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순간 기억을 다시 더듬어 봤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가 원래 이랬던가? 아니다. 공연을 이루는 큰 줄기인 노래들은 편곡과 노랫말이 바뀌긴 했지만 그대로 극에 등장한다. 죽음을 앞둔 주인공 명우가 노래를 따라 지난 젊은 날을 추억한다는 큰 줄거리도 같다. 하지만 그 외에는 다른 작품이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많이 바뀌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광화문 연가’ 특유의 아련한 정서는 지켰다. 이 오묘한 변화는 뭘까?
‘광화문 연가’는 故 이영훈 작곡가의 대표곡들로 이뤄진 작품이다. 이 노래들이 극 중 명우의 삶을 이야기하는 데 쓰인다. 이렇게 명우는 그대로인데 새로운 등장인물이 있으니 바로 월하.
명우는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순간에도 젊은 시절의 첫사랑 수아를 잊지 못한다. 하지만 지금 명우의 옆에는 수아가 아닌 아내 시영이 있다. 이대로 떠나야 하나 싶은 순간 명우의 눈앞에 월하가 나타난다. 월하는 자신이 “사람과 사람 사이 인연을 맺는 역할을 한다”며 이른바 삼신할미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하지만 명우의 경우 “그 인연이 꼬인 케이스여서 미안하다”며 세상을 떠나기 전 미련을 떨칠 수 있도록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는 여행을 떠날 시간을 주겠다고 한다. 그가 말한 여행은 바로 과거로의 여행. 순식간에 월하와 명우의 눈앞엔 명우가 수아를 처음 만난 고등학생 시절이 펼쳐진다.
극은 명우가 고등학생 수아가 대학생이었던 시절의 풋풋한 첫 만남부터 가슴 아픈 이별, 그 뒤의 방황까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명우와 수아의 이야기를 소개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는 왜 명우와 수아가 이별을 겪어야 했는지 시대적 상황까지 함께 이야기된다. 1980년대 민주화를 부르짖은 학생시위대와 이를 무력으로 탄압한 경찰. 수아는 친구들이 붙잡혀가고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는 상황을 외면하지 못해 명우와의 사랑보다는 현실 인식에 대한 고뇌를 선택한다.
이것이 ‘광화문 연가’가 간직한 정서다. 광화문 연가는 지금의 중년 세대가 청년이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민주화사회라고 하지만 마음껏 자유를 외치지 못했던 시대, 그 시대에 대한 저항으로 통기타를 들고 저항의 노래를 부르던 청년들, 그 사이 꽃핀 좌절과 희망 그리고 사랑까지. 이 모든 정서가 그 시절 사람들의 가슴을 파고든 故 이영훈의 노래를 통해 관객들에게 전해진다. 노래가 가진 힘과 고선웅 작가의 대본, 이지나 연출가의 무대 구성력까지. 이렇게 서울시뮤지컬단과 CJ E&M이 공동 제작한 ‘광화문 연가’는 단순 재공연이 아니라 독창성을 띤 공연으로 재탄생하는 데 성공했다.
여기에는 월하 역 배우들의 공헌도 크다. 특히 차지연은 이번 ‘광화문 연가’에서 딱 맞는 옷을 입었다. 차지연이 연기했을 때 특히 인상 깊었던 역할이 ‘서편제’의 송화인데, 이번에도 인생 캐릭터를 만난 모습이다. 이지나 연출은 월하라는 캐릭터를 본 순간 자연스럽게 성별의 구분이 사라지면서 정성화, 차지연이 떠올랐다고 하는데 그 선견지명이 놀랍다.
평소엔 푼수에 눈치도 없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누구보다 내면에 진지함과 따뜻함이 가득한 인물. 월하가 그렇다. 월하는 ‘광화문 연가’에서의 푼수 분위기 메이커다. 자칫 신파로 흐르거나, 요즘 젊은 세대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또는 지루한 분위기로 흐를 수도 있는 극의 분위기에 “하하” 웃으며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런데 진지한 다른 캐릭터들 사이 월하가 너무 농담을 날리면 혼자 캐릭터가 붕 뜰 수도 있다. 혼자 무대 위에서 웃고 객석에서는 정적이 흐르는 민망한 상황이 생길 수도 있는 것. 그래서 너무 오버하지 않고, 정도를 지키는 게 중요한데 차지연이 이걸 기가 막히게 캐치한다. 한 마디로 월하가 된 그녀가 관객들을 들었다 놨다 한다. 이전 장면에서 월하의 농담에 웃음이 터졌다면, 이후 이어지는 월하의 노래에 눈물짓게 된다.
이런 ‘광화문 연가’를 보고 있노라면 최근 1000만 관객을 돌파해 화제가 된 영화 ‘신과 함께’가 떠오른다. ‘신과 함께’는 주호민 작가의 웹툰이 원작이다. 원작을 모두 챙겨봤었는데 영화화 소식을 듣고 반가운 동시에 큰 실망도 했었다. 원작 속 주요 캐릭터인 진기한 변호사가 영화에서는 실종됐다는 것. 이에 “원작과 이름만 같고 완전 다른 작품 아니냐” “이건 ‘신과 함께’가 아니다”라는 팬들의 아쉬운 목소리가 있었다. 그런데 영화 개봉 이후 상황이 반전되기 시작했다.
‘신과 함께’는 원작을 바탕으로 하되 기존 캐릭터들에 변화를 주고, 극적인 드라마를 강조하며 원작과는 또 다른 매력을 선보였다. 팬들이 아쉬움을 토로한 진기한 변호사의 역할을 극 중 강림차사 역을 맡은 하정우에게 덧씌웠고, 죽음을 맞은 김자홍과 원귀가 된 김수홍 사이의 관계성도 부여했다. 모두 원작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점들이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조화를 바탕으로 “원작 파괴”에서 “원작만큼 매력 있는 새로운 작품”이라고 평가를 돌렸다.
‘광화문 연가’ 또한 “예전 공연과 비교해 살짝 바뀌었겠지”라는 예상을 보기 좋게 깨뜨렸다. 평범한 업그레이드가 아니라, 공연을 이루는 중심 캐릭터에까지 손을 대는 대공사. 무리수가 될 수 있는 이 도전을 성공시키려 노력한 지점들이 돋보인다. 또 당연히 ‘이런 감동을 주면서 끝나겠지’ 싶은 지점에서 또 다른 반전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 반전에서 발생하는 감동의 여운이 더욱 크다. ‘이런 식으로도 공연이 재탄생할 수 있구나’ 신선함을 느꼈다. 이렇게 되니 다음 ‘광화문 연가’가 자연스럽게 기다려진다. 공연은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1월 14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