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 선후배가 뮤지컬 ‘레베카’에서 만났다. 뮤지컬 ‘레베카’ 캐스팅 소식이 알려졌을 때 정성화, 정영주, 김선영, 신영숙 등 스타 캐스팅이 화제가 됐다. 여기엔 옥주현과 루나도 있었다. 90년대 걸그룹 열풍의 중심에 있었던 핑클의 옥주현과, 이후 2010년대 에프엑스 멤버로 활약해 온 루나의 만남에 관심이 쏠렸다.
옥주현과 루나가 걸어온 길은 비슷하다. 둘 다 걸그룹의 메인 보컬로 연예계에 데뷔했다. 그리고 걸그룹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뒤 이후 뮤지컬 도전에 나섰다.
옥주현이 처음 뮤지컬에 도전할 때만 해도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다. 가수들의 뮤지컬 진출이 지금처럼 활발하지 않을 때였고, 데뷔 무대가 대형 뮤지컬 ‘아이다’, 그것도 주연이었기에 “인지도에 기댄 것 아니냐”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옥주현은 아이다 역할을 잘 소화했고, 이후 ‘캣츠’ ‘시카고’ ‘몬테크리스토’ ‘아가씨와 건달들’ ‘황태자 루돌프’ 등 다양한 작품에 꾸준히 출연하면서 뮤지컬 도전이 그저 한시적인 것이 아니라 애정과 열정 아래 이뤄졌음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옥주현이 닦아 놓은 길들을 후배들이 따라 걸었다. 소녀시대의 막내인 서현 또한 뮤지컬 활동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데, 닮고 싶은 선배로 옥주현을 꼽은 바 있다. 후배들에게 동경의 대상이 된 옥주현이다. 루나 또한 꾸준히 뮤지컬 무대에 올라 왔다. ‘금발이 너무해’를 비롯해 ‘하이스쿨 뮤지컬’ ‘코요테 어글리’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다. 공연 관계자들 사이 꼽히는 ‘연습 벌레’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번엔 옥주현과 루나가 ‘레베카’에서 만났다. 아내 레베카의 죽음 뒤 ‘나(I)’를 만나 사랑에 빠지는 막심 드 윈터의 이야기를 그린다. 옥주현은 2013년, 2014년 공연에 이어 이번에도 댄버스 부인 역을 맡았다. 레베카에 대한 그리움이 넘어선 집착으로 나(I)를 내쫓으려 하는 인물이다. 댄버스 부인은 옥주현의 ‘인생 캐릭터’로 불리기도 할 정도로 매번 높은 싱크로율을 보여줬다. 루나는 이런 댄버스 부인에게 처음엔 휘둘리지만, 점차 자신의 굳건한 의지로 일어서는 나(I)를 맡았다.
두 사람이 동시에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흑백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어둠을 상징하는 댄버스 부인은 시종일관 칠흑같이 어두운 복장에 얼굴에 미소 한 번 보이지 않는다. 반면 천진난만하고 순진한 나(I)는 어두웠던 막심 가에 한줄기 빛과 같은 밝은 기운을 내뿜는다.
옥주현과 루나의 이미지가 각각의 역할에 잘 부합된다. 평소 카리스마 있는 모습과 풍성한 성량으로 무대를 휘어잡아 온 옥주현은 그 누구에게도 굴복하지 않는 댄버스 부인을 제대로 소화한다. 평소 밝은 이미지로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 온 루나는 나(I)로서의 고군분투를 보여준다. 댄버스 부인의 계략으로 위기에 처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극복해나가는 모습은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라는 캔디와는 또 다르게 당당한 여주인공의 면모를 보여준다.
가장 압권인 장면은 역시 댄버스 부인과 나(I)의 갈등이 치닫는 대표곡 ‘레베카’다. 댄버스 부인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또한 주위의 사람들이 홀린 듯 레베카를 기억하는 모습에 힘들어하는 나(I). 그런 나(I) 앞에서 댄버스 부인이 “레베카” 이름을 열창하면서 나(I)를 내몰기 위해 죽음의 유혹을 귓가에 속삭인다.
‘레베카’는 그냥 고음만 질러대서는 매력이 살 수 없는 곡이다. 레베카에 대한 광기 어린 그리움과 여기에 나(I)에 대한 경계심이 복잡하게 뒤섞인 가운데 노래는 고음으로 치닫는다. 그리고 이 곡에서 옥주현은 “역시 옥주현”이라는 탄성을 자아내게 한다. 노래가 끝난 뒤 한동안 공연을 이어갈 수 없을 정도의 환호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루나의 변신도 눈길을 끈다. 루나는 에프엑스 활동 당시에는 파워풀하고 쭉 뻗어나가는 진성이 특징이었다. 그런데 ‘레베카’ 무대에서의 루나는 외강내유의 면모를 지닌 나(I)의 목소리를 약한 듯 강하게 표현해 낸다. 목소리 연기 톤도 점점 안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을 더욱 기대하게 만든다. 걸그룹 선후배인 두 사람이 만나 꾸려가는 무대가 인상적이다. 공연은 블루스퀘어 삼성전자홀에서 11월 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