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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 전시]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은 박대성

인사아트센터에서 서예·불국사 시리즈 등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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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76호 김금영⁄ 2018.02.23 09:40:03

박대성 작가.(사진=김금영 기자)

(CNB저널 = 김금영 기자) 1994년 현대미술을 탐구하기 위해 뉴욕 소호로 떠난 박대성. 그랬던 그가 지금은 한국 경주로 작업실을 옮겨 수묵화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무엇이 그의 발걸음을 경주로 향하게 했을까.

 

가나아트의 첫 번째 전속 작가인 박대성의 개인전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가 3월 4일까지 인사아트센터 전관에서 열린다. 작가의 서예 작품과 함께 경주 불국사 시리즈 등 신작 100여 점과 작가의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을 전시하며 한국화에 대한 이야기를 전한다.

 

한국 미술계에서 수묵화를 이어가는 작가가 점점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김형국 가나문화재단 이사장은 “80년대 초 미국 추상 표현주의가 주를 이루면서 수묵화가 침체되기 시작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이 현상에 대해 ‘수묵화가 변화하는 시대에 대한 리얼리티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농경시대에 주를 이룬 수묵화가 산업시대의 요소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였다”라고 짚었다.

 

박대성, '효설(曉雪)'. 종이에 잉크, 235 x 780cm. 2018.(사진=가나아트)

김 이사장은 이어 “환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선호하는 그림 양식이 바뀌기 시작하면서 중국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수묵화를 하는 사람들이 어느 날 추상 화법으로 작업을 바꾼다든지, 서양 화법으로 물감을 바꿔버리는 경우가 흔히 생겼다. 그러면서 수묵화는 빈사 상태가 됐다”며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수묵화 자체를 평가하기보다는 자본적인 측면에서 비싸게 팔릴 수 있는 스타일의 수묵화에만 집중하는 경향도 생겼다”고 꼬집었다.

 

이 가운데 김 이사장은 박대성 작가의 작업을 보고 머리를 크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감동의 울림을 느꼈다고 전했다. 그 감동의 결과가 이번 전시 제목인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로 나타났다. 김 이사장은 “새로운 시대에 발을 맞추는 모더니즘이 지금 세계 미술을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더니즘에도 입체파, 초현실주의 등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우리의 모더니즘은 무엇으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궁금했다. 그런데 박대성 작가의 화풍에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한국화의 경계를 끊임없이 확장시킨 그의 작업은 수묵화의 전통을 이어갈 뿐 아니라 자신만의 독특한 화풍 또한 일궈내고 있었다”고 말했다.

 

박대성 작가의 '수묵에서 모더니즘을 찾았다'전이 열리는 인사아트센터 전시장.(사진=김금영 기자)

한국화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계승하고, 더 나아가 수묵을 현대화시켰다는 평가를 받는 작가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는 않았다. 중국 청나라 초엽의 화가 왕개(王槪)·왕시(王蓍)·왕얼 3형제가 편찬한 화보 개자원화전을 보며 독학으로 그림을 익혔고, 집안어른의 소개로 18세 때부터 서정묵의 문하에서 5년 동안 그림을 배웠다. 이후 이영찬 작가와 박노수 교수의 조언을 받으며 공부했다. 그 성과를 증명하듯 작가는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열린 국제 미술대전에서 1965년 첫 입선을 시작으로 6년 연속 입상했다.

 

빛나는 시기였지만 오히려 이때 작가는 고민이 많았다고 한다. 그는 7세부터 붓을 들고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 한국전쟁을 겪었다. 이 과정에서 부모를 여의고 왼쪽 팔을 잃는 아픔까지 겪었다. 작업 환경도 점점 어려워졌다. 그래서 1974년 대만으로 유학을 떠났다.

 

“당시 여권이라는 개념 자체도 잘 세워져 있지 않았던 시절이었어요. 하지만 그림을 그리기 위해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고 대만으로 떠났죠. 새롭게 마주한 대만의 풍경이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어요. 매일 돌아다니면서 스케치를 했죠.”

