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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독서 ②] 일본에 대해 ‘한 입으로 한 말만’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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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499호 최영태 편집국장⁄ 2016.09.06 14:25:04

(CNB저널 = 최영태 편집국장) 일본-일본인에 대한 첫 충격은, 고릿적 같던 70년대 말 대학 시절에 경험했다. 지금은 외국인을 서울 거리에서 숱하게 만날 수 있지만 그때만 해도 ‘한민족끼리만’ 살던 세상이었다. 헌데, 대학 내 모임에서 만난 그 일본 청년은 우선… 더러웠다. 그간 숱하게 들어온, ‘일본인은 야비하지만,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다’는 교육 내용과는 달랐다. 그는 술안주를 손으로 턱턱 집어 입 안으로 쓸어 넣고, 입가에 안주 기름기가 묻은 채로 잘도 떠들고 노래를 불러 제꼈다. 요즘으로 치자면 일본 대학생 중에서도 힙합 스타일의 청년이었던 듯싶다. 

그때 느낀 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사람을 국적으로 판단하면 안 되겠구나. 그 사람 개인으로 판단해야지’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도대체 초-중-고에서 날 가르친 그 모든 것들은 도대체 뭐였지?’하는 의문점이었다. 

사람이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먼저 보는 한국인

물론 이렇게 ‘국적보다 개인’을 경험했다고 해서, 한국 사회가 줄기차게 가르치는 ‘국적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도그마에서 빠져나오기는 쉽지 않다. 미국에 가서 외국인을 위한 영어 교실(ESL)에서 여러 나라 사람들을 만났고, 그 중에는 사회주의적 성향의 아프가니스탄 청년도 있었다. 그는 공개 대화 수업 말미에 필자를 규탄했다. “저 코리언은 사람을 국적으로만 본다”는 불만이었다. 뭘로 얻어맞은 듯 귀에서 딩~ 소리가 났다. 백인은 1등인, 황인종은 2등인, 아프가니스탄 같은 회교 국가 사람은 3등인도 안 되는 것으로 분류하는 고착된 버릇이 회화 연습 시간에 그대로 드러났기에 들은 규탄이었다.

일본의 ‘개인’을 만나면서 겪은 충격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한 여러 자료를 접하면서도 똑같이 여러 번 당했다. 가령 이런 내용이다. 

은행융자, 일제강점기 때가 더 받기 쉬웠다고?

고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 정도의 서민금융 혜택은 (일제시대에는) 절차만 밟으면 누구나 쉽게 누릴 수 있는 당연한 권리였다. … 해방 후에 비뚤어진 금융 풍토 때문에 융자라면 특혜나 특권 등 비리 아니면 남다른 수완이 있어야만 인연이 닿았다. (일제 때) 손쉽게 도움을 받곤 했던 금융기관만은 지겨운 관료주의와 별도로 생각되어서… 은행 문이 낮았기 때문이다.(114쪽)

일제 강점기만 해도 금융기관에 가서 일정한 서류만 써 내면 융자를 받을 수 있었던 경험 때문에, 박 작가의 어머니는 해방 정국에서 집 장만을 위해 은행 문을 두드렸지만, 특권-특혜층 아니면 융자를 받을 수 없는 ‘별난’ 경험을 했다는 얘기다. 

은행 융자는 아무나 해주지 않는다는 이런 경험은 70년 전 한국에서만 통용됐던 걸까? 그렇다면 요즘 대우조선해양에겐 ‘청와대 서별관회의’라는 초간단 절차를 통해 5조 원이라는 천문학적 금액을 턱턱 지원하면서도, 일반 중소기업엔 단돈 1~2억 원을 주기 싫어 온갖 제약을 가하고, 그래서 결국 소기업들을 도산시키는 은행들의 행태는 도대체 뭐가 다를까. 요즘 TV만 틀면 나오는 고금리 대부 광고도, 결국 높은 은행 턱을 기어오르지 못하는 서민들이 대상 아닌가? ‘일제강점기와 달리 여전히 차별하는 한국의 금융’은 그래서 어른들이 과거에 흔히 내뱉었던 관용구 “일정 때가 그래도 살기 좋았어”라는 넋두리를 21세기에 되살려 놓는다. 

일제강점기의 금융 관행에 대해서는 이런 기록도 있다.  

