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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천하위공 시대에 사업보국→사업보주로 퇴화한 재벌들

“이게 나라냐”의 속편 “이게 기업이냐?” 듣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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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29호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2017.03.31 15:17:09

▲최영태 발행인-편집국장

한국의 많은 대기업들이 한때 그리고 지금도 ‘사업보국(事業報國)’을 사훈으로, 또는 창업정신으로 기리고 있다. 사업을 일으켜 국가에 보답하겠다니 좋은 말이다. 

특히 한국처럼 거의 모든 대기업이 고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일본에서 끌어온 이른바 ‘청구권 자금’의 혜택을 입고 커온 나라에선, 나라의 은혜를 입어 기업을 크게 일으켰으니 나라에 보답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했다. 

헌데, 잠깐. 여기서 문제 되는 게 하나 있다. 나라 또는 국가가 도대체 뭐냐는 질문이다. 

한때 아름다웠던 사업보국의 세계

지난 3월 19일 방송된 jtbc의 ‘차이나는 클라스’에서 유시민 작가는 “국가란? 없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국가라는 것의 실체를 체감하거나 개념으로 붙잡기는 힘들다는 의미의 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국가를 느낄 때는, 특히 체감할 때는 언제인가? 바로 공무원, 관료, 군인 등을 만날 때 우리는 몸으로 국가를 느낀다. 

그래서 베이징대학의 중국·세계연구센터 판웨이 소장은 “국가(state)는 관가와 비슷하다”고 썼다(‘중국이라는 새로운 국가모델론’ 148쪽). 동양 전통사회에서 국가라 함은 결국 관가(官家: 벼슬아치들이 나랏일을 보던 집)와 연결된다는 의미다. 

정치심리학이라는 새 분야를 일군 고 전인권 교수도 자신의 책 ‘박정희 평전’(2006년)에서 “state(국가)는 조정과 의미가 비슷하다”고 썼다. 한반도에서 전통적으로 국가란 의미는 ‘임금이 나라의 정치를 신하들과 의논하거나 집행하는 곳 또는 그런 기구’를 의미했던 조정(朝廷)과 비슷했다고 본 해석이다.   

국(國)이라는 한자 자체가 이미 이러한 의미를 담고 있다. 유명한 중국인 저술가 이중톈은 2014년 펴낸 ‘이중톈 중국사 제7권 - 진시황의 천하’에서 나라 국(國) 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방(邦)과 국(國)은 다르다. 국은 국도(國都) 즉 도시였다. 방은 여기에 주변의 농촌까지 합친 개념이었다.”(41쪽) 

國 = 서울 = 관가 = 청와대?

중국 역사에서 國이란 기원전 주(周)나라의 천자(天子)가 자신의 형제 또는 자식에게 봉(封)해준 지역을 일컫는 글자였다. 당시 封하는 지역은 대개 사람들이 많이 사는 도시였다. 그래서 國 글자는 도시를 성곽처럼 둘러싼 모양을 상형문자로서 보여준다. 이 성곽도시 주변에는 당연히 농산물 등의 생산을 담당하는 ‘성밖 지역’이 딸려 있었고, 도시인 國과 주변 농촌지역을 합친 개념이 방(邦)이었다는 설명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에 작은 나라는 하나의 국(國都)과 시골로 이뤄졌고, 진(秦)-제(齊)처럼 큰 나라들은 여러 개의 국과 시골로 이뤄졌었다는 게 이중톈의 설명이다.

‘國 = 도시 = 관가’였다면, 지금 우리가 느끼는 개념, 즉 공무원이나 군인을 볼 때 국가라는 실체를 몸으로 느끼는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 다시 사업보국이라는 말로 돌아가 보자. 사업을 일으켜 나라에 보답하자는 이 구호는,  자칫하면 ‘국민(사람) 아닌 국가(관료)’, 한발 더 나아가 ‘국가를 이루는 주요 구성성분인 관가 중에서 가장 힘세고 중요한 청와대’에 보답하기만 된다는 생각으로 연결될 위험성을 그 자체로 품고 있다. 

예전 박정희 시대라면 이런 “사업을 일으켜 청와대에 보답한다”는 개념에 큰 문제가 없을 수 있었다. 즉 당시 한국 국민들은 대기업들의 사업보국 행태에 박수를 보냈다. 이는 “박정희는 성과를 냈고 그 성과가 서민에 돌아가게 했”(책 ‘박근혜 현상’에서 이철희)고, “박정희가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자신의 기득권을 형성하고 유지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다면 굳이 국가의 경제체제를 세심하게 설계하려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도자적 마인드를 갖고 있었음이 분명”(책 ‘우파의 불만’에서 김민하)했다는 평가가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이 커가면서 국민 개개인의 살림살이도 커졌고, 그런 선순환이 ‘사업보국’이라는 구호 아래 이뤄지는 시스템 아래에서 사업보국이 박수를 받는 게 당연했다. 문제는, 지금은 사정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이다. 

