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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발칸 반도] 고단하지만 활력 넘치는 몬테네그로와 알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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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3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5.16 09:22:02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5일차 (두브로브니크 → 몬테네그로 경유→ 슈코드라, 알바니아)

아드리아해의 진주를 떠나 몬테네그로로

아드리아해의 찬란한 아침바다를 보며 두브로브니크를 떠난다. 버스터미널은 언제나 혼잡하다. 철도가 없는 이 도시에서 버스는 가장 중요한 대중교통 수단임에도 터미널 시설은 불량하다. 높은 산허리를 자르고 뚫은 도로에서 도시를 내려다본다. 해안을 가파르게 깎으며 내리 꽂은 메마른 산은 지중해성 기후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 

아드리아해의 진주, 아니 차라리 ‘아드리아해의 기적’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은 도시를 떠난다. 산이 험하고 도로가 좁은 발칸에서 버스기사들의 운전 솜씨는 일품이다. 이탈리아 남부 아말피(Amalfi)와 소렌토(Sorento) 구간 산악 절벽도로에 버금가는 험준한 길이 계속 이어지더니 버스는 두브로브니크를 떠난 지 40분 만에 몬테네그로 국경에 도착했다. 

발칸의 초미니 국가

몬테네그로는 인구 68만 명, 남한의 15% 면적을 가진 발칸의 소국 중의 소국이다. 발칸  국가들이 유고연방 해체 이후 모두 독립했지만 연방에 남아 있다가 2006년에 가서야 세르비아에서 분리, 독립했다. 소국이지만 투쟁과 저항, 독립의 역사를 가진 나라로 오토만제국, 1차 유고연방, 2차 대전 중 이탈리아의 합병, 2차 유고연방의 복잡한 과정을 거쳤고 1992~1995년 발칸 전쟁 중에는 세르비아와 한 편이 돼 두브로브니크를 침공하기도 했다. 몬테네그로, 즉 검은 산(black mountain)이라는 나라 이름이 말해 주듯 험준한 내륙 산악과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는 이 나라에는 해발 2000m에 가까운 산이 여럿 있다.

바다에 바짝 붙어있는 산이 멋진 풍경을 연출하는 몬테네그로 해안은 갈수록 관광지로 각광받는다고 한다. 몬테네그로의 해안선은 총 259km로 백사장이 72km이고 드문드문 도시와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도시마다 올드타운이 있고 뒤로는 검은 산들이 솟아 있으니, 마치 산들이 두 손을 펴 모아 바닷물을 담아주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아 그냥 지나치는 나를 탓한다.

▲티라나의 중심인 스칸데르베그 광장의 풍경. 가난한 삶이지만 도시는 활기가 가득하다. 사진 = 김현주

버스는 가장 먼저 헤르체그노비(Herceg Novi)를 지난다. 코토르만(Kotor Bay) 초입에 있는 도시로서 한때 베네치아 왕국에 속하기도 하면서 온갖 역사의 풍상을 겪었지만, 지금은 조용한 어촌이다. 호젓하고 한적한 것이 번잡하고 물가 비싼 두브로브니크의 대체 휴양지가 될 것 같기도 하다. 전쟁 중에는 보스니아 난민 캠프도 있었다고 한다.

격이 높은 양 깔끔 떠는 것 같은 크로아티아와 비교하면 몬테네그로는 다르다. 거리에는 시민들이 수시로 오가고 젊은이들의 떠드는 소리가 넘친다. 어디서 유행이 몰려들었는지 바닷가 언덕 풍치 좋은 곳에는 반드시 저택과 콘도, 아파트 및 리조트 건축이 한창이다. 아직 정돈되지 않았으나 뭔가 나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생동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발칸의 피요르드, 몬테네그로 해안

버스는 좁고 깊숙이 패인 만(灣)을 돌기 시작하더니 곧 코토르(Kotor)에 진입한다. 엄밀히 따지면 피오르드 지형은 아니지만 혹자들은 유럽 동남부 피요르드라고도 부른다. 작지만 자존심이 강해서 올드타운 입구에는 ‘남의 것을 원치 않는다. 그러나 우리 것에 대해서는 결코 항복하지 않는다’는 문구가 자랑스럽게 걸려 있을 정도다. 코토르 요새는 중세 베네치아 양식으로 지어졌고 건축물 또한 그렇다. 오늘 코토르에서는 마침 축제가 열려 작은 도시는 차량과 인파로 몸살을 앓는다.

