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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정의 요즘 미술 읽기 - 부드러운 재료] 떠다니는 조각과 허공에 걸린 집 의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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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11호 이문정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2016.11.28 09:52:13

(CNB저널 = 이문정 (미술평론가, 이화여대/중앙대 겸임교수)) 요즘 미술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장르와 매체의 다양성이다. 전시장에서 우리가 익숙하게 생각해온 미술의 재료뿐만 아니라 일상의 사물, 과학기술의 결과물, 더 나아가 쓰레기, 체액과 배설물, 동물의 시체와 같이 예상치 못했던 재료들이 사용된 미술을 만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요즘 미술 읽기’의 첫 번째 글에서 이 내용을 다루었듯이 이와 같은 작업들은 분명 예술에 부과된 특정한 기준, 고정관념 등으로부터 자유로운 오늘날 미술의 한 모습이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섬유, 고무, 비닐과 같은 부드러운 재료를 사용한 미술이 주목을 받게 되었고, 부드러운 조각(soft sculpture)이라는 단어는 익숙한 것이 되었다. 부드러운 조각이라는 개념은 클래스 올덴버그(Claes Oldenburg)에 의해 본격적으로 이야기되었다. 녹아내리는 아이스크림처럼 흐물거려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는 올덴버그의 타자기, 변기, 케이크는 단단함, 견고함, 무게감, 영원성처럼 그 동안 당연시되었던 조각의 특성들을 변화시켰다. 또한 재료가 가벼워지다 보니 작품을 천장에 매달거나 묶어놓는 등, 다양한 방식의 전시도 가능해졌다. 이에 에바 헤세(Eva Hesse)는 라텍스(latex)나 유리섬유(glass fiber) 같은 유연한 재료를 벽이나 천장에 매달아 두고 시간이 지나면서 흘러내리고 바닥에 드리워지는 과정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작업에선 한 순간 정지되어 있는 결과물보다 변화의 과정이 중요한데, 비영속적인 그녀의 작품들은 영원성을 갈망하면서도 소멸할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는 듯하다. ‘포장된 퐁네프(Le Pont Neuf Wrapped Coast)’(1975~85), ‘포장된 국회의사당(Wrapped Reichstag, Berlin)’(1971-1995) 등으로 유명한 대지 미술가 크리스토(Christo Javacheff)는 천의 재료적 특수성을 최대한 살려 야외에서 진행된 대규모 포장 프로젝트들을 진행해왔다. 

부드러운 재료 중 오늘날 미술에서 두드러지게 사용되는 것은 바로 섬유(천)이다. 섬유를 재료로 이용할 때 가장 많이 하게 되는 바느질은 몰입과 반복의 과정을 통해 상처의 치유를 이끌어내고 고통을 조절하는 행위로 이해된다. 바늘은 상처를 주는 날카로운 도구이지만 동시에 상처를 봉합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또한 조각난 천을 이어붙이거나 찢어진 것을 연결해주는 바느질은 상징적으로도 치유를 의미한다. 천이 가진 부드러움과 따뜻함도 심리적 안정을 이끌어내는 데에 중요하게 여겨진다. 

‘무겁고 단단한 조각’ 상식 부수는 ‘천 조각’ 

루이즈 부르주아(Louise Bourgeois)는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상처, 어머니에 대한 연민 등을 담아 바느질을 한다. 그녀는 천으로 상처받은 여성, 어머니, 어머니의 사랑을 구하는 아이의 형상 등을 만들었다. 자신이 입던 옷과 사용하던 오래된 천을 잘라 바느질해 완성한 책인 ‘망각의 송시(Ode à L’oubli)’(2004)에서 작가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고 스스로를 치유하며 자신에게 상처를 줬던 사람들을 용서한다. 

야요이 쿠사마(Yayoi Kusama)는 성(性)에 대한 공포와 억압을 극복하기 위해 천으로 남근 형상의 오브제를 만들고 정신신체증적 예술(Psychosomatic Art)이라 이름을 붙였다. 이는 공포의 대상을 반복해 만들고 자신의 감정을 노출시킴으로써 성에 대한 혐오감을 극복하기 위함이었다. 

