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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랑가] 80년 전 나치의 '퇴폐미술전' 서울에 재림?

아트 스페이스 풀, 한국의 '퇴폐미술' 공격하는 척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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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0호 윤하나⁄ 2016.07.01 17:41:10

▲'퇴폐미술전'의 전시 모습. 작품과 문구가 함께 전시됐다.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어떤 종류의 퇴폐미술은 아주 평범하고 익숙한 대상을 다루면서, 천 위로 서서히 비어져 나오는 얼룩처럼 영혼을 병들게 한다” “잉태와 출산을 전제로 하지 않는 헛된 자궁이 우리의 신성한 종족 보존의 욕구에 총질을 해댄다” “정상적 인간이 비정상에 오염되는 과정을 설정해놓고 반복을 통해 교묘하게 그 사실을 세뇌시킨다”.

 

위의 공격적 비난 문구들은 2016년의 퇴폐미술전을 기획한 안소현 큐레이터가 자신이 초대한 작가의 작품 옆에 함께 전시한 것들이다.

 

퇴폐미술전은 1937년 독일의 나치 정권이 뮌헨에서 개최한 두 전시 중 하나다. 당시 나치의 정신에 반하는 20세기 전위 미술들을 압수해 퇴폐미술이라 낙인찍고, 이를 비방하는 의미의 플래카드와 함께 독일 전역을 돌며 전시했다. 나치의 퇴폐미술전은 자신들의 기준에 반하는 것에 대한 검열과 불허를 뜻했다. , 예술의 불온함에 대한 철퇴였다. 당시 퇴폐미술로 낙인찍힌 작가들은 현재까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샤갈, 케테 콜비츠, 칸딘스키, 코코슈카, 뭉크, 피카소, 클레 등이었다.

 

그에 반해 아트스페이스 풀에서 열리는 퇴폐미술전은 사회를 비틀어 바라보는 작가들의 시선에 정면으로 도발적인 비난의 언어를 덧입히고, 우리 사회의 경직된 시선과 편견을 드러내고 모순을 건드릴 수 있도록 기획됐다.

 

▲정덕현, '낙서'. 130 x 130cm, 종이에 먹, 호분. 2015.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길들여지지 않은, 착하지 않은 퇴폐미술'

 

전시를 기획한 안소현 큐레이터는 1937년의 퇴폐미술전을 패러디해, 사회의 규범이나 통념과 결을 달리하며 사회의 경직성을 노출시킬 수 있는 작품들을 골랐다. 그리고 그 판단의 근거를 보여주는 비난의 글과 함께 퇴폐미술다운 방식으로 공간을 구성했다. 

 

권용주 작가는 국가기관이나 관변단체의 돌 기념비를 가벼운 스티로폼으로 모각(模刻)한다. ‘바르게 살자나 국정원의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등의 지나치게 단순하고 교훈적인 문구를 새긴 너무도 가벼운 조각이 전시장의 대들보 위에 올랐다. 그의 작품들은 이런 가벼움을 냉소적으로 희화화하는데, 기획자는 이 냉소가 바로 퇴폐적이라고 지적한다.

 

김웅현은 인터넷에서 수집한 송전탑 시위 영상을 모아 해상도를 떨어뜨려 게임 영상처럼 보이도록 했다. 밀양 송전탑 투쟁을 연상시키는 송전탑 반대 시위가 특히 동남아시아, 남미 등지의 개발도상국에서 활발히 일어나는 점을 발견한다. 원본 영상 속 송전탑은 여러 갈등과 비극을 안고 있지만 그의 영상에서는 스타크래프트 게임의 파일런(pylon)을 연상하게 만든다. 기획자는 그의 작품 속 무심함과 거리두기를 퇴폐적이라 정의하며 무정부주의자 게이머란 문구를 달았다.

 

▲옥인 콜렉티브의 '작전명 - 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 설치 모습.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안경수는 도시 속 공터나 건물 등 아주 평범한 공간 속의 낯선 순간을 그려낸다. 작품 속엔 아무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 대신 낯선 순간을 표현하는 여러 회화적인 실험들이 등장한다. ‘어 블라인드 스팟(A blind spot)'은 바닥에 바른 시멘트가 마르기 전에 엉성한 바리케이드를 쳐 막아놓은 평범한 장면을 그렸다. 하지만 위에 보이는 전깃줄과 흡사 미장이가 잘 펴 발라 놓은 시멘트 같은 질감의 캔버스 등 치밀한 화면 구성이 시선을 붙잡는다. 이렇게 정적인 동시에 복잡한 안경수의 작품은 오래 볼수록 불안과 우울의 정서를 감염시키기 때문에 퇴폐적이 됐다.

 

오용석은 남성의 신체와 남성 간의 사랑을 도발적으로 그린다. 그가 그린 신체의 형태는 불분명하지만 화려하고 다층적인 색감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도발적인 그의 작품들은 불완전한 형태 속에서 점차 신체를 인지하도록 집중하게 만든다. 탐닉의 시선에 우리도 동참하는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탐닉은 곧 퇴폐라고 기획자는 말했다.