총독부는 고리 부채 근절이 농촌 사회 안정화의 관건이라고 파악해, 농가들을 금융조합에 가입시켜 그 대부로 부채 정리를 꾀하게끔 했다. 그러나 지주제에 뿌리를 둔 영세농 경영을 해체하지는 못했다. (한석정 ‘만주 모던’ 261쪽. 이경란 저 ‘일제하 금융조합 연구’로부터 재인용)  

▲1995년 철거 직전 경복궁 안에서 바라본 조선총독부 건물의 모습. 김영삼 정부는 361억 원을 들여 이 건물을 철거한 뒤 2년 만에 외환위기에 빠져 80억 달러를 외국에서 꿔오는 수모를 당했으며, 당시 일본이 30억 달러로 가장 많은 도움을 줬다. 사진 = 위키피디아

지주의 횡포에 시달리는 소작 영세농의 구제를 위해 조선총독부가 금융조합을 통한 대출을 장려했지만 강고한 지주의 저항을 깨지는 못했고, 어려운 영세농 현실은 계속됐다는 연구 결과다. 

이 문장만 읽으면 마치 조선총독부가 영세농을 위해 지주와 대립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물론 다른 기록도 있다. 

일제의 정책은 농민 계층에 대해서는 수탈이었지만 지주계층에게는 오히려 시혜적인 것이었고(박유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102쪽)

박유하 세종대 교수는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을 써 지탄을 받은 학자다. 그러나 고교와 대학을 모두 일본에서 나와 일본인의 시각을 가장 잘 아는 한국인이기도 하다. 그는 일제의 정책을 ‘지주에게 시혜적인 것’으로 규정함으로써, 일제가 조선의 상류층을 식민지 지배에 이용했다고 지적한다. 식민 종주국이 피식민지의 엘리트를 포섭해 대리 통치를 시키는 수법은 식민지 통치의 ABC다. 그러나 이런 공식을 인정한다 해도 일제가 조선 농촌에 금융조합을 설립케 하고 이를 통해 소작 영세농의 질곡을 해소시켜주려 노력을 일부 했다는 점은 ‘일본은 조선에서 식민기간 내내 수탈만 했다’는 학교의 공식 교육 내용에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든다. 

“달걀 먹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줄 줄은 아는 일제”

이런 연구 결과를 토대로 역사학자 김기협은 일본의 조선 식민 지배에 대해 “달걀을 수탈하기 위해 닭에게 모이를 줄 줄은 아는 체제였다”고 평가한다. 닭을 마구잡이로 잡아먹은 게 아니라, 닭은 키워가면서 알을 뺏어먹고, 닭이 새끼를 치게 한 뒤 어미닭을 잡아먹을 줄 알았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에 전시된 한일기본조약 복제본. 이 조약을 이끌어내는 과정에서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종필과 일본 외무장관 오히라 마사요시 사이에 ‘언더테이블 메모’가 오간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 = 위키피디아

예를 들자면, 닭의 알을 뺏기 위해 병아리 때부터 240일 동안 닭모이를 주고 241일째 날 닭목을 쳤다면, 이른바 식민지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학자들은 240일째까지에만 초점을 맞춘다. “그래도 일본은 조선에 엄청난 투자를 해 근대화를 시켰다”는 주장이 나오는 근거다. 반면 일제의 수탈론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사학자는 240일까지의 투자는 보지 않고 241일째의 잔인한 닭 도살 장면만 강조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팩트는, 240일째까지는 닭 모이를 잘 줬고, 241일째는 닭목을 쳤다는 것, 즉 그런 구도로 식민지배가 이뤄졌다는 것이다. 

부분 팩트만 제시하면서 자기주장을 해대는 학자들, 목소리 큰 사람들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본, 일본인에 대해 완전히 헷갈리고 있다. 일본에 대해 한국인들의 겉과 속이 달라 난처해하는 현상은 다음 증언에서도 여실히 확인된다. 

한일회담에서는 왜 ‘언더테이블 메모’가 많나?

