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비 서버 접속에 문제가 있습니다. [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4) 인왕제색도 上] 그림길 따라 필운대에 취하니 연암·다산 자취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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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정선 그림 속 길을 간다 (4) 인왕제색도 上] 그림길 따라 필운대에 취하니 연암·다산 자취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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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78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3.12 09:38:19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겸재의 그림은 걸작 아닌 것이 드물지만 그 중에서도 최고의 걸작을 고르라 한다면 많은 이들이 금강전도(金剛全圖, 국보 217호)와 인왕제색도(仁王霽色圖 국보 216호)를 떠올릴 것이다. 오늘은 그중 인왕제색도에 숨겨져 있는 길을 걸어보려 한다. 인왕제색도에는 네 개의 봉우리가 그려져 있고 가운데 두 봉우리 사이 골짜기가 깊이 숨어 있다. 지난 3회에 걸쳐 소개한 창의문도에서는 이 인왕제색도에서의 오른 쪽 두 개 봉우리를 지나 홍지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걸었다. 이제부터는 중앙의 인왕산 주봉과 좌측 봉우리를 지나보려 한다. 이 길을 걷다보면 또 다른 행운을 만나는데, 겸제의 또 다른 그림 필운대(弼雲臺), 필운상화(弼雲賞花), 육강현(六岡峴, 六角峴)도를 만나게 된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선다. 서촌으로 향하는 출발점이다. 90년 전에는 창의문에서 발원한 백운동천이 흘러내려 서울시경 방향으로 흘러가던 청계천의 젖줄이었다. 그 개울 위로는 금청교(禁淸橋)가 놓여 있었다. 전해지기로는 금교(禁橋), 금천교(禁川橋, 錦川橋), 다리 모양의 동그란 안경알처럼 생겼기에 앵경다리(안경다리)라 했다 한다. 5군영의 하나인 금위영이 가까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하는데 이 다리는 고려 충숙왕 때 세웠다 하니 나이도 참 많았다. 그런데 1928년 6월 자하동천을 복개하기에 이르렀으니 아름다운 금청교는 해체되고 남은 흔적은 캄캄한 도로 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 당시 서촌 지역은 이미 일본인들과 친일 세력들이 대규모로 땅을 점유했던 시기였으니 아마도 백운동천의 복개가 필요했을 것이다.

인왕제색도. 사진 출처 = 문화재청

3개의 동그란 아취가 균형을 잡고 아취 사이에는 두 개의 무섭게 생긴 짐승의 얼굴을 새겨 넣어 감히 악한 기운은 흠칫, 뒷걸음칠 것 같다. 상상의 동물로 사흉(四凶)의 하나라는데 이름이 도철(饕餮)이고 식탐이 심해  무엇이든지 먹어치우는 괴물이라니 살금살금 피해 다녀야 했을 것 같다. 금청교를 해체하던 날 이 도철은 따로 보관했다 하는데 빨리 찾아서 이 나라에 해코지하는 이들을 향해 걸어 놓았으면 좋겠다. 자료 사진으로는 확인이 안 되는데 난간에는 연꽃도 새겨 넣었다 하니 고려가 남경(南京, 고려적 서울을 부르던 지명) 경영을 소홀히 하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금청교 자료사진. 

이제 옛 지도를 들고 그림 속 길 출발이다. 지하철 출구 앞쪽으로 과일 가게와 빵집이 보이고 그 사이 작은 골목길이 보인다. 금청교/금천교 시장 길이다. 요즈음은 체부동(體府洞) 시장이라는 이름이 더 많이 사용되는 것 같다. 이름도 낯선 체부동이라는 지명은 서울 지명 사전을 찾으니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체찰사부(體察使府, 체부청/體府廳)라는 관청이 있던 데서 유래되었다. 체찰사는 왕의 뜻을 받들어 임지에 나가 장병들을 시찰 독려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옛 지도 위에 표시한 답사 코스. 

그랬었구나. 시장은 지붕도 덮지 않은 채 옛 그대로인데 바닥을 내려다보면 맨홀 뚜껑이 자주 보인다. 필운대 골짜기에서 흘러내리던 실개천의 흔적이리라. 3년 전만 해도 이 시장에 들어서면 가게 앞길에 앉으셔서 무쇠 솥뚜껑 위에 기름을 두르고 간장 양념으로 떡볶이를 하는 호호할머니가 계셨다. 고춧가루 양념으로 하는 것도 있었지. 그 감칠맛이라니. 언제부턴가 인왕산에 오르는 길이면 이곳에 들러 떡볶이를 사곤 했었다. 한 삼천 원어치만 사면 두엇이 간식으로 먹기에 충분했으니 언제나 할머니께 미안했었다. 들리기로는 그때가 90대 중반이라 하셨고 개성 분이라는데 한국전쟁 전에 서울에 들리러 왔다가 전쟁이 터져 고향으로 돌아가시지 못했다는 말도 들린다. 애들은 다 어떻게 되었을까? 이제는 저 세상으로 돌아가셨다 하니 내 마음도 아프다. 이젠 이런 떡볶이가 생각나면 케리(Kerry) 국무장관이 들렸다는 윗시장 떡볶이 집에 들러야겠다.