▲풍광이 맑고 아름다운 몬테네그로 아드리아 해안이 내려다보인다. 사진 = 김현주

바르(Bar)를 거쳐 백사장이 멋진 부드바(Budva)를 지나 버스는 두브로브니크 출발 5시간 만에 울친(Ulcinj)에 닿는다. 우리나라 경북 울진과 발음이 거의 비슷하다. 인구 1만 명이 조금 넘는 울친은 알바니아 국경과 가까운 만큼 주민 대부분은(71%)은 알바니아 계열이다. 청동기시대 이후로 인간이 거주해 왔고 로마제국, 비잔틴제국, 베네치아왕국, 오토만제국 등으로 주인이 수없이 바뀐 도시다. 

울친에서는 15세기 지중해 건너 아프리카 리비아 트리폴리를 통해 흑인 노예무역도 이뤄졌다고 한다. 레판토(Lepanto) 해전에서 부상을 입은 후 해적에게 붙잡힌 소설 ‘돈키호테(Don Quixote)’의 저자 세르반테스(Cervantes)도 여기 잠시 갇혔었다고 한다.

변방 중의 변방 알바니아 입경

곧이어 알바니아 스코다르(Shkodra)행 버스에 오른다. 유럽의 가장 변방으로 가는 길은 우리나라 농로를 넘지 않은 수준으로 불량하니 낙후한 발칸 남부의 현실을 말해 준다. 알바니아의 1인당 국민소득은 4600달러(2015, 월드 뱅크) 수준으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와 비슷하다. 드디어 알바니아 입경이다. 우마차, 경운기, 소를 모는 소년…. 영화에서나 봤던 유럽 변두리 시골 풍경을 실컷 보는 사이 버스는 울친을 떠난 지 한 시간 남짓 걸려 알바니아 서북부의 주요 거점도시 스코다르에 도착했다.

▲‘검은 산’이라는 나라 이름 그대로, 몬테네그로에는 검은 산들이 솟아 있다. 험준한 내륙 산악과 해안 절벽으로 이어지는 이 나라에는 2000m에 가까운 산이 여럿 있다. 사진 = 김현주

그렇게 도착한 스코다르에도 건축 붐이 뜨겁다. 잘 차려입은 늘씬한 아가씨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곳이다. 신시가지는 반듯하지만 구시가지에는 쓰러지기 직전으로 보이는 낡은 사회주의식 아파트도 많다. 평소 동양인을 만날 일이 없는 알바니아 지방도시에서는 이방인에 대한 호기심에 가득 찬 눈길을 건네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거리 풍경은 영락없이 북아프리카나 중동 어디쯤 되는 것 같지만 훤칠한 사람들 생김새로 보면 분명 여기는 유럽이다.

6일차 (슈코드라 → 티라나, 알바니아 → 오흐리드, 마케도니아)  

알바니아에 들어서며

알바니아는 로마제국 영토로 있다가 비잔틴제국, 불가리아제국, 세르비아제국을 거쳐 중세 이후에는 오토만제국에 복속된다. 이후 오토만제국의 쇠퇴로 1912년 독립을 이루지만 1939년 이탈리아 지배, 1943년 나치 지배를 거쳐 2차 대전 후 독립했으니 소국으로 겪을 것은 다 겪은 셈이다. 원래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알바니아인은 오토만제국 시절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이후 오토만의 발칸 지배를 위한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현재 이슬람 비율은 59%이다.

고립주의 공산통치

2차 대전 후에는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섰는데 그 중에서도 호자(Enber Hoxha)가 주도한 극단적 폐쇄, 고립주의 통치는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를 키웠다. 1945~1985년 40년간 통치한 호자는 토지무상 분배, 자급자족 농업 추진, 문맹 퇴치 등 국가발전에 기여하기도 했지만, 모든 종교 행위 금지는 물론이고 종교기관 재산 몰수, 심지어 성직자 처형 등 종교 탄압은 이슬람과 기독교를 가리지 않았다. 급기야 1967년에는 인류 최초로 무종교 국가를 선언하기에 이른다.

1991년 공산당이 해체되고 민주 정부가 섰지만 경제 위기와 무장혁명 등 민주화 과정의 혼란 때문에 수많은 알바니아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탈리아, 그리스, 서유럽과 북미 등으로 이민 길에 오를 수밖에 없었다. 1991년부터 2004년 사이 90만 명의 알바니아인이 해외로 이민을 떠났고, 그중 60만 명이 그리스에 정착했다.

