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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싶다”던 정강자 이야기

아라리오 서울-천안서 타계 이후 첫 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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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74-575호 김금영⁄ 2018.02.06 09:50:07

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한강변의 타살(Murder at the Han Riverside)’. 1968. 10. 17. (사진=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이 무슨 짓이냐” 빈축. 1968년 10월 19일 신문에 실린 기사 제목이다. 정강자(1942~2017) 작가가 참여한 퍼포먼스 ‘한강변의 타살’(1968)을 다룬 기사였다. 모래 구덩이에 작가들이 들어가면 관객들이 한강물을 퍼붓는 형식으로 진행된 퍼포먼스는 기성 미술계에 대한 비판의식에서 비롯됐다. 하지만 당시 이를 바라본 사람들의 시선은 기사 제목처럼 차가웠다.

 

또 다른 퍼포먼스 ‘투명풍선과 누드’(1968)는 선정성 논란에 휩싸였다. 정강자의 몸에 붙인 투명한 풍선을 강국진, 정찬승이 터뜨리는 이 퍼포먼스는 기존의 남성 중심적인 세계관에 도전한 페미니즘 정신으로 현재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퍼포먼스가 시연된 1960년대에는 “자극적인 퍼포먼스로 관심을 끌려고 하는 여성 작가”라는 말이 주홍글씨처럼 정강자에게 따라 붙었다. 작가가 어떤 의도로 이 퍼포먼스를 펼쳤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하지 않았고,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정강자, ‘투명 풍선과 누드(Transparent Balloon and Nude)’. 1968. 5. 30.(사진=강국진, 정강자, 정찬승)

정강자는 ‘청년작가연립전’(1967) 등 당시 주류 미술에 대한 젊은 작가들의 도전을 응집한 전시에 한국 아방가르드 미술 그룹 ‘신전(新展)’ 동인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전위적 행위미술 그룹 제4집단의 멤버로 활동하면서 특히 자신의 여성성을 숨기지 않은 과감한 작업과 행보를 선보였다. 1970년대 후반부터는 퍼포먼스뿐 아니라 회화 작업에도 전념하며 자신의 삶을 다양한 여성상과 자연물, 그리고 기하학적 형태에 투영했다. 하지만 당시 시대적 잣대에 의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했고, 이슈가 된 대표작 ‘투명풍선과 누드’ 이외 구축된 정강자의 다양한 예술 세계에 대한 다각적인 접근도 부족했던 현실.

 

이 가운데 아라리오갤러리가 정강자의 50여 년 작업을 다시 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한국 초기 전위예술을 이끌고, 평생 ‘한계의 극복’과 ‘해방’을 주제로 탐구해온 작가 정강자의 타계 이후 열리는 첫 전시다. 본래는 생전 작가와 전시 준비를 시작했으나 지난해 7월 작가가 지병으로 갑작스럽게 별세하면서 회고전이자 유작전이 됐다. 그렇지만 전시를 준비할 때 생전 작가가 보여주고 싶어 했던 작품들을 최대한 모아 보여주며 다시 정강자를 만날 수 있는 자리가 될 수 있도록 신경을 기울였다.

 

정강자의 대표작 ‘억누르다’(앞)가 전시장에 재현돼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과 천안에서 동시에 열린다. 천안은 정강자의 회화 작품을 포함해 바틱 작업, 조각, 소품을 전시하고, 서울은 시기별 대표 작품을 선정해 보여준다. 이중 서울 전시장을 방문했다. 전시장 1층은 정강자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를 모은 아카이브실로 꾸려졌다. 앞서 언급된 1960년대 정강자의 작업을 다룬 신문 기사를 포함해 당시 퍼포먼스 사진, 정강자의 기고가 실린 신문 등 다양한 자료들을 모아 선보인다.

 

아라리오갤러리는 “이번 전시는 시대의 잣대나 이론적 구조에서 좌초돼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한 정강자의 작업을 다시 보여주는 자리다. 그래서 타성에 젖어 쓸데없는 미사여구를 길들이기보다는 최대한 객관적으로 작가의 작업을 보여주려 했다. 아카이브 공간도 이런 측면에서 마련했다. 다양한 자료들을 보고 정강자의 작업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건 관람자의 몫”이라고 밝혔다.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가 열리는 아라리오갤러리 서울 전시장에 정강자에 대한 아카이브 자료가 전시됐다.(사진=아라리오갤러리)

 

시대의 잣대 속 “이 무슨 짓이냐” 빈축 들었던 작업
2018년 다시 관람객과 만나다

 

정강자, ‘빠른 템포로 춤추는 여자(Woman Dancing in Rapid Tempo)’. 캔버스에 오일, 162 x 130.3cm. 2015.(사진=아라리오갤러리)

지하 공간에는 정강자의 대표작들을 시대별로 구성해 배치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전시장 한 가운데 위치한 ‘억누르다’이다. 정강자가 1968년 제작한 이 작품은 여러 층의 대형 목화솜 한 가운데 쇠파이프를 얹어 솜의 중앙이 눌린 형태를 띠고 있다. 작가가 만들었던 본래의 작품은 사라졌지만 이 작품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작가의 강한 의지를 반영해 아라리오갤러리가 2018년 전시 공간에 다시금 재현했다.