겸재가 그린 필운대 그림. 간송미술관 소장

요즈음은 이 골목 시장이 서촌 바람을 타고 너무나 떠버렸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도 많이 생겼나 보다. 한 10년쯤 전일까, 어느 날 들린 국수집이 쓸 만했다. 그래서 이쪽에 오면 점심 한 그릇씩 했었는데 외국 관광객이 몰려오면서 더 이상 내게는 매력적이지 못한 집이 되었다. 그냥 한 그릇 먹으면 되는 일이지만 적절한 가격에 제대로 먹는 즐거움도 괜찮은 일이다. 다행히 저기 윗골목에 마음에 드는 만두집과 우동집이 생겨 인왕산 길에 한 그릇 먹는 즐거움을 다시 찾았다. 또 하나 이 골목에서 그리운 밥집이 하나 있다. 이 골목 끝쯤 되는 곳에 공사판 함바(はんば·飯場)식당 같은 백반집이 있었다. 상호는 있었던가? 정월 초하룻날 인왕산 해맞이 하고 우루루 몰려오면 무 넣고 푹 끓인 동태찌개가 우리를 맞았다. 이렇게 시작하던 푸근한 한 해가 이제는 어설퍼졌다. 나날이 변해가는 이 골목 시장에서 무슨 수로 가게세를 내실 수 있었겠는가? 밥어머니, 그 할머니는 잘 계시는지, 새해가 오면 주인과 손님 사이 같지 않던 그 밥집이 그리워진다.


금천교 시장 골목을 끝까지 지나 배화여고로 들어간다. 1898년에 아랫동네 내자동에서 캐롤라이나 학당으로 우리 땅 여성들의 교육을 시작한 후 1916년 경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한다. 붉은 벽돌의 교사(校舍)는 시간을 머금고 단아하게 앉아 있다. 생활관 건물은 특히 아름다운데 안내판에 쓰여 있기를 등록문화재로 1916년 선교사들의 주택으로 지어졌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교사 건물은 남쪽과 동쪽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다. 동쪽을 바라보고 있는 건물 뒤로 돌아가보자. 옹색한 공간이 나타나고 산등성이 바위에는 글자들이 보인다. 

필운대 암석의 웅장한 모습. 사진=이한성

弼雲臺(필운대). 조선시대 장안의 승경지(勝景地) 필운대는 너무도 초라한 모습으로 갇혀 있다. 누군가 조금만 신경을 써서 학교 건물을 20~30m만 앞으로 내어 지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동국여지비고’에 실려 있는 필운대의 내력을 보면, 인왕산 아래 있으며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이 젊었을 때 이곳 아래에 있는 원수 권율(權慄)의 집에 처가살이(贅寓: 췌우. 이항복은 권율 장군의 사위)를 했는데 필운산(弼雲山)이라고도 부르는 인왕산의 이름을 따 호(號) 중 하나를 필운이라 했고, 석벽에 새긴 필운대란 글씨도 그의 글씨라는 것이다. 또한 필운대 곁에는 꽃을 많이 심었기 때문에 이곳이 봄철 손꼽히는 꽃구경 명소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오해 소지가 있는 것이 처가살이다. 우리나라 결혼 제도는 조선 중기까지는 여자가 시집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가 장가드는 혼례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남자는 결혼을 하면 일정 기간(애기 낳아 얼마만큼 클 때까지) 처가에서 살다가 가족을 데리고 본가로 가는 풍습이 일반적이었다. 왕가에서는 중국의 주자가례(朱子家禮)가 보여주듯이 친영(親迎) 즉, 신부 맞아오기를 행하고 사대부들도 따르기를 독려했으나 임진란 전까지는 장가들기가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율곡의 아버지도 신사임당 집에 살았고, 안동 무덤 속 러브레터의 주인공 ‘원이 엄마 아빠’도 그랬다. 오성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이다.


필운대 봄 꽃 구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유명했던 것 같다. 유득공의 ‘경도잡지(京都雜志)’에 필운대(弼雲臺)의 살구꽃이 유명하다 했고, 수헌거사(樹軒居士: 유득공의 아들?)의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동국여지비고와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많은 이들이 필운대 꽃구경을 시로 읊었다.