주한 일본 대사를 지낸 오구라 가즈오는 한일회담 현장에서 한국 측 대표들이 공식 회담 석상에서의 뻣뻣한 자세와는 달리 휴회 시간에 ‘메모’를 슬쩍 테이블 아래로 일본 대표에게 건네면서 타협을 이뤄낸 적이 많았다고 증언했다. 한일회담에서 융통성을 보이면 대번에 친일파로 낙인찍히는 풍토 탓에 공식 회담에서는 민족주의자다운 면모를 과시하고, 사석에선 친밀한 일본어를 구사하면서 ‘언더테이블 메모’로 속마음을 드러냈다는 소리다. 
‘일본은 나쁜 나라’라는 도그마를 공식적으로 강요하고 교육하고, 언론들도 그 궤도를 못 벗어나고 있기에 벌어지는, ‘끊임없이 한 입으로 두 말 하기’ 사례들이다.  

▲중국 장춘(長春) 시에 있는 옛 만주국 국무원 건물. 서울의 조선총독부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일본 도쿄의 제국의회를 본따 지었지만 원본보다 규모는 더 크고 웅장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동북지역 최고 명문 길림(吉林)대학의 의학부로 쓰이고 있다. 사진 = 위키피디아

이런 현상은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한 아베 정부의 입장은 하나도 달라진 점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 없이는 한일 정상회담 없다’던 입장을 견지해오던 박근혜정부는 작년 12월 28일 느닷없이 ‘위안부 합의 관련 박근혜 대통령의 대국민 메시지’라는 걸 내놓으면서 “오늘 오후 개최된 한·일 외교장관 회담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와 관련한 그동안의 협상이 마침내 타결되었습니다”라면서 큰 진전이라도 있는 것처럼 발표했다. 일본은 거의 변화가 없는데, 한국만 이랬다저랬다 하는 광경이 또 펼쳐진 것이다. 이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들은 정부에 대한 소송으로 항의하고 있다. 

‘100% 선(善)으로서의 근대’와 ‘100% 부정적인 식민지’?

이런 어처구니없는 사태의 배경으로, 연세대 사회학과 김동노 교수는 ‘선(善)으로서의 근대’ ‘부정적인 식민지’를 고착화시켜 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선(善)으로서의 근대’는, 근대화만 되면 과정은 어쨌든 무조건 좋다는 태도다. 이른바 뉴라이트 학자들에서 이런 논리를 쉽게 볼 수 있다. 사람을 죽이건 말건, 악이 선을 짓누르든 말든, 근대화(경제발전)만 되면 무조건 좋다는 식이다. 그러니 “일본의 조선 식민지배는 근대화에 좋았다” “박정희-전두환의 독재정치는 한국 경제에 좋았다” “이승만의 남한 단독정부 수립과 그에 따른 분단은 남한의 공산화를 막고 그래서 경제적으로 남한에 좋았다”는 식으로 ‘좋았다’ 찬가 일색이다. 문제는, 이들이 미리 결론을 내리고(“경제가 좋으면 좋은 거다”) 논리 전개를 하기 때문에 이른바 민주정부가 하는 일에 대해서는 아무리 결과가 좋아도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대로 ‘부정적인 식민지’라는 도그마는, 식민지는 무조건 나빴다는 환상이다. 식민 지배가 100% 악이었다면, 그 완전한 악 아래에서 조선 땅에 살았던 사람들은 악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악을 묵인하거나 저항하지 못한, 즉 나쁘거나 모자란 사람이 된다.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로든, 상해로든 나간 사람만이 온전한 사람이 된다. 일본 식민당국에 의해 만주로 ‘강제 농경이민’ 된 조선인들의 얘기를 그린 조정래의 소설 ‘아리랑’을 읽고나면, 이런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런 착각 탓에 한때 일부 사람들이 ‘만주의 조선족은 모두 항일운동가 후예’라는 식으로 대해 조선족들을 당황하게 만들었다는 얘기(‘만주모던’ 133쪽)도 있다.   

재만 조선인은 전부 항일했나, 아니면 전부 친일했나?

미국의 서부가 그랬듯, 일본이 만든 네 번째 나라(일본제국, 타이완총독부, 조선총독부에 이어)라는 만주국은 일본인과 한국인에게 새로운 기회의 땅이기도 했다. 만주로 건너간 사람들 중에서 소설 ‘아리랑’에서처럼 강제로 끌려간 농경 이민자도 있지만, 박정희 전 대통령처럼 일본 제국의 군인이 되기 위해 청운의 꿈을 품고 건너간 사람들도 많았다. 