 

▲안경수, '어 블라인드 스팟(A blind spot)'. 180 x 230cm, 캔버스에 아크릴. 2014.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옥인 콜렉티브는 이번 전시에 2010년 실행했던 작전명 하얗고 차가운 것을 위하여의 기록 영상을 처음으로 선보인다. 미술이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매개하는지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된 이 작업을 옥인 콜렉티브는 여론의 공론장이란 말로 설명한다. 무언가를 수행하게 만들기 위한 약속과 환경은 무엇일까를 시작으로 특정 시간, 장소, 조건에 동의한 사람들이 작가들과 함께 전시장에 설치한 피켓 모양의 오브제로 눈을 치우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영상 옆엔 당시 사용한 한 면은 희고 다른 한 면은 빨간 피켓들이 거꾸로 기댄 채 서있고, 그 옆에 작전은 연기됐다는 포스터가 붙었다. 홀로그램 시위와 시위용 피켓으로 눈을 치우는 행위는 둘 다 굉장히 가벼워 보이지만 계속 곱씹게 되는 무게감을 지닌다. 하지만 기획자는 이를 포퓰리즘이란 네 글자로 정의했다.

 

임유리의 영상은 성서 속 약한 존재들을 등장시켜 그들 사이의 대화를 연결한 것이다. 주로 망상증 환자, 건강염려증, 미신론자, 섹스 중독자 등 병리적인 인간들 사이의 대화나 독백을 공장의 기괴한 야경과 병치시켰다. 영상 속 건물과 배관들, 공장의 연기와 불빛 등의 무기물들이 어느 순간 대화 속 인물들 같다는 착란의 상태에 빠져들게 만들어 위험하다고 기획자는 말한다. 그리고 죽음과 병에 대한 공포에 찌든 망상증 환자란 타이틀을 남겼다.

 

장파는 여성의 신체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여성의 원초적 섹슈얼리티를 다뤄왔다.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주체가 돼 여성의 성적 욕망에 대한 환상과 금기를 건드리는 여성주의적 시선을 보여준다. 이에 기획자는 우리의 관음증을 일부러 끄집어내어 인정하게 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행동이라고 적었다.

 

▲임유리, '바위너구리들_의사와 숙행의 대화'. 1채널 비디오, 컬러, 사운드, 4분 55초. 2015.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전소정은 공감각 현상에 대한 매료를 이번 전시에 선보인다. 공감각 현상은 신경계의 교란으로 추정되는 어떤 작용에 의해 색을 보면 소리가, 소리를 들으면 색이, 심지어 글자나 맛, 형태에서도 색이 느껴지는 등의 현상을 말한다. “이치에 맞는 착란은 감각적 착란을 예술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공감각자 시인 랭보의 예술적 신념을 보여주는 말이다. 마찬가지로 공감각자로 유명한 화가 칸딘스키는 공교롭게도 나치 시절 퇴폐미술자로 낙인찍힌 작가였다. 기획자는 이 작품에 남몰래 이상감각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야 막기 힘들지만, 문제는 이들이 이런 병리현상을 '이치에 맞는 것'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믿거나 어처구니없게도 그것을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란 문구를 달았다.

 

정덕현은 종이와 먹을 이용해 노동에 관해 그린다. 거대한 기계들과 반복적인 노동의 도구들을 전통 동양화의 재료로 그리는 작가의 태도를 어떤 비평가는 긍정적 의미의 퇴행이란 용어로 설명하면서 그의 진실한 태도를 예찬했다. 반복적으로 붓을 종이를 문질러 보풀이 일게 만들어 화면의 질감을 내는데, 이 긍정의 퇴행적 습성은 기획자에 의해 퇴폐로 정의됐다.

 

▲권용주, '바르게살기운동본부 기념비 모각'. 130 x 55 x 126cm, 스티로폼 조각, 외부용 수성 페인트. 2012.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퇴폐의 정의가 곧 검열의 발견    


80년 전 독일에서 열린 퇴폐미술전이 2016년 한국에서 다시 기획된 이유는 최근 몇 년간 논의돼 온 예술표현의 자유와도 연결 지을 수 있다. 또다시 엄격한 검열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이 불온과 건전, 예술과 비예술, 허용과 불허를 가르는 단 하나의 기준을 너무도 잘 안다. 나치의 어처구니없는 미술 탄압이 현재 웃음거리로 남았다는 것도 기억하고 있다.

 

전시 기획자이자 비방의 문구를 작성한 안소현 큐레이터는 오늘날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제약은 암묵적인 동시에 복잡하고 다층적인 방식으로 강화되는 중이라고 설명하며 극단적인 검열 사건이 일어날 때만 예술이 반응한다면 어느 순간 천천히 길들여진 유순한 예술만 남게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가 들기 시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안 큐레이터는 기획자의 취지에 동의하고 참여해준 작가들에 대해, 자신이 적은 문구들이 너무 자극적이진 않을까 걱정했다고 한다. 그럴 때마다 작가들이 오히려 더 세게 써야지 않겠냐고 충고했다며 웃었다그러면서 문구를 쓰기 전 작품을 모욕하되 가장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이 되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던 순간을 고백했다. 이 오독을 피한 비난을 통해 전시를 이해하는 것도 색다른 즐거움이다. 전시는 8월 14일까지.


▲오용석, '흔들리는 or 흔들림'. 91 x 65 cm, 캔버스에 유채. 2016. (사진 = 아트 스페이스 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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