 

서화(書畫)가 아닌 화서(書)

 

박대성, '탈(假面)'. 종이에 잉크, 250 x 58.5cm. 2018.(사진=가나아트)

대만에서 보낸 1년의 시간은 작가의 작업 세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대만 고궁박물관에서 일반인에 공개되지 않는 그림을 매일 두 점씩 볼 수 있는 참관증을 받았고, 다양한 그림을 접하고 공부하면서 1979년 중앙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하며 동양화단에 이변을 일으켰다.

 

그리고 이번엔 뉴욕 소호로 발걸음을 옮겼다. 작가는 “사실적인 표현도, 스케일도 작업하는 데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현대미술의 메카가 어디냐고 물어보니 이호재 가나아트 회장이 뉴욕 소호라고 알려줬다. 그길로 뉴욕으로 향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런데 오히려 그곳에서 작가는 우리 전통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를 맞았다고.

 

“뉴욕에서 ‘잉크와 브러시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습니다. 필묵(筆墨)에 대한 이해가 없었죠. 그러다보니 대화 자체가 잘 안 되더라고요. 뉴욕에서 많은 작품을 보면서 추상성에 대한 이해를 높였지만, 정작 중요한 건 우리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저 흉내내는 데에만 그친다면 속은 텅 빈 그림이 될 수밖에 없죠. 이 깨달음은 서(書)에 대한 관심으로도 이어졌습니다.”

 

박대성, '부처바위(옥룡암)'. 종이에 잉크, 271 x 503cm. 2017.(사진=가나아트)

그래서 작가는 1999년 보따리를 싸고 경주로 갔다. 작가는 “어디에서 어떻게 내 일생을 보내는 지도 작업에 매우 중요하다”고 이유를 밝혔다.

 

“윤범모 미술 평론가와 7~8년 히말라야 원시 마을을 여행했고, 히말라야, 제주도, 마산 등 다양한 곳을 갔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정착지는 경주였어요. 경주는 도시 자체가 문화유산이에요. 어디를 둘러봐도 수천 년의 세월을 담은 유물이 있고, 한국 역사를 품고 있죠. 이런 경주의 환경이 제게 좋은 영감을 줬습니다. 마치 경주가 저를 부른 느낌을 받았죠.”

 

박대성, '법의'. 종이에 잉크, 270 x 325cm. 2010.(사진=가나아트)

경주로 작업실을 옮긴 뒤 ‘서’에 대한 관심을 본격적으로 작업에 풀어내기 시작했다. 김생, 김정희, 모택동, 갑골종정 등의 작품을 통해 서의 연마에 매진했다. 서를 글이라기보다는 사물의 형태와 의미를 나타내는 디자인적인 측면에서 접근했다. 서 자체에 대한 조형적 탐구를 거치면서 서의 필법을 회화에 사용한 것.

 

“실크로드에서 바위에 새겨진 상형문자를 보고 수없이 스케치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이 상형문자들이 글씨의 원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죠. 흔히들 서화(書畫)라고들 이야기하는데, 그림이 먼저 시작되고 그 다음에 글씨가 온 화서(畫書)라는 걸 깨달은 순간이었죠.”

 

박대성, '노매(老梅)'. 종이에 잉크, 23 5 x 150cm. 2018.(사진=가나아트)

작가의 생각은 중국의 “그림과 서예에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서화동원론(書畫同源論)과도 일맥상통한다. 작가는 “글씨를 잘 쓰면 그림을 잘 그리고, 그림을 잘 그리면 글씨를 잘 쓴다”고 간단하게 정리했다.

 

작가는 서의 선에 주목하고, 사물을 최대한 절제해 표현하는 반추상적인 표현 방법을 통해 전통과 현대를 아우른다. 자연 풍경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는 한 화면에서 공간을 재구성하고 왜곡하면서 사물의 본질을 찾는 데 주력한 작업들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특히 폭이 5m에 달하는 대작들은 현대적 수묵화의 기운생동하는 새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가나아트는 “이번 전시가 한국화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일깨울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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