▲슈코드라에서 만난 익살스런 꼬마가 귀여운 포즈를 취했다. 사진 = 김현주

특이한 나라 알바니아

알바니아는 여러모로 독특한 나라다. 언어, 인종적으로 독특해서 알바니아어는 남부 슬라브 계열 인도유럽어족의 일파이지만 주변 국가에서 사용하는 어느 언어와도 공통점이 없다고 한다. 고대 일리리아어에 기원을 둔 알바니아어는 라틴어, 그리스어, 이탈리아어, 슬라브어, 터키어, 페르시아어 등의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언어학적으로는 고립된 독립 언어로 분류되고 있다. 알바니아인은 용모 또한 특이하다. 체격이 작은 편이고 짙은 피부에 검은 머리 등 이번 여행 중 봐 왔던 다른 발칸 국가 국민과는 현저히 다른 모습을 보인다. 

알바니아 수도 티라나(Tirana)행 버스에 오른다. 우리나라 시골과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높게 자란 옥수수 밭, 경운기를 몰고 무작정 천천히 가는 노인, 우마차에 짚단을 산더미처럼 싣고 아슬아슬하게 끌고 가는 소년…. 냄새까지도 정겨운 풍경이다. 도시 문명의 짜증을 잠시 잊기에 그만이다. 인구 32만 명이 사는 티라나는 1920년 이후 이 나라의 수도이다. 영어를 아는 여대생의 도움을 받아 마케도니아행 버스표를 구입하는 곳으로 이동하니 곧 티라나 중심인 스칸데르베그(Skanderbeg) 광장이다.

▲오흐리드 가는 길. 알바니아와 마케도니아는 모두 산악국가다. 사진 = 김현주

수도 티라나 탐방

가난한 삶이지만 도시는 활기가 있다. 2000년 이후 티라나는 도시 개조 중이다. 불법 건축물을 철거하고 건물 외벽을 밝은 색으로 칠하고 공원, 광장 등 대중시설들을 미화하고 있다. 짓다가 돈이 떨어져서 중단한 건물도 더러 있지만 공산국가 수도라는 우중충한 이미지를 벗고 현대 유럽 도시로 변모하려는 몸부림이 역력하다. 한 번도 가난을 면해 본 적이 없는 이 나라가 앞으로 갈 길은 어디에 있는지 함께 답을 찾고 싶은 마음이다.

국립역사박물관에 들른다. 선사시대부터 현대까지 많은 전시물 중에서 유독 처절한 공산주의 통치자 호자 시절의 기록에 눈길이 간다. 영어 설명이 부족한 것은 큰 아쉬움이다. 광장 건너 에템베이(Et’hem Bey) 모스크와 시계탑 또한 티라나의 상징물이다. 크지는 않지만 알바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스크 중 하나로 꼽힌다.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콜로니얼식 베네치아 양식 건물들은 대부분 각종 정부청사로 쓰인다. 광장 뒤에 있는 정교회 교당 또한 볼거리로서 심플한 실내 장식이 오히려 단아하다. 

광장에서 남쪽으로 뻗은 멋진 거리는 파리 샹젤리제(Champs Elysees)를 흉내 낸 듯 하고 그 끝은 마더 테레사(Mother Theresa) 광장으로 이어진다. 테레사 성인은 알바니아계 마케도니아인으로서 알바니아와 이웃 마케도니아가 모두 연고를 주장한다.

▲티라나 거리에서 만난 중년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통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사진 = 김현주

고단한 삶을 엿보다

공원에서 휴식 중 어번이라는 중년을 만났다. 영어를 제법 하는 그는 사는 게 힘들다고 푸념한다. 발칸을 여행하면서 종종 들어온 이야기다. 2주일째 일을 구하지 못했다고 한다. 오늘 나에게 일일 관광 가이드라도 하면서 용돈벌이를 하고 싶은 눈치지만, 곧 마케도니아로 떠나야 하기에 그를 도와줄 수 없어서 미안하다. 대신 세상 어디든 사는 건 힘든 일이라는 의미 없는 말로 위로할 수밖에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광장을 활보하지만 이렇듯 대부분 나름대로 시련이 있어 보인다.

오후 4시, 마케도니아행 버스로 알바니아 티라나를 떠난다. 유럽 대륙 동남쪽 변방 귀퉁이에 붙어 있으나 언젠가 이 나라도 어깨 한 번 펴는 날이 오기를 기원해 본다. 버스는 트랜스발칸 하이웨이(Trans-Balkan Highway)를 달린다. 내륙국 마케도니아의 수도 스코페(Skopje)와 알바니아 아드리아 해안, 그리고 그 너머 그리스를 이어주는 발칸의 대동맥이다. 

하이웨이를 벗어나니 편도 2차선의 산악 도로가 시작된다. 버스는 산과 계곡으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그러나 험한 길을 네 시간 넘게 달려 마케도니아 국경에 닿았다. 산악 국가 알바니아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악 지역을 넘어온 것이다. 알바니아 출경과 마케도니아 입경을 위한 지루한 시간이 흐른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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