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바야흐로 제대로 닭의 수난 시대. 2016년 어지러운 시국 속 닭은 무사하지 못했다. 박근혜 대통령을 풍자하는 의미에서 닭이 여기저기 등장했다. 닭 모양의 인형을 때리는 퍼포먼스가 광화문 광장에서 펼쳐졌고, 이젠 AI 조류 독감까지, 닭의 이미지가 영 아니다.
그런데 2017년 들어서는 닭이 명예 회복에 나선다. 머리 나쁜 닭대가리라는 등 풍자의 아이콘이 아니다. 닭띠 해인 정유년(丁酉年)을 맞아 본래의 닭이 지닌 의미를 되새긴다. 그러고 보니 그랬다. 닭은 예로부터 어둠에서 광명을 불러오는 존재였고, 12지 동물 중 유일하게 날개가 있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심부름꾼으로서의 의미가 있었다. 이 사실을 잊고 있었다.
서공임 작가의 전시에서 희망을 꿈꾸는 닭을 만날 수 있다. ‘새날을 밝히는 새 그림: 서공임 민화전’이 롯데갤러리 영등포점(1월 6일~2월 5일), 안양점(2월 8일~3월 5일)에서 열린다. 전시장에서 만난 서 작가는 “닭이 무슨 죄가 있겠어요”라며 말문을 열었다.
“새해에 닭 전시를 연다 하니 주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컸어요. ‘요새 나라가 이런데 괜찮겠어?’ 식으로요. 전시를 미루거나 접어야 할지 기획팀과 함께 진지하게 고민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제가 그린 닭 그림은 지금 돌아가는 형국을 풍자, 또는 옹호하는 의미가 아니에요. 예로부터 우리 일상에 좋은 도움을 주는 동물이었던 닭의 본래의 의미를 되새기는 거죠. 그리고 이를 통해 나라가 평온을 찾고, 희망을 위해 한걸음 더 내딛을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어요.”
이슈 마케팅이 아니라는 것은 서 작가의 과거 전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 작가는 매년 12지 동물을 주제로 작업을 해 왔다. 12년 전 닭띠 해에도 닭 그림 전시를 열었다. 당시 “12년 후에 그리는 닭은 어떨까” 하고 궁금해 했는데, 딱 지금의 상황에 열리게 된 것. 그래서 나름 감회(?)가 뜻 깊다.
그렇다면 12년 동안 그의 그림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그림이 점차 젊은 감성을 띠는 모양새다. 서 작가는 민화 외길 인생을 걸어 왔다. 민화는 조선 후기에 유행한 채색화다. 조선 사대부들이 수묵화와 문인화 등에 유교적 이상을 담았다면, 민화는 익살스럽고 해학적인 감성이 특징이었다. 특히 모든 계층을 불문하고 폭넓게 사랑 받았다. 서 작가는 민화의 전통을 이어오는 데 주력했다. 12년 전 전시가 그렇다. ‘전통의 재현’이 주요 모티브였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강렬해진 색감이 눈길을 끈다. 핑크, 노랑 등 화사한 색이 화면을 채웠다. 작품 제목도 모두 기존의 어려운 한자(관상가관, 부귀공명, 풍요다산 등)를 풀어서 썼다. ‘사랑의 세레나데’ ‘사랑하는 별 하나를 갖고 싶다’ ‘새벽에 천천히 문 여는 소리를 들으며’ 등 아름다운 문구가 눈에 띈다. 이유를 묻자 작가는 “관객들과 소통하기 위해서”라고 답했다.
