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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발칸 반도] 시달려도 예술 사랑하는 오, 아르메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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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87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6.13 09:42:56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14일차 (트빌리시, 조지아 → 알라베르디, 아르메니아)

아르메니아를 향해

오전 11시 트빌리시 중앙역 앞에서 아르메니아행 미니버스로 도시를 떠난다. 그저께 갔던 조지아 동북부 코카서스 산악지대와는 달리 남서쪽 아르메니아 국경 쪽은 낮은 구릉과 넓은 들이 펼쳐진다. 떠난 지 두 시간 후 국경에 닿는다. 짧은 며칠이었지만 정들었던 나라를 벗어나 또 다른 미지의 나라로 들어간다. 아직 살림살이가 각박하지만 독립과 자존심을 지켜온 명예로운 나라다. 손님에게 친절하고 정직한 조지아 사람들과 이별한다. 

국경 통과 절차는 매우 간단하다. 한국인에게 아르메니아는 비자를 요구하지만 출국 전 인터넷으로 간편하게 e-Visa를 발급받으니 입경에 아무 문제가 없다. 드디어 아르메니아 땅이다. 책에서만 읽었던 아득히 머나먼 곳에 내가 와 있다. 코카서스에서도 아르메니아는 민족적으로 동질성 높은 나라다(아르메니아인 비율 98%). 남한의 31%에 해당하는 면적에 324만 명이 살고 있고, 1인당 국민소득은 3500달러(2015년 월드 뱅크) 수준으로 아직 갈 길이 바쁘다. 

인류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

301년에는 로마제국보다 30년 앞서 인류 최초로 기독교를 공인한 나라다. 역사를 통해 짧은 독립과 긴 복속을 반복해 온 아르메니아는 두 대륙(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조건 때문에 아시리아(기원전 7세기), 그리스, 로마, 아랍(9세기), 비잔틴(11세기), 몽골(13세기), 페르시아, 오토만(16세기), 그리고 러시아(19세기) 등 숱한 강대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유의 언어와 종교, 역사를 지켜온 것은 차라리 놀라운 일이다. 

▲데베드 협곡 건너 도시 동쪽 산언덕에는 하그파트 수도원이 있다. 사진 = 김현주

고난의 역사

1918년 러시아의 1차 대전 승리로 오토만의 지배로부터 해방되는 듯했으나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복속된 후 스탈린 시대에도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처형 혹은 추방되는 등 시련은 끝이 없었다. 마침내 구소련이 해체돼 1991년 독립을 달성했으나 이후 경제 혼란과 이웃 아제르바이잔(Azerbaijan)과의 영토 갈등으로 인해 전쟁(1994)을 치렀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라 교전 중지, 즉 불완전한 휴전 상태일 뿐이다.

아르메니아 이주민

아르메니아인은 본국에 거주하는 324만 명보다 몇 배 많은 1000만 명 정도가 러시아, 프랑스, 이란, 미국, 조지아, 터키, 중동, 남미, 호주 등 세계 각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예루살렘 아르메니아 구역(Armenian Quarter)에도 1000여 명이 거주하고 있을 정도다. 

1915년 터키의 대학살 이후 수많은 아르메니아인이 해외로 이주했고, 이후에도 소비에트 해체와 그로 인한 혼란 등 역사의 굴곡마다 꾸준히 해외 이주가 이어진 결과다. 그래도 지금은 아르메니아 출신 해외 교포들이 송금과 본국 투자 등을 통해 모국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니 다행이다. 

▲여행 도중 만난 아르메니아의 중년 남성들. 아르메니아인은 피부색이 짙고 눈동자와 머리색도 대부분 짙다. 사진 = 김현주

약소국의 설움

오늘날 아르메니아는 이웃인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을 빼놓고는 세계 각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터키와는 1993년 이후 국경이 폐쇄됐고 아제르바이잔과도 국경 폐쇄 상태다. 그에 반해 이란과는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고, 멀리 있는 러시아와는 밀월 관계에 있다. 특히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정부의 요청으로 군대를 주둔시켜 터키를 견제하고 있을 정도다. 아르메니아는 자기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없는 약소국의 설움을 역사를 통해 짙도록 맛보고 있는 셈이다. 

아르메니아인의 용모

나라가 바뀌며 사람들의 용모가 확연히 달라진다. 금발과 푸른 눈에 피부가 흰 조지아인과 달리 아르메니아인은 피부색이 짙고 눈동자와 머리의 색도 대부분 짙다. 동과 서가 묘하게 섞인 것 같은 모습이다.

미니버스는 한 시간을 더 달려 알라베르디(Alaverdi)에 도착했다. 데베드(Debed) 협곡에서 가장 큰 도시라지만 인구는 1만 6000명 남짓이다. 아르메니아 북동부에 해당하는 이 지역은 소비에트 시절 구리 광산업으로 융성했지만 독립 이후 산업이 피폐해지면서 많은 인구가 떠났다. 도심에는 거대한 공장 구조물이 녹슨 채 흉물로 버려져 있다. 한때 번창했던 광산촌과 공업 도시의 모습은 사라지고 을씨년스런 산골 마을로 쇠락했지만 알라베르디를 둘러싼 산들은 장엄하다.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의 사나힌 수도원은 도시 외곽 산중턱에 있다. 유네스코 문화유적지이지만 관리가 잘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다. 사진 = 김현주

볼 것 많은 산골 마을

도시 외곽 산중턱에 자리 잡은 사나힌 수도원(Sanahin Monasteries)으로 향한다. 러시아제 볼가(Volga) 택시는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올라간다. 수도원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지만 관리가 잘되지 않아 잡초가 무성하고 무언가 의미를 담고 있을 것 같은 돌들이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다. 966년 건립한 이래 전혀 손대지 않은 채 처음 그대로의 모습으로 1000년 넘게 견뎌온 수도원의 모습이 비감해 보인다.