연암 박지원의 ‘필운대 살구꽃 구경(弼雲臺看杏花)’이란 詩에는

 

夕陽倏斂魂, 上明下幽靜. 
花下千萬人, 衣鬚各自境. 
저녁 해 지려 하니 
하늘은 밝고 땅은 고요하네. 
꽃 아래 많은 사람들 
의관과 수염이 저마다 제 경지. 

 

필운대에 꽃구경 나온 이들, 어스름해가 지니 모두가 풀어진 모습으로 꽃구경에 빠졌나 보다. 봄꽃에 취한 그이들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에 질세라 다산 선생도 한 수 읊으신다.

 

竹扉淸晝每慵開
一任溪橋長綠苔
忽有客從城外至
看花要往弼雲臺  
대사립은 맑은 낮에 매양 열기 게으르니시냇물 다리엔 푸른 이끼 늘 끼었지뜻밖에 성 밖에서 손님이 찾아오니필운대로 꽃구경 나서야 되겠구나

 

문밖 손님 찾아오니 필운대로 꽃구경 납시겠다 하는구나. 그만큼 필운대 꽃구경은 누구나 하고 싶어 했던 놀이 문화였던 것 같다.


그러나 즐거운 꽃놀이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려함이나 즐거움의 반대편에는 쓸쓸함과 비통함도 있게 마련이다. 임진란으로 폐허가 된 한양 땅에 필운대인들 화사함만 있었겠는가. 임진란 때 이조좌랑으로 의주까지 선조를 호송했던 이호민(李好閔)은 폐허가 된 한양의 모습을 필운대를 통해 읊었다.

 

亂後弼雲春望(임진란 후 필운대의 봄 경치)
황폐한 성에는 꽃 피울 나무도 없고
봄바람 저물녘에 갈가마귀 내려올 뿐
옛 궁궐 가는 길 모싯대만 청청한데
봄이 와 밭 갈던 늙은이 금비녀를 주웠다네
荒城無樹可開花
唯有東風落暮鴉
薺苨靑靑故宮路
春來耕叟得金釵

 

금비녀의 주인은 어찌 되었을까?


경복궁 옛터에는 모싯대만 청청한데 봄이 왔다고 늙은 농부는 밭을 간다. 그런데 그 밭에 나뒹굴던 금비녀. 금비녀가 어찌 밭에 나뒹굴 물건이더냐. 이호민은 금비녀의 주인이 당했을 일을 차마 글에 담지 못했다. 


필운대 바위벽에는 두 군데에 각자(刻字)가 더 있다. 하나는 고종 때 영의정을 지낸 백사의 9세손 귤산(橘山)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고종 10년(1873) 이곳에 들러 조상의 자취를 보고 느낌을 적은 시로 예서(隸書)로 새겨져 있다. 

 

우리 조상 옛 집터에 후손이 찾으니   
我祖舊居後裔尋
푸른 솔과 돌 벽에 흰 구름 깊구나   
蒼松石壁白雲深
남기신 풍모 백년 넘게 다함 없고    
遺風不盡百年久
노인장의 의관은 에나 지금이나      
父老衣冠古亦今


계유년 월성 이유원이 백사 선생의 필운대에 적다.


癸酉月城李裕元 題白沙先生弼雲臺

 

우측에 있는 또 하나의 각자(刻字)에는 가곡원류(歌曲源流)를 묶은 가객 박효관(朴孝寬) 등 모두 9명의 명단이 적힌 계유감동(癸酉監董)이라는 글이 있다.


계유년, 아마도 1873년 무언가를 감동(監董: 감독과 같은 뜻)했다는 것인데 무엇을 감독했는지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아마도 이유원의 글을 새기는 일을 감독한다든지, 이 동네의 위항가객(委巷歌客)으로서 필운대에다 운해산방(雲海山房)을 차려 놓고 제자를 육성했다 하니 그것과 관련 있는 일이었을 것이다.

주례(周禮: 주나라의 예절)에 따라 대궐의 우측에 설치된 서울 사직단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사진 = 이한성

겸재의 그림 필운대는 지금은 학교 건물 때문에 어쩔 수 없지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 본 필운대의 모습이다. 현재 ‘弼雲臺’ 글씨가 쓰여 있는 바위 너머로 인왕산 능선을 그렸다. 또 하나 필운대와 관련된 겸재의 그림은 필운상화(弼雲賞花). 8명의 선비와 두 명의 동복(童僕)이 봄꽃을 보려고 필운대 뒤 언덕쯤 되는 곳에 모여 앉았다. 건너로는 목멱산(남산)이 보이고 남대문 너머 저 먼 곳에는 뽀족뾰족 관악산이 보인다. 그런데 이 그림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필운대 쪽에서는 이 그림의 앵글이 나올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그림은 맹학교(盲學校) 뒤 쪽 후천(后泉)이라 쓰여 있는 바위 위에서 바라본 시선이라는 주장이다. 

