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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 작품에 등장한 미술가] 자화상 지나 온몸 퍼포먼스까지…작품 주제는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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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07호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10.31 10:25:14

(CNB저널 = 이문정(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는 실로 다양하다. 미술가는 어떤 것을 작품의 소재로 선택할지에 대해 심사숙고한다. 한 작가의 작업을 한 두 개의 단어로 한정지어서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김수자의 보따리, 서도호의 집, 윤석남의 어머니처럼 특정 미술가의 작업을 대표하는 특별한 소재가 거론되는 경우도 있다. 미술의 핵심적인 역할 중 하나는 의사소통, 의미의 교류이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통해 작가의 생각과 마음을 전달받는다. 관객들이 서도호의 집을 눈으로 보고 감탄하는 데에 머물지 않고 여러 번 곰씹고 상상하며 작가의 생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소재는 작가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를 담아내는 상징물이기에 그것이 무엇이든 작품의 일부가 되는 순간 의미를 담아내는 기표(signifiant)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미술에서 찾아볼 수 있는 무수한 소재들 중 관심을 끄는 대표적인 것은 작가 자신이다. 그리고 작가 자신이 소재가 된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많은 사람들은 자화상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자화상은 분명 미술가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시켜 준다. 실제로 자화상은 미술가가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자화상은 미술가가 자신을 꺼내고, 발견하고, 표현하는 미술이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시대 이후 미술이 정신적 노동의 결과물로 여겨지고 미술가들의 사회적 지위도 높아지면서 자화상의 제작이 늘어났다. 뒤러(Albrecht Dürer)의 자화상에는 신과도 같은 창조자의 당당한 모습이 담겨 있으며 루벤스(Pieter Paul Rubens)의 자화상에서는 귀족과 같은 모습의 예술가를 만날 수 있다. 렘브란트(Rembrandt van Rijn)는 인간으로서의 삶을 성찰하는 자화상을 일생동안 그렸고, 반 고흐(Vincent van Gogh)와 뭉크(Edvard Munch)는 고통과 심리적 불안을 전달했다. 

▲김도희, ‘벽_잠행_바닥(Wall_Travelling Incognito_Floor)’, 미아리 텍사스촌, 2015, 사진제공 = 김도희 작가

그렇다면 오늘날 작가들의 자화상은 어떠할까? 맥락에 따라 모든 기호의 의미가 바뀐다는 상대주의, 혼종성에 대한 긍정적 의미 부여, 정체성은 완결되거나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의 변화 속에서 미술가들은 다중적이고 해체적인 자화상을 만들어냈다. 대표적 예로 신디 셔먼(Cindy Sherman)의 ‘무제 필름 스틸(Untitled Film Stills)’ 시리즈를 들 수 있다. 셔먼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여성 캐릭터처럼 꾸미고 촬영한 자화상 사진들을 통해 사회 속에서 당연시되는 여성들의 스테레오 타입을 보여주었다. 대중문화를 통해 생산되고 전달되는 여성성은 셔먼을 비롯한 여성들의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여러 장의 사진에 전혀 다른 모습들로 등장하는 셔먼은 우리의 정체성이 사회문화적으로 만들어지는 유동적인 것임을 확인시킨다. 야스마사 모리무라(Yasumasa Morimura)는 누구나 알 법한 서양의 고전 명화를 패러디(parody)하고 그 안에 자신을 위치시킨다. 이는 서구화된 사회와 미술 교육의 결과로 나타나는 혼종적인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또한 그의 자화상은 인종과 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를 치밀하게 다룸으로써 규범화되고 고정된 정체성을 해체한다. 

한편 자화상임에도 미술가의 모습이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 차주용은 자신의 발을 촬영한다. 그것은 현실의 시공간에 두 발을 딛고 서 있는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것이다. 동시에 가장 익숙하고 확실히 알고 있다는 믿는 나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지고 모호해지는 경험을 사진에 담아내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낯선 나#99’(2016)에서 보이는, 작가의 발이 놓인 공간은 자신의 정체성이 지켜지는 작가만의 영역을 의미한다. 반대로 유리벽 너머의 공간, 발의 형상을 한 신발이 놓인 공간은 타자의 공간이자 외부적 요소에 의해 만들어진 낯선 자아 정체성이 존재하는 영역이다. 결국 그의 작업은 ‘나는 과연 주체인가, 타자인가? 그 둘의 명확한 구별은 가능할까?’와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노력이다. 

중세시대 이름도 얼굴도 없던 미술가가, 
르네상스 이후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 
요즘은 퍼포먼스로 자신의 전존재를 표출

그런데 미술가가 자화상에만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퍼포먼스(performance)에서는 미술가가 연기자가 되어 모습을 드러낸다. 1960년대 이후 다양하게 전개된 퍼포먼스는 정신과 몸을 분리하고 이성을 중요시하는 이분법적 사고를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이는 산업 사회와 물질문명이 팽배하던 당시 사회에 대한 저항을 인간성의 회복으로 실현한 것이다. 또한 모더니즘 미술의 정형화된 형식이나 규범, 장르의 엄격한 구분을 탈피하여 경직된 예술과 사회에 저항적 목소리를 내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미술가인 요셉 보이스(Joseph Beuys)는 일련의 퍼포먼스들에서 샤머니즘과 토테미즘을 환기시키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고민하는 한편 자본주의와 물질문명주의 등을 비판했다. 빈 행동주의자(Viennese Actionist)들을 비롯한 1960-70년대의 일부 미술가들은 정치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금기를 깨는 저항의 의미를 담아 잔혹하고 폭력적인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했다. 한나 윌케(Hannah Wilke), 캐롤리 슈니먼(Carolee Schneemann)과 같은 페미니스트 미술가들은 자신의 몸을 전면에 내세우는 퍼포먼스를 통해 여성에게 가해졌던 억압과 차별을 드러냈다. 우리나라 미술가 중에서는 이불의 퍼포먼스인 ‘낙태’(1989), ‘아토일렛’(1990), ‘수난유감 - 당신은 내가 소풍 나온 강아지 새끼인줄 알아?’(1990) 등의 작품이 중요하게 이야기된다.  

▲차주용, ‘낯선 나#99’, 피그먼트 프린트, 50 x 50cm, 2016, 사진제공 = 차주용 작가

현재 지속적으로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김도희는 대부분의 퍼포먼스에서 작품의 전면에 등장한다(www.kimdohee.com). 최근작 중 하나인 ‘벽_잠행_바닥’(2015), ‘걸레질(Burnt Pink)’(2015) 등에서 작가는 미아리 텍사스촌 내에 위치한, 화재 후 10년 이상 방치되었던 공간을 청소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퍼포먼스의 모든 과정 - 잿더미와 쓰레기를 치우고 걸레로 닦는 행위 - 는 사진, 동영상, 청소의 결과물 등으로 남겨져 전시되었다. 작업을 진행하면서 작가는 해소할 수 없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벽, 자기 자신을 포함한 인간에게 숨겨진 위선을 드러내는 동시에 해소한다. 

오늘날의 미술에 등장하는 미술가의 모습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돌아보는 자아의 탐색인 동시에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도전하는 참여의 행위이다. 한 명의 개인이자 사회적 관계 속에 놓여 있는 사회 속 존재로서의 목소리 내기인 것이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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