대기업에는 사내유보금이 770조 원이나 쌓여 있어 돈이 지천을 이루는 반면, 대기업이 아무리 돈을 잘 벌어도 국민 대부분의 생활은 나빠지기만 하는 현실에서, 박정희가 키운 대기업들이 ‘사업보국’을 한다면서, 國의 상징격인 청와대가 지시하는 대로 미르-K스포츠 재단에 수백 억 돈을 갖다바치고, “우리는 의무를 다했다”고 주장한다면 촛불시민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공자가 주유천하 했듯 세계 누비는 한국인들

여기서 다시 國이란 글자로 돌아가 보자. 國은 주(周)나라의 천자가 봉해준 곳에 세워진 ‘도시국가’가 출발점이다. 설사 이 國에 ‘성밖 농촌’이 더해져 방(邦)으로 커졌다 하더라도, 그 邦은 천하의 일부분일 뿐이다. 그렇기에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에 춘추오패(春秋五覇: 춘추시대 때에 천하를 제패한 다섯 명의 임금)니, 전국칠웅(戰國七雄: 중국 전국시대에 패권을 다투던 일곱 강국) 등의 여러 나라가 있었지만, 당시의 중국인들은 천하를 하나로 생각했기에,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옮겨가는 데 하등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이를 이중톈은 “왜냐하면 중국인은 천하주의자였기 때문이다. 천하주의란 무엇일까. 바로 세계주의 혹은 사해동포주의다. 천하주의자가 보기에 국가는 천하의 한 분자에 불과하며 대가족 안의 소가정과도 같다. 그래서 진정한 인간은 천하에 속할 뿐 국가에 속하지 않는다. 이것이 적어도 춘추전국시대 중국인의 관념이었다”(‘이중톈 중국사 2 - 국가’에서)라고 설명한다.  
 
비록 국적은 노(魯)나라 사람이지만 자신의 정치를 세상에 펴기 위해 천하를 주유(周遊: 널리 돌아다님)하면서 여러 나라에서 관직을 구한 공자의 머릿속에 “나는 노나라 사람이니까 노나라에서만 정치를 해야 한다”는 좁은 관념은 없었다는 소리다.   

과거 박정희 시대에 한국 기업의 활동무대는 한국 안으로 한정됐다. 따라서 “나라의 은혜를 입어 사업을 키운 우리 기업은 나라(=박정희)에게만 보답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미 글로벌 기업으로 커서 지구를 상대로 사업을 펼치는 한국 재벌대기업들이 “세계에서 돈을 벌어 나라(=그 대표인 청와대)에만 보답하면 내 임무는 끝”이라고 생각하면서, 청와대 또는 관료들을 돈으로 구워삶아 특권만 챙기려고 든다면, 이제 그들이 들어야 할 말은 “이게 기업이냐?”는 규탄, 그리고 뒤따르는 처벌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과거 1970~80년대 한국인은 활동무대를 國으로 한정지어도 아무 상관이 없었다. 해외를 나가고 싶어도 나갈 가능성이 희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 한국인은 이미 머리로, 그리고 몸으로 천하인(天下人)으로 살아가고 있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중국인들이 세상을 그리 느꼈듯, “천하엔 여러 나라가 있고 그 중 한 나라에 내가 속해있지만, 내가 이 나라에만 전적으로 귀속되는 건 아니고, 나는 천하의 소속”이라는 생각이 21세기 한국인에겐 너무나 자연스럽다. 바야흐로 ‘천하가 한 집의 사사로운 소유물이 아니’라는 의미의 천하위공(天下爲公) 시대다. 

글로벌 한국 대기업들이 세계를 무대로 돈을 벌면서, 그리고 국민들도 머리와 몸으로 세계를 주유하는 시대에, 재벌대기업들이 “사업보국으로 끝”이라고만 생각한다면 시대착오적이다. 

▲흔히 대기업을 공룡이라고 부른다. 공룡은 멸종했다는 의미도 갖는다. '악해지지 말자'를 사시로 하는 구글 사옥의, 공룡과 홍학이 평화롭게 노니는, '악해지지 않는 공룡'을 형상화한 조각 작품. (사진=위키미디어)


그래서 이제 재벌대기업들의 사훈 또는 기업이념도 좀 바꿔보면 어떨까 싶다. 구글의 ‘악해지지 말자(Don't be evil)’ 같은 사훈은 얼마나 좋은가? 모든 인류에 대해 악해지지 말자, 좋은 일을 하자는 구호이기 때문이다. 

미국 기업엔 “나라를 위해” 이런 사시(社是) 드문데…

마찬가지로 사업보국으로 출발한 한국 대기업들이 이제는 國(=한국의 관가)이라는 좁은 관념에서 벗어나, 사업보민(民)이랄까, 사업보공(公=공공 또는 공화국. ‘헌법 사용 설명서’의 저자 조유진은 공화국을 “누구를 지배하거나 누구로부터 지배 당하지도 않는 평등한 개인들의 동의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로서 사적 이해관계가 아닌 공적 가치에 의하여 구성되고 운영되는 나라”라고 정의했다), 더 나아가 사업보천하(天下=지구)라는 개념으로 이념을 팍팍 넓혀가는 미래를 즐겁게 상상해 본다.

이렇게 기업이념을 바꿔 가야 할 시기에 아직도 사업보주(主), 즉 ‘사업을 일으켜 오너 일가만 도우면 된다’는 시대착오적이고 범죄적인 생각에만 머무는 기업총수일가 또는 그에 복무하는 기업 소속인들이 있다면 반성할지어다. 

▲1976년 천호대교 준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 이때만 해도 '국가=경제=박정희'였으므로, 박정희의 전폭 지원으로 크게 성장한 재벌 대기업들이 "돈을 벌어 박정희와 나라에 보답한다"는 개념에 국민 대부분이 박수를 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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