이번에는 데베드 협곡 건너 도시 동쪽 산언덕에 자리 잡은 하그파트(Haghpat) 수도원을 찾는다. 수도원 건물도 의미심장하지만 멀리 아래쪽으로 장엄하게 펼쳐지는 데베드 협곡 또한 장관이다. 깊고 깊은 산중에 자리 잡은 수도원에서 속세를 잊고 신앙심을 키웠을 수도사들의 체취가 느껴지는 듯하다.

▲데베드 협곡의 진귀한 경관. 볼 것 많은 산골마을이다. 사진 = 김현주

산중 마을의 여름밤 정취

오늘 숙소로 예약한 곳을 찾아가는 길에 만난 목동 할아버지가 반가운 인사를 건네며 포즈를 취한다. 수도원 아래 산중턱 마을에 자리 잡은 작은 호텔의 여주인은 깊은 산중 마을을 찾아온 동양인 여행자에 놀라기도 하면서 반가움에 온갖 친절을 베푼다.

주방에서는 호텔 투숙객들을 위한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이다. 양고기 굽는 냄새가 강렬한 식욕을 부른다. 아르메니아 가정식으로 포식했다. 소금에 절인 채소로 만든 각종 샐러드가 특이하다. 많은 해외 지역을 여행했지만 아르메니아하고도 알라베르디, 변방 중의 변방에 있는 작은 산골 마을에서 맞이하는 밤은 여러 해 묵은 세상사의 근심과 번민을 한꺼번에 털어내 주기에 충분할 만큼 깨끗하고 적막하다. 별들이 밤하늘을 가득 수놓으니 오랜만에 그윽한 여름밤의 정취를 맛본다.


15일차 (아르메니아 알라베르디 → 예레반)

예레반의 랜드마크, 오페라 하우스

알라베르디를 9시에 떠난 마슈르트카는 175km의 거리를 세 시간 남짓 달려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Yerevan)에 도착했다. 영어가 잘 병기돼 있어 다니기 편한 도시가 여행자를 맞이한다. 도시 중심에 있는 오페라하우스에서 도시 탐방을 시작한다. 오페라와 발레, 심포니 공연이 연중 열리는 오페라하우스는 아르메니아가 작은 나라라는 인식을 부정하는 거대한 구조물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심성을 말해 준다. 

▲예레반 리퍼블릭 광장에 있는 외무성.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석조 건축물들이 눈길을 끈다. 사진 = 김현주

오페라 하우스를 둘러싼 자유광장(Freedom Square)은 시민들의 만남의 장소이자 놀이 공간으로 하루 종일 북적거린다. 그곳에서 몇 블록 걸어 내려가니 곧 리퍼블릭 광장(Republic Square)이 나온다. 가운데에 노래하는 분수가 있고 사방으로 수상관저, 외무성, 국립박물관, 국립미술관, 매리어트호텔 등 네오클래식 양식의 우아하면서도 웅장한 석조 건축물들로 둘러싸여 있다. 예레반의 중심광장이다. 도시 곳곳이 건축 붐이다. 구소련 건축 양식의 결정체 같았던 오래된 건물들이 사라진 자리에 초현대식 빌딩이 속속 들어서면서 도시는 거듭나고 있다.

국립역사박물관에 들른다. 아르메니아 땅은 인류의 오랜 거주지임을 증명하듯 전시된 선사 유물이 다양하고 방대하다. 박물관 전시 내용 중 아르메니아 문자 발명에 대한 설명이 설득력있다. 서기 387년 아르메니아를 페르시아와 비잔틴이 각각 동서로 갈라서 통치함에 따라 아르메니아는 분리된 두 지역의 통합과 정체성 보존을 위해서 405년 고유의 문자를 발명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아르메니아 국립역사박물관. 박물관의 중심 주제는 1차 대전 중 일어난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사진 = 김현주

▲아르메니아의 수도 예레반의 중심엔 오페라하우스와 자유 광장이 있다. 오페라하우스는 예레반의 랜드마크다. 사진 = 김현주

아르메니아 대학살

국립역사박물관의 중심 주제는 단연 아르메니아 대학살이다. 1차 대전 중(1915년) 오토만제국과 러시아의 대립 와중에 러시아 편에 섰다는 이유로 오토만제국이 저지른 사건이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60만 명의 아르메니아인이 사라졌다고 추산했고, 다른 추산은 100만 이상을 헤아린다. 

당시 전쟁의 와중에 혼란스러웠던 유럽은 간섭하거나 관심을 기울일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이후 아르메니아는 학살이 일어났던 4월 24일을 ‘아르메니아 순교의 날’로 추념하고 있다. 한편 터키는 오늘날까지도 당시 아르메니아인의 대량 죽음은 내전 중 질병과 기근이 겹쳐서 일어난 것이라면서 터키 개입설을 부인하고 있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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