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저는 공평한 게 좋아요. 한쪽이 전지전능한 입장에 있다면 제대로 앞에 있는 상대를 마주할 수 없죠. 이 상태에서 진정한 감정 교류가 이뤄질 수 있을까요?”
자신의 키를 훌쩍 넘는 150호 대작들을 대거 선보인 신민주 작가. 그는 작업 방식에 대한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엄청난 크기의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려면 캔버스를 바닥에 눕혀 작업하는 게 편했을 텐데 그것은 공평하지 않단다. 마치 캔버스를 작업 도구가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는 느낌. 그렇다. 작가는 캔버스를 자신의 또 다른 분신으로 여기고 있었다.
PKM갤러리가 신민주 작가의 개인전 ‘추상 본능’을 3월 29일까지 연다. 작가는 근원적인 예술 행위인 붓질을 기반으로, 회화의 본질을 오랜 시간 탐구해 왔다. 하지만 처음 그림을 시작할 때는 심각하지 않았다는 게 작가의 고백이다. 평범한 환경에서 큰 문제없이 자라 남들처럼 대학에 갔는데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대학생 시절 무엇을 가장 열심히 했나?” 물으니 “술 마시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답해 웃음을 자아냈다. 그랬던 작가가 대학원에 가서 그림을 본격적으로 마주하기 시작한다.
“영화와 사진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복제하는 작업에 재미를 느꼈어요. 지금 하고 있는 추상 작업과는 다른 스타일이었죠. 본래의 이미지와는 또 다른 화면이 탄생되는 과정이 흥미로웠어요. 재미를 느끼면서 점점 작업에 몰두하는 시간이 길어졌죠.”
그리고 작가는 또 다른 인생의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사랑에 빠져 결혼한 것. 행복했지만 고통도 함께 있었던 시간이었다. 혼자 자유롭게 살던 작가는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새로운 환경을 맞으면서 때로는 포기해야 하는 것들도 생겼다. 작업할 시간도 줄어들었다. 그것이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억압이라 느껴졌다. 가슴이 답답하고 때로는 화가 치밀기도 했다. 2008년엔 스트레스로 몸이 약해져 갑상선암 수술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작가는 “내가 절대적인 고통을 직면했던 건 아니다”라며 덤덤하게 말을 이어갔다.
“제가 겪은 고통은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 결코 특별하거나 심각하지 않아요. 사람들은 누구나 각자 자신이 마주한 상황에서 고통스러운 순간들이 있잖아요? 남들이 봤을 땐 아무렇지 않은 있는 일이 제겐 큰 고통일 수도 있고, 남들이 힘들어하는 것에 저는 괜찮을 수도 있죠. 상대적인 고통을 누구나 안고 살아가죠. 제게도 그런 고통이 찾아왔던 거예요.”
현실에서 무력감을 느끼던 작가는 한동안 소홀했던 작업에 다시 눈을 돌렸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과연 내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고민하다가 근본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겉치장으로 화려하게 꾸민 화면이 아니라 그 안에 숨은 순수한 근본을 찾아가면서 스스로가 흐르는 시간 속 감춘 내면 또한 돌아보고 싶었던 것.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참혹함을 경험한 인류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나 도상적인 작업에 도취되지 않고, 화면이 행동의 장이 되는 액션 페인팅으로 돌아섰죠. 저 또한 제 개인의 서사에서 고통을 직면하면서 작업에 변화를 맞게 됐어요.”
여기저기 흘러내리고 튄 물감도 바로 나
붓과 물감을 들고 캔버스 앞에 다시 선 작가는 거침없이 붓질을 시작했다. 기본색인 흰색과 검은색을 주로 사용했다. 특히 모든 캔버스를 세워놓고 작업하는 걸 고집했다. 권위적으로 화면을 지배한다는 생각을 지우기 위해서. 작가는 “내가 우위를 점하지 않고, 똑바로 서 있는 캔버스에 돌진해 내가 느끼는 감정들을 마구 풀어낸다”고 말했다. 그리고 캔버스를 세워놓으면 물감이 위에서 아래로 흘러내리는데 이것 또한 작가가 원하는 바다.
“큰 그림을 어쩔 때는 하루 만에 다 그릴 정도로 온전히 저를 쏟아 부어요. 그래서 저는 제 그림이 저를 꼭 닮은, 저를 말해주는 존재라고 느껴요. 화면에서 일어난 우연들도 모두 그대로 둬요. ‘이런 형상을 그려야지’ 의도하지 않고 마음 가는 대로 붓질을 하죠. 흘러내린 물감을 어떤 사람은 실수, 또는 오류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저는 제 붓질에서 파생된 모든 부수적인 것들까지 바로 제 모습이라고 생각해요. 어느 하나 버릴 게 없어요. 그래서 물감이 이리저리 튄 자국, 흘러내린 자국까지 모두 수용합니다.”
화면 속 물감들이 종잡을 수 없이 튄 거친 느낌, 그 주변에 부드럽게 흘러내린 물감 자국 모두 예측할 수 없었고, 앞으로도 예측 불가능한 작가의 인생사와 똑 닮았다. 그 자연스러움이 더욱 눈길을 끈다.
이번 전시에서는 색이 더 다채로워진 점이 돋보인다. 지난 10년 동안 흰색, 검은색 물감을 주로 사용했던 작가는 스스로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과정에서 한 걸음 더 뒤로 물러설 줄 알게 됐다. 눈앞에 있는 힘든 현실만 보기 바빴다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신을 객관화시켜 바라보니 미처 보지 못했던 더 다양한 감정들이 있었다는 걸 발견했다. 이 이야기들을 흰색, 빨간색, 분홍색, 푸른색 등 더 다양해진 색으로 화면에 담았다. 멀리서 봤을 땐 검은색 일색인줄 알았던 화면에 가까이 다가가면 그 아래 먼저 칠해졌던 분홍색을 발견하게 되는 등 작가가 그림을 그리면서 느낀 수많은 감정의 소용돌이가 색을 통해 전해진다.
“지금 제 화면이 비로소 저다워진 것 같아요. 그림을 그리면서 몸은 고되지만 카타르시스를 느끼죠. 하루에도 수십 번 바뀔 정도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그렸던 화면 위에 다시 물감을 덮어 완전히 다시 시작할 때도 있어요. 그런데 그렇게 꾸준하게 화면을 마주하고 부딪치는 과정 자체가 아름답다고 느껴요. 저는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에요. 스스로 훼손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참지 못했던 화와 고통을 그림을 그리면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죠.”
그림을 그릴 때 스스로에게 가장 솔직해진다는 작가. 추후의 화면은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