역사

도착 비자(VOA, Visa on Arrival) 비용 30달러를 치른 것 이외에는 입국 절차가 매우 간단하다. 동티모르는 티모르 섬, 그것도 동쪽 반 토막에 우리나라 강원도만한 면적에 불과하고, 산악 70%가 넘는 척박한 땅이지만, 역사의 각축장이 됐던 곳이다. 태평양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위치에 있다는 지정학적 조건이 바로 그 이유였을 것이다.

일찌감치 1524년 포르투갈의 식민지가 돼 1975년까지 무려 451년 동안 통치를 받았다. 2차 대전 중 일본은 동티모르가 호주 침공을 위한 전략적 가치가 높다고 판단해 2만 명의 군대를 상륙시켜 1942~1945년 3년 7개월간 점령했다. 포르투갈 식민지 시절에도 또 다른 사연이 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와 지배한 네덜란드는 티모르를 탐내 포르투갈을 압박한 끝에 19세기말 티모르 섬의 서쪽 반을 빼앗아 간다. 바로 이런 역사적 사실과 함께 1975년에는 포르투갈이 오랜 식민 통치를 끝내고(정확히는 동티모르에 대한 식민 지배를 포기하고) 떠나자 재빨리 인도네시아가 들어와 44년간 통치한다. 

미국과 호주의 묵인

인도네시아는 1975년 동티모르가 독립을 선언한 지 열흘 만에 티모르 주민 6만 명을 학살하며 동티모르를 침공, 점령해 인도네시아의 27번째 주로 편입했다. 동티모르가 독립과 함께 급속히 좌경화하는 것을 염려한 미국과 호주는 인도네시아 수하르토 반공 정권의 동티모르 점령을 묵인한 셈이 됐다. 태평양에서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중요한 해상 및 잠수함 루트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던 미국으로서는 그럴 만한 이유는 있었던 것이다. 

▲티모르인의 다양한 얼굴을 마주했다. 티모르는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 인구는 18만이지만 폴리네시아, 멜라네시나, 포르투갈 혼혈까지 생김새는 참으로 다양하다. 사진 = 김현주

인도네시아의 강점

그러나 티모르의 더 큰 비극은 인도네시아의 강점으로부터 시작된다. 사실 포르투갈이 451년간 식민통치했다고는 하지만, 경제적 가치가 없는 동티모르에 포르투갈은 관심을 두지 않았고 특별한 투자도 하지 않은 매우 느슨한 통치였다. 그에 비하면 인도네시아는 티모르에 많은 투자를 했지만 명분이 정당하지 않았던 강제 점령은 티모르인들의 저항을 낳았다. 또 저항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인도네시아는 티모르인의 인권을 탄압하는 철권통치로 응수하며 국제 사회의 비난을 자초했다.

신생 독립국 동티모르

인도네시아로부터의 독립을 묻는 1999년 주민투표 결과 78%의 높은 지지로 독립이 결정되자 티모르 독립을 원치 않던 친인도네시아 민병대(militia)의 무자비한 살상과 약탈, 방화로 국토는 파괴되고 수십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티모르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이후 인도네시아는 1999년 11월 1일 완전 철수하고 호주 군을 주축으로 한 UN 다국적 군이 치안을 장악한다.

우리나라도 이때 호주와 UN 사무총장의 요청에 따라 UN 안보리 다국적 군의 일원으로 1999~2003년 430명 규모의 상록수 부대를 동티모르 제2 도시인 동남쪽 로스팔로스(Los Palos)에 파병했다. UN의 지원과 독립정부 출범으로 이어지는 숨 가쁜 일정 끝에 동티모르는 2002년 5월 20일 국명을 티모르레스테(Timor Leste)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정하고 독립을 선포했다. 독립 축하 행사에는 코피 아난 당시 UN 사무총장, 빌 클린턴 미국 전(前) 대통령, 메가와티 인도네시아 대통령도 참석했다. 

▲동티모르 도시 탐방 중 처녀 마리아상을 발견했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도시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마리아상을 보면서 독실한 가톨릭 국가임을 확인한다. 사진 = 김현주

독립 이후 혼란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독립 선언 이후 UN과 국제 사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순항하는가 싶더니 새로운 정부에 대한 국민의 불만은 2002년 폭동, 2005년 가톨릭계 시위, 2006년 해고 군인 시위, 2006년 무장 탈영병 난동 등 통제 불능의 사태로 이어졌다. 이에 동티모르는 국제 사회에 치안 유지군 파병을 요청했고, 호주 군을 주축으로 국제 지원군이 들어와 치안을 관리했다. 국제 지원군은 임무를 완수하고 대부분 떠났지만 호주는 아직도 동티모르에 650명의 국제 안정 군을 상주시키며 국방 및 경찰력을 지원하고 있다.