팝아트 같은 민화? 전통 뿌리 지키면서 도전 멈추지 않기
“요즘 젊은 세대는 화려한 이미지에 익숙해요. 또 이해하기 쉬운 걸 선호하죠. 그래서 우리의 옛 그림이 고리타분하거나 어렵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있어요. 예로부터 백의민족이라 했고, 옛 그림이라 하면 수묵화를 많이들 떠올려 우리만의 색감이 절제미가 있지만 단조로운 면도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런데 잘 살펴보세요. 전통 오방색(이때 작가는 지금 나라를 어지럽게 하는 그 오방색이 아니라 강조했다)을 비롯해 병풍, 방석, 배겟보에는 화려한 색이 많았어요. 민화도 이런 색들을 담았죠. 저는 강렬한 전통 색감을 바탕삼아 재창조를 시도했어요. 그래서 멀리서 제 그림을 보고는 팝아트 작품인 줄 알았다고 하는 경우도 있어요. 이 시대에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그림을 보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들이는 것은 중요한 일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 본질을 뒤엎는 것은 아니다. 민화의 가장 중요한 상징성을 바탕에 뒀다. 한국인이 머리카락을 노랗게 물들인다 해도 한국인이라는 DNA가 바뀌지 않듯이 그림 속에 부귀공명, 풍요다산 등 의미를 담은 민화의 본질을 지켰다. 그리고 작가는 이 점 덕분에 민화가 세계에서도 사랑을 받는다고 말했다. 작가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에서도 꾸준히 전시를 열어 왔다. 매년 해외 전시가 있었고, 다가오는 2월부터는 로마에서 전시를 열 예정이다. 모란도, 십장생 등을 담은 우리 민화의 대표적인 장르 35점을 전시한다.
“세계 각국을 다녔는데 민화에 이야기가 담겼다는 것을 신기하게 봤어요. 예를 들어 그림에 호랑이가 등장하는데, 단순히 동물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해학과 익살을 담았다는 것을 알고 재미있다는 이야기가 많았어요. 그들에게는 민화가 스토리텔링을 가진 그림인 거죠. 특히 민화의 한 갈래이자 새해를 맞아 불행을 막고 복을 비는 벽사초복의 의미를 담은 세화에 흥미를 보였어요. 장식적이면서도 실용적이기도 하다며 우리의 그림에 감탄했죠. 저 또한 민화를 그리면서 제게 행복이 찾아왔다고 느껴졌어요. 그래서 더욱 민화에 빠졌는데, 세계의 관객 또한 민화의 매력에 흥미를 느끼더군요.”
또 민화를 본 서양 관객들은 굉장히 색이 화려하고 아름답다고 표현했다. 현재 전 세계 미술 시장에 한국의 단색화 열풍이 불고 있다. 그런데 한국 그림에 이런 다채로운 색의 그림도 있었냐며 관심을 보이는 것. 작가는 “우리의 전통은 단색화만이 전부가 아니다. 자수를 비롯해 수묵화, 나전칠기 등 다양한 곳에 우리의 전통이 녹아들었다. 이런 우리 전통 문화를 지켜가는 것이 중요하다”며 “우리가 한동안은 우리 자체의 문화에 등한시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밖에 나갔을 때는 우리만의 전통성이 필요하다. 세계 문물을 받아들이면서도 우리의 뿌리를 잃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전시는 앞으로의 작가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듯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닭을 소재로 했다. 이해에 어려움이 없다. 예부터 우리나라에서 닭은 부귀공명과 풍요다산을 상징했다. 그런데 서양도 크게 다르지 않다. 전시를 준비하면서 닭에 관한 조사를 했다. 서양에서도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며 닭이 자유를 향한 외침의 상징인 것을 발견했다. 종교에서도 닭의 모습이 보였다. 예수는 베드로에게 “새벽닭이 울기 전, 세 번 부정을 할 것”이라는 말로 믿음을 깨우치려 했다. 동화 ‘브레맨 음악대’에서 닭은 용기의 상징이다. 동화 속 늙은 투계는 음악대에 합류해 자신의 목소리로 용기를 북돋아주는 역할을 한다.
“서양에서 비치는 닭의 모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느꼈어요. 피카소가 그린 수탉은 전쟁의 아픔과 분노를 치유하는 평화의 상징이었죠. 동서양을 막론하고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닭을 주제로 이번에 열심히 작업했어요. 지금은 닭이 부정적인 이미지의 아이콘이 됐지만, 이번을 계기로 닭 그림의 명예회복을 바라요. 본래 닭 그림의 의미를 되새기고, 함께 힘내자고 이야기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