‘1932년 일본 관동군에 의해 만주국이 만들어진 이후 1930년대 후반의 조선은 만주 이주 열풍으로 들끓었다’고 만주 연구 전문가 한석정 교수는 전한다.(‘만주 모던’ 102쪽)

그리고 이렇게 떼를 지어 만주로 건너간 ‘재만 조선인’은 만주국 관리가 되기도 했고, 아편 장수가 되기도 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있었지만 아편을 팔아 돈을 번 사람, 공무원이 된 사람, 의사가 된 사람 등 온갖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사실이 여러 자료들을 통해 증명된다. 

현실은 이렇건만, ‘부정적인 식민지’ 도그마를 끝까지 밀어붙이면, 재만 조선인은 전원 항일투사로 생각되거나(악의 소굴인 식민치하를 빠져나간 사람이므로), 아니면 반대로 전원 친일파가 되는(즉, 일본의 만주국 건국에 협력한), 현실과는 완전 동떨어진 ‘사후 착각’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우리의 학교나 언론은 이런 ‘사후에 만들어진 환상’을 교육시키는 데 익숙하다. 아름다운 역사를 가르치고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리 ‘교육 목적에 맞는 교육만’을 시키더라도 팩트의 편린은 어딘가에는 남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불쑥불쑥 고개를 내미는 그 팩트들은 한국인을 당황스럽게 만든다. “이건 뭐지?” 하고 놀라게 되는 현상이다. 

한윤형의 ‘뉴라이트 사용후기’에 보면 별난 방정식이 나온다. 

Y는 나쁜 놈이다
정의상 Y는 X를 가질 수 없다
Z왈 ‘Y가 X를 가졌다’
고로 Z는 빨갱이다

X는 나쁜 것이다
Y는 좋은 놈이다
정의상 Y는 X를 가질 수 없다
Z왈 ‘Y가 X를 가졌다’
고로 Z는 빨갱이다

보통의 방정식은 앞에서부터 읽어나가야 하지만, 사실 이 방정식은 뒤에서부터 읽어나가는 게 올바른 순서다. 왜냐면, 목적하는 바가 “Z는 빨갱이다”라는 답이기에, 그 답에 이르는 과정은 어찌 되건 상관없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지나치게 나라 걱정을 해도, 서민의 목소리를 너무 열심히 들어도 좌파가 된다는 어이없는 논리가 ‘이른바 보수’의 집회에서 등장하기도 한다. 

한국인에게 익숙한 방정식

이런 잘못된 방정식이 해방 이후 여태껏 통용돼온 나라이기에, 위의 방정식에서 Z 자리에 ‘일본’을 넣어도 무방하다. 일본-일본인은 뭐를 하건(IMF 사태 때 위기에 빠진 한국에 가장 많은 자금 지원을 했건, 1965년 대일청구권자금으로 당시 일본 외환 보유고 14억 달러 중 57%에 해당하는 8억 달러를 한국에 지원했건 말건) 무조건 나쁜 나라, 야비한 사람들로 ‘공식적으로’ 얘기되고 있는 형편이다. 

한윤형은 위의 방정식을 제시하면서, “저것이 한국 극우파에 특유한 것이라기보다는 한국인들에게 특정한 것일 거라는 불유쾌한 가설이 떠오른다”고 꼬집었다. 결론을 내리고, 그 결론에 맞춰 추론하는 방식에 한국인이 거의 모두 예외 없이 물들어 있다는 지적이다. 

우리는 일본에 대해, 북한에 대해, 만주에 대해, 미국에 대해, 중국에 대해 이런 방정식을 계속 돌리고 있는 건 아닐까? 미국은 뭘 하건 다 우리에게 도움 되는 일만 하는 나라고, 일본은 뭘 하건 우리에게 피해만 주는 나라라는 이상한 공식…. 