작지만 참으로 사연 많은 동티모르이기에 약간은 긴장하며 발을 디뎠으나 도시는 평온하다. 이 순박한 사람들에게 식민 통치와 내전, 독립, 그리고 혼란으로 이어진 역사는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공항에서 호텔은 가깝지 않은 거리다. 많은 외국인 방문자들의 수요 때문에 결코 호텔비가 싸지 않은 딜리에서 1박에 35달러, 나름대로 저렴한 요금을 찾아 예약해 놓은 트로피컬 호텔(Tropical Hotel)의 객실은 의외로 깨끗하고 시설이 좋다.

인구의 91%가 가톨릭

곧 도시 탐방에 나선다. 한두 블록 바닷가 쪽으로 나가니 해안을 따라 딜리를 동서로 잇는 중심 도로를 만나는 위치 좋은 곳에 처녀 마리아상이 나타난다. 1954년에 처녀 마리아(Virgin Mary)가 발현한 것으로 돼 있으나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전쟁으로 파괴됐던 도시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마리아상을 보면서 이 나라는 독실한 가톨릭 국가임을 확인한다. 포르투갈이 수백 년 통치하면서 남긴 것은 오로지 가톨릭뿐이다. 그래도 가톨릭은 인도네시아 지배를 벗어나 동티모르가 독립하는 데 정신적 구심점 역할을 했다. 동티모르 인구의 91%가 가톨릭이다.

▲국제시민공원은 2002년 5월 독립기념일에 맞춰 조성됐다. 동티모르 독립에 도움을 준 평화 유지군, UN 봉사자 등 국제 사회에 바치는 감사비를 볼 수 있다. 사진=김현주

티모르인의 다양한 용모

우리나라 강원도 크기, 인구 100만 추산, 딜리시 인구는 18만이지만 사람들 생김새는 참으로 다양하다. 폴리네시아 계열, 멜라네시아 계열, 포르투갈 혼혈, 아주 드물게는 중국계, 그리고 UN과 각종 국제단체와 관련해 이 도시에 상주하는 많은 외국인들까지…. 어쨌거나 국제도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한다. 

플로레스해를 만나다

Lago de Lecidere 해안에 새로 꾸며진 공원에 앉아 사방을 둘러본다. 남쪽으로는 높은 산, 북쪽으로는 해안을 따라 딜리 항구가 펼쳐진다. 항만 건너로는 멀리 아타우로(Atauro) 섬의 높고 낮은 산들이 확연히 보인다. 티모르와 호주 사이, 즉 티모르 섬 남쪽 바다를 티모르 씨(Timor Sea)라고 부르는 반면, 티모르 섬 북쪽의 바다는 플로레스(Flores)해다. 

탁 트인 대양에는 화물선들이 드문드문 떠 있다. 딜리와 인도네시아 수라바야, 호주 다윈, 그리고 싱가포르 사이에 열린 뱃길을 오가는 선박들이다. 해변에는 국제시민공원(International People’s Park)이 조성됐다. 동티모르 독립에 도움을 준 평화 유지군, UN 봉사자 등 국제 사회에 바치는 감사비다. 그들의 도움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도 새겨진 감사비는 2002년 5월 20일 독립 선포일에 맞춰 건립됐다.

▲플로레스해 원시 해변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꽉 막힌 가슴이 시원해지는 기분이다. 사진=김현주

통신 두절 2박 3일

잘 꾸며진 해변공원에는 청춘 남녀들이 짝을 이뤘다. 저마다 노트북을 펼쳐 놓고 무언가를 열심히 검색하기에 혹시 와이파이라도 될까 싶어서 휴대폰을 꺼내 보지만 딜리 공항 도착 이후 계속해서 먹통이다. 한국 통신회사와 티모르 통신회사 간에 로밍 계약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앞으로 이틀 반, 티모르를 떠날 때까지 졸지에 외부 세계와 연락 두절 상태가 돼버린 것이다. 

독립 이후 성장에 박차를 가해도 모자랄 판에 폭동과 정치적 혼란으로 오히려 몇 년을 뒷걸음질했으니 언제 인프라를 구축할 시간이 있었겠는가? 조금만 큰 길을 벗어나면 하수구에서 악취가 풍기고 기습 호우로 팬 도로는 웅덩이가 돼 차들이 피해 다니느라 곡예를 한다. 하지만 보수할 엄두를 못 낸다.

1945년 대한민국

참으로 할 일 많고 갈 길 먼 나라다. 멀리 볼 것도 없다. 대한민국을 생각해 본다. 1945년 해방, 1948년 건국, 그리고 1950년 한국전으로 이어지는 근대 역사가 지금 동티모르 모습과 많이 닮았다. 해방 후 폭동, 암살, 정치적-사회적 혼란에 이어 국가 성립 2년 만에 동족상잔의 크나큰 아픔까지 겪었다. 그런 나라가 세계의 대국으로 성장했으니 동티모르 딜리 시내의 이곳저곳을 다니는 동안 65년 전 초라한 신생국 대한민국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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