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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의 나홀로 세계여행 - 비간] 444년 전 스페인 식민거리로 시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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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3-494호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2016.07.22 19:14:48

(CNB저널 = 김현주 광운대 미디어영상학부 교수)

8일차 (비간 → 마닐라행 버스 출발) 

비간 박물관을 방문하다

도시 탐방 첫 목적지는 비간 박물관이다. 박물관은 구 지역 형무소 자리로서 키리뇨(Elpidio Quiriño) 전 필리핀 대통령(1948~1953)의 출생 장소이기도 하다. 교도관으로 일하던 아버지 때문에 형무소가 그의 출생지가 됐다. 박물관은 키리뇨 대통령 특별 전시로 시작한다. 2차대전 후 복구와 경제 부흥이 그의 치적으로 꼽힌다.

혁명의 도시 비간

이어서 바시 전시실로 간다. 바시(Vasi)는 사탕수수로 만든 필리핀 전통 주류로서 박물관은 이 지역 특산물인 바시의 사회문화적 의미를 소개한다. 전시물마다 완벽한 영어로 꼼꼼하게 적어놓은 설명문이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바시는 1807년 필리핀 북부에서 일어난 반식민 혁명(Vasi Revolution)의 진원지이기도 하다. 스페인 통치 기간 중 필리핀 도처에서 반란과 혁명이 끊이지 않았는데, 그중에서도 비간은 중심이었으니 혁명의 도시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크리슬로고(Crislogo), 부르고스(Burgas) 등 이 도시 거리나 광장 이름 중에 지역 출신 혁명가들의 이름을 딴 것이 많은 것도 그러한 이유다. 박물관 벽을 따라 걸린 혁명화의 장면 장면이 필리핀 사람들에게 스페인 통치 330년이 어떤 의미인지를 잘 말해 준다. 

필리핀에 기독교가 퍼진 이유

옆 전시실은 필리핀 전역에 흩어진 바로크 교회 유적들의 사진전이다. 콜로니얼 시대의 교회들은 대개는 훼손됐거나 방치됐지만 더러는 이베리아 반도 본토보다 오히려 더 정교하다. 사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교회마다 서 있는 예수상의 예수 얼굴은 거의 모두 슬픈 것이 특이하다. 필리핀에 기독교가 널리 퍼진 것은 식민지 백성들의 절망적인 마음이 핍박받은 예수와 비슷했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름다운 크리슬로고 거리엔 화강암이 깔렸다. 콜로니얼 양식의 건축 원형이 그대로 남은 곳이다. 사진 = 김현주

▲살세도(Salcedo) 광장. 광장 중앙 연못에 설치된 분수는 필리핀 전체를 통틀어서도 명물이다. 사진 = 김현주

살세도 광장

박물관 관람을 마치고 시청과 주청사가 있는 살세도(Salcedo) 광장으로 나간다. 시청 앞 작은 광장에는 비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1999) 기념비가 있다. 아시아 지역의 대표적인 스페인 식민 계획도시(1572년 건립 시작)로, 아시아와 유럽 양식의 융합 속에 동아시아 지역에서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콜로니얼 교역 도시라는 점이 선정 이유다.

살세도 광장에는 키리뇨 대통령 동상과 리잘(Rizal) 동상이 서 있고 건너편에는 비간 성당(성바울 메트로폴리탄 성당)이 있다. 광장 중앙 연못에 설치된 분수는 필리핀 전체를 통틀어서도 명물이다. 밤마다 열리는 분수 쇼는 미국 라스베이거스 벨라지오 호텔 분수 쇼에 못지않다고 현지인들은 주장한다. 참고로, 분수 쇼는 한국 기술자들이 설계, 시공했다고 한다. 

실내가 웅장하고 화려한 비간 성당

광장 남쪽 끝에 붙어 있는 비간 성당(성바울 메트로폴리탄 성당)은 겉으로 보기보다 실내가 웅장하고 화려하다. 성당은 1641년 최초 건립 후 누에보 세고비아(Nuevo Segovia) 대교구청이 루손 섬 북쪽 끝 카가얀(Cagayan)에서 위치와 기후 조건이 좋은 비간으로 옮겨오면서 1758년 ‘대성당(cathedral)’으로 승격한다.