일본을 좋게 말하든 나쁘게 말하든 그건 각자의 경험과 지식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일본을 좋다고 얘기한다고 해서 나쁜 게 아니며, 일본은 나쁘다고 말한다고 해서 좋은 것도 아니다(두 경우 모두 그렇게 결론을 내리기까지의 추론 과정을, 팩트를 근거로 정확히 밟아갔다면). 그러나, 같은 사람이 어제는 일본이 나쁘다고 했다가, 오늘은 좋다고 얘기하면 그 사람만 우스워질 뿐이다. 그런데 현재 대개의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361억 들여 조선총독부 건물 철거하고 2년 뒤 일본에 손벌렸으니 

김영삼 정권은 1995년 361억 원을 들여 구 조선총독부 건물을 해체했다. ‘민족정기를 세운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불과 2년 뒤 김영삼 정권은 IMF 사태를 맞았고, 당시 한국은 가장 많은 돈을 일본에서 꿔옴으로써 외환 위기를 봉합했다.

한국은 일본으로부터 박해-침략-침탈도 많이 받았지만 도움도 많이 받았다. IMF 외환위기 당시 선진국 지원 80억 달러 중 일본이 30억 달러를 부담했고, 미국은 17억 달러를 지원했다. (박유하 ‘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64쪽) 

문제는 일본이 지은 건물이 조선총독부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박유하 교수는 ‘서울역사(도쿄에 가면 너무나도 똑같은 도쿄역사가 있다)는 보존되어야 할 건물로 지정되었다는 소식이 최근에는 들려온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45쪽)고 지적했다. 일본이 지은 두 건물에 대해 한 건물에 대해서는 361억 원을 펑펑 써가면서 시원하게 해체해 버리고, 또 다른 건물인 서울역사에 대해선 “이건 역사적으로 보호해야 해”라며 서울시 사적 284호로 지정했다는 것이다. 코미디 아닌가? 

▲태백산국립공원의 잘 자란 일본잎갈나무 50만 그루가 단지 일본 원산지 나무라는 이유로 잘려나갈 위기에 처했음을 보도한 서울신문 8월 26일자 기사의 인터넷판.

이런 바보짓은 지금도 계속될 조짐이다. 태백산국립공원에는 50만 그루의 ‘일본잎갈나무’가 있다. 40~50년간 직경 1m 크기로 잘 자란 이 나무들을 태백산국립공원 사무소 측은 “국립공원의 위상에 일본산 나무는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잘라내려 한다는 뉴스가 최근 나왔다(서울신문 8월 26일자). 도대체 이름에 ‘일본’이 들어갔다는 것 말고는 아무 잘못도 없는 이 나무를 잘라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나, 그 과정에서의 생태계 파워 등에는 관심이 없다는 태도다. 

이런 바보짓이 일어나는 이유를 박유하 교수는 ‘자신의 역사(과거)를 사랑할 것이 우리에겐 대전제가 되고 있기 때문이며, 사랑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긍지를 가질 만한 아름다운 역사가 아니면 안 되기 때문이다. 역사 서술에서 미화의 유혹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때문이다’(‘누가 일본을 왜곡하는가’ 219쪽)고 지적했다. 

일본과 비교할 때 한국이 아직도 형편없이 못사는 열등국가라면, 국내 통치를 위한 이러한 ‘일본 왜곡’이 용납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한국의 기업 중에는 일본 수준을 넘어선 기업이 나타나고 있고, 한류 문화 역시 일본을 휩쓸고 있다. 이렇게 한국이라는 나라의 국격이 달라진 상태에서도, 미개국이 하듯, 한 입으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건 한국인의 자존심이 더 이상 용납해선 안 된다.  

‘국론통일’이라는 위험한 시대착각

이런 바보짓을 이제 그만 하려면? 도그마를 정해놓고 가르치는 ‘그럴듯하기 교육’을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리고 팩트를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하며, 그렇기 위해서도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민주주의는 소수의견을 죽이지 않고 살려두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소수의견을 살려두는 민주주의는 창의의 시대 21세기에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창의란 경계지대에 위치한 소수에게서 잘 나온다. 그렇기에, 21세기에 ‘국론통일 시도’는 위험하다. 

책 속에는 치열한 연구 결과를 통한 여러 팩트들이 숨어 있다. 이런 팩트들이 열린 언론을 통해, 특히 TV를 통해 국민에게 널리 알려질 때 비로소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각자 ‘한 가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목소리가 모아지면서 여론이 형성된다. 각자 한 목소리를 내면서도, 여론이 모아지는 이런 선순환을 위해서도 TV의 민주화 역시 절실히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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