 

이 작품에서 옷이나 침구류의 재료가 되는 솜은 전통적 여성의 역할과 맥락이 닿는다. 그리고 이 가벼운 솜을 철제 파이프가 억누르고 있는데, 이 파이프는 남성의 남근을 떠오르게도 한다. 아라리오갤러리는 “정강자는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이야기한 적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억누르다’를 통해 당시의 성별 이데올로기와 성 정치의 역학 관계를 유희하는 등 페미니즘에 대한 의식이 그의 작업 전반에 깔려 있었음을 느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강자, ‘사하라(The Sahara)’. 캔버스에 오일, 162.2 x 130.3cm. 1989.(사진=아라리오갤러리)

‘명동’(1973)에서도 주체적인 여성의 모습이 눈에 띈다. 수많은 사람들 속 상의를 탈의하고 앞을 향해 뛰어오는 한 여성의 모습이 보인다. 아라리오갤러리는 “이 여성은 정강자 자신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전통과 현대의 위계에 도전하는 작업을 펼친 정강자는 주체의식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여성의 몸이라는 섹슈얼리티를 전면에 내세웠다. ‘명동’뿐 아니라 ‘키스미’(1967)는 여성의 입술, ‘스톱’(STOP, 1968)은 여성의 둔부, ‘여인의 샘’(1970)은 여성의 가슴을 형상화한 작품”이라고 설명했다.

 

‘한복의 모뉴먼트’(1998)에는 한복 치마가 보인다. 정강자는 한복 치마를 “수천 년을 남성 우월주의의 지배에서 억압받고 유린당해 온 우리 여인들의 깃발”이라며 “어머니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것”으로 언급하기도 했다. 오래도록 한국 여성의 가슴을 졸라 맨 한복 치마는 정강자의 화면 속에서는 끈이 풀린 채 하늘을 자유롭게 훨훨 날아다닌다.

 

정강자, ‘환생(The Rebirth)’. 캔버스에 오일, 161 x 260cm. 1985.(사진=아라리오갤러리)

여성의 신체를 적극적으로 화면에 드러내며 다양한 이야기를 꺼낸 정강자. 하지만 신체를 활용한 활동에 정부의 제재가 심화되기 시작했던 1970년 첫 개인전 ‘무체전(無體展)’이 강제 철거되는 일을 겪는다. 이에 작품 활동을 중단하고 가족과 싱가포르로 이주하면서 10여 년 한국 미술계를 떠났지만 작업 활동은 멈추지 않았다. 70~80년대에는 중남미 8개국, 아프리카 8개국, 서남아시아 6개국, 남태평양 6개국을 여행하면서 자유로운 영혼을 화면에 담기 시작하며 작업 세계를 보다 확장했다. ‘환생’(1985), ‘사하라’(1989) 등 화려해진 색채와 더불어 어딘가를 날아가는 듯한 자유로움과 강인함이 느껴지는 작품들도 이번 전시에 함께 선보인다.

 

위암 말기 판정을 받은 작업 후반기엔 죽음에 대한 성찰이 화면에 드러난다. 전시 제목 ‘마지막 여행은 달에 가고 싶다’는 투병 중 작가가 2015년 그린 작품명에서 따온 것이기도 하다. 이 시기에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원을 상징화해 화면에 들여오며 고독한 인간의 여정을 화면에 펼쳤다.

 

아라리오갤러리 측은 “작가의 작업은 작가 개인에서 인간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가 우주적 관심으로 확장됐다. 눈앞에 놓인 표면적인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창조적 열망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정강자의 주체적 태도를 이번 전시에서 읽어볼 수 있다”고 밝혔다. 어딘가에 구속되지 않고 열정과 자유를 부르짖던 정강자의 이야기는 2018년 오늘도 사람들의 가슴에 와 닿는다.

 

정강자, ‘홍익대학교 회화과 4학년 실습실에서’. 1966.(사진=고 정강자 유족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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