▲서도호,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설치 장면, polyester fabric, metal frame, 1530 × 1283 × 1297cm, 2013. 사진 제공 = 국립현대미술관

한편 1970년대 이후 미술에서 페미니즘(feminism) 미학이 전개되면서 미술가들은 역사 속에서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었던 수공예에 대한 재해석과 의미 부여를 시도했고 섬유와 관련된 작업이 다수 제작되었다. 주디 시카고(Judy Chicago), 페이스 링골드(Faith Ringgold) 등은 자수나 패치워크(patchwork), 뜨개질, 퀼팅(quilting), 아플리케(appliqué)와 같은 기법을 활용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미리암 샤피로(Miriam Schapiro)는 여성적인 콜라주(female collage)라는 의미의 페마주(femage)를 창안하여 순수 미술과 수공예(장식 미술) 사이의 이분법적 구별과 위계를 비판하고 숨겨졌던 여성들의 역사를 찾고자 했다. 

물론 오늘날 미술에서 바느질은 여성만을 위한 표현 방법이 아니며, 바느질을 이용한 작품에서 반드시 여성적 미학을 유추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여성 미술가가 천을 이용한다고 하여 반드시 페미니즘적인 해석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단순화는 또 하나의 편견을 만들어낼 뿐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 대표 작가로 김수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김수자의 ‘보따리’는 매우 복합적인 의미를 담아낸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포장 방법인 보따리는 무엇을 담는가에 따라 보따리의 형태와 크기가 달라진다. 또한 보따리를 풀면 평면성을 갖게 되고 보따리를 만들면 입체성을 갖게 되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장르 간 경계를 넘나든다. 김수자에게 보따리는 인간의 몸과 일생 -탄생, 잠, 꿈, 사랑, 죽음- 을 은유하는 것이자 정착과 이주를 반복하는 우리의 삶을 담아내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는 트럭에 보따리를 가득 싣고 자신 역시 하나의 보따리처럼 그 위에 올라 이동하는 ‘보따리 트럭 - 이민자들(Bottari Truck-Migrateurs)’(1997)에서 더욱 강하게 부각된다. 

한국인의 집은 둥둥 떠다니는 노마디즘?

부드러운 재료로 제작된 미술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서도호의 천으로 만든 집은 노마디즘(Nomadism, 유목주의)의 시대인 오늘날을 살아가는 작가와 현대인들의 삶을 반영한다. 그 이유는 모두 다르겠지만 오늘날의 사람들은 자발적 혹은 비자발적인 이주를 반복하는 유목민이다. 작가 역시 고향을 떠나 외국의 낯설고 새로운 도시에서 머무르고 이동하기를 거듭해왔기에 특정한 시공간에 구애되지 않고 고정되지 않는 이동이 가능한 집을 만들었다. 각각의 작품들은 모두 작가가 직접 살았던 집들을 그대로 재현해낸 것이다. 가장 개인적이고 내밀한 공간인 집을 통해 우리 시대의 가장 보편적인 담론을 사유하는 것이다. 완벽하고 섬세한 바느질로 완성된 반투명한 집들은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작가의 기억과 감정을 담아내는 정서적 공간이 된다. 또한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 속의 집(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 within Home)’(2013)처럼 양옥과 한옥이 공존하는 상황은 고향을 떠나 다양한 사회를 경험하는 작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숙고를 담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매번 전시장에 들어설 때마다, 인터넷에서 미술 관련 자료와 기사들을 검색해볼 때마다, 그리고 이 칼럼을 쓸 때마다 참으로 다양해진 미술의 시대임을 느끼고 확인한다. 때로는 감상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다양함이 공존하는 것이 한 두 개의 정답이 있는 것보다는 낫지 않을까?’라는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져 본다. 

(정리 = 최영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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