육강현을 그린 겸재의 그림.  

또 하나 필운대와 관련 있는 그림이 육강현(六岡峴)도이다. 본래는 육각현(六角峴)인데 발음이 잘못 되어 이 그림에 육강현으로 화제(畵題)가 적혀 있다. 육각현은 39쪽 옛 지도에서 보듯 필운대의 뒤쪽(북쪽) 너머에 있는 고개이다.


‘동국여지비고’에서도 필운대 곁에 있다고 했고 담장의 길이가 긴 집이 만리장성 집이라 한다고 했다. 시사편찬위원회가 펴낸 서울 지명사전에는 ‘종로구 필운동 9번지 필운대 옆에 있던 고개로서, 큰 집이 있어서 담의 둘레가 길고 여섯 모가 난 집이 있던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육각현이라고도 하였다. 육각재 위의 집은 담의 길이가 길다 해서 만리장성 집이라고 하였으며, 이 마을을 장성동이라고 하였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지명은 이해되었으니 그림을 보자. 그림에는 관아재 조영석(觀我齋 趙榮祏)이 쓴 화제(畵題)가 보인다. ‘自農隱堂 望六岡峴’(농은당에서 바라본 육강현)이라 쓰여 있다. 아래쪽 기와집들이 농은당이고, 비스듬히 보이는 바위가 필운대, 그 뒤가 육각현이라 한다. 참고로 간송에 소장되어 있는 장시흥(張始興)의 필운대 그림이 있는데 필운대를 측면으로 그려서 육각현이 정면으로 보이게 한 그림이다. 기회 있을 때 감상하면 필운대와 육각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잠시 농은당에 대해 관심을 가져 보자. 누구의 집이었을까? 정확히는 알 수 없으나 아마도 겸재의 스승 삼연 김창흡(金昌翕)의 형 농암 김창협(農岩 金昌協)이 아닐까 생각하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농은당은 무슨 뜻을 담고 있을까? 농은(農隱), ‘농사에, 농촌에 숨는다’이니 자연에 묻혀 산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이제 배화여고를 나서 사직단 방향으로 나아간다. 사직단에 조금 못 미쳐 매동초등학교가 있다. 1895년 개교한 오랜 역사를 가진 초등학교로 여전히 건재한 것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사직단 담장에 닿을 즈음 좌측으로 보이는 민가에 있는 가게 ‘사직동 그 가게’를 만난다. 문 앞 작은 칠판에 낙서처럼 쓰여 있는 티베트 속담이 마음을 끈다. ‘걱정을 해서 걱정이 없어지면 걱정이 없겠네’.

티베트 식당에 내걸린 티베트 속담이 가슴을 쿵 친다. 사진 = 이한성

쿵 한 대 맞았다. 이 가게는 인도에 있는 티베트 망명정부 난민촌을 지원하고 있는 가게다. 티베트의 차(茶) 짜이와 간단한 음료, 식사를 팔고 있다. 수익금은 티베트 난민들을 위해 쓰인다고 한다. 그런 것 다 떠나서 분위기가 티베트스럽고, 짜이 맛이 훌륭하고, 간단한 식사도 좋다. 근처를 지나실 때 꼭 들려보시라, 좋아질 테니까. 

주례(周禮: 주나라의 예절)에 따라 대궐의 우측에 설치된 서울 사직단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다. 사진 = 이한성

이제 사직단(社稷壇)으로 들어간다. 두 개의 단(壇)이 있다. 토지신을 모시는 사단(社壇)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직단(稷檀)이다. 중국 고대 주(周)나라에는 나라의 시스템을 6개 부문으로 나누어 구축했는데, 그중 건설이나 도시계획 등에 관한 내용을 정리한 것을 ‘동관고공기(冬官考工記)’라 하고 편히 불러 ‘주례고공기(周禮考工記)’라 한다. 내용은, 匠人管國, 方九里, 旁三門, 國中九經九緯, 經徐九軌, 左祖右社, 面朝後市이다. 여기에서 좌조우사(左祖右社, 편히 左廟右社)의 원칙에 따라 대궐의 좌측(동쪽)에는 종묘(宗廟), 우측(서쪽)에는 사직단을 배치한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걷기 코스: 3호선 경복궁역 2번 출구 ~ 금천교 시장 ~ 배화여고/필운대 ~  사직단 ~ 황학정 ~ 단군성전 ~ 딜쿠샤 ~ 성혈바위 ~ 석굴암 ~ 인왕산 정상 ~ 성벽길 ~ 성벽 넘어 하늘다리 방향 ~ 마애불2 ~ 선바위/국사당 ~ 마애불3 ~ 독립문역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9008-1908.

 

(정리 = 최인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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