성당과 거의 붙어서 부르고스(Burgos) 광장이 있다. 비간 출신의 성직자이자 혁명 열사의 이름을 딴 광장이다. 광장 중앙에는 부르고스 기념비와 동상이 있고, 성바울 성당 쪽으로는 8각형 종탑이 서 있다. 지진이 잦은 이 지역에서 지진이 나더라도 교회 건물을 상하지 않게 하기 위해 교회와 거리를 두고 세웠다고 한다. 

▲비간 시청 앞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지정 기념비가 서 있다. 아름다운 비간의 모습을 보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지 짐작할 만하다. 사진 = 김현주

▲살세도 광장에 있는 주청사. 살세도 광장에서는 이 외에 키니료 대통령 동상과 리잘 동상도 볼 수 있다. 사진 = 김현주

아름다운 크리슬로고 거리

부르고스 광장에서 서너 블록 벗어난 지점에서 크리슬로고 거리(Calle Crislogo)에 접어든다. 비간의 다른 거리와는 달리 화강암이 깔린 거리를 얼마 걷다 보면 왜 비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는지 금세 깨닫게 된다. 어떻게 보면 쿠바 아바나 올드타운(Havana Vieja)을 닮기도 했으나 중국과 현지, 그리고 콜로니얼 양식이 혼합된 건축물이 많고, 또한 보존 또는 복원이 잘 돼 있다는 점에서 그야말로 유니크하다.

현지인들과 중국인, 스페인 사람들이 섞여 번창했을 콜로니얼 시대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독특한 분위기에 젖어 한참을 배회한다. 가게와 카페, 호스텔만 아니었다면 영락없이 400~500년 전 콜로니얼 시대 그 모습이다. 화강암 보도 위를 지나가는 칼레사(Kalesa)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경쾌하다.

크고 다양한 나라 필리핀

오후가 되니 더위가 기승을 부린다. 오늘 야간 버스 출발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도시 탐방을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휴식을 취한다. 과거부터 오늘까지 필리핀 북부의 경제, 산업, 농어업과 문화의 중심 도시인 비간 탐방을 마친 감회가 크다. 필리핀은 크고 다양한 나라임을 확인한다. 전체 면적 29만 평방킬로미터, 루손 섬 하나만으로도 이미 남한보다 큰 나라다.

저녁 8시, 파르타스(Partas) 버스는 만석으로 도시를 떠난다. 넓은 국토에 비해 항공과 철도 교통이 불편한 필리핀에서 버스는 가장 인기 있는 장거리 교통수단이다. 구불구불한 왕복 2차선 국도를 무섭게 달려 마닐라에 도착하니 새벽 3시 조금 넘은 시각이다. 비간에서 마닐라까지 400km 넘는 거리를 7시간 만에 주파했다.

▲살세도 광장 남쪽 끝에 있는 성바울 성당은 실내가 웅장하고 화려하다. 사진 = 김현주

9일차 (마닐라 → 서울) 

아시아의 방대함을 느낀 여행

이륙한 지 4시간 만에 항공기는 인천공항에 접근한다. 2월 초순의 산하는 꽁꽁 얼어붙었다. 오늘 아침 영하 9도다. 어쨌거나 비행기 4~5시간 거리에 동남아시아가 있어 한국인의 겨울은 행복하다.

요즘 나의 여행은 중심에서 자꾸만 더 멀리 들어가다 보니 이번 여행의 테마가 지구촌 변방 탐구가 됐다. 세부, 북보르네오. 비간 모두 변방이다. 문화, 종교, 인종, 언어의 점이지대다. 다시 한 번 아시아의 방대함과 다양성을 확인하는 여행이었다.

세계 여행은 하면 할수록 점입가경이다. 세계는 넓고 인생은 짧으니 아직은 여행을 끝내지 못하고 있다. 대륙을 품어 보려고 도전하면 할수록 대륙은 더 멀리 우뚝 서서 그 웅대한 자태를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것 같다. 아직은 당분간 더 여행을 계속해야만 하는 이유다. 

(정리 = 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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