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일민미술관에 세 작가가 모였다. 10년 이상 탄탄한 커리어를 쌓아온 30~40대 작가들을 조명하는 ‘이마 픽스’전에 김아영, 이문주, 정윤석 작가가 참여해 4월 29일까지 작품을 선보인다. 저마다의 개성과 가치관이 들어간 작업들을 펼쳐온 작가들을 한데 모은 주제는 바로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 다소 포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이 주제 아래 세 작가는 각자 ‘이주’, ‘도시계획’, ‘인간과 꼭 닮은 마네킹’에 주목해 이야기를 풀어냈다.
컬러풀한 배경 속 등장하는 한 존재. 인간의 모습은 아니고 암석 일부분이 모여 만들어진 형태로 보인다. 이름은 페트라 제네트릭스(이하 페트라). 페트라는 인간과 대면해 이주와 관련된 이야기를 나눈다. 대화 도중 이주 상품을 광고하는 한 여성이 등장했다가 “시스템 오류가 발생했다”는 문구가 뜨면서 쓰러지기를 반복한다. 이후 펼쳐지는 페트라의 이주와 자신과 꼭 닮은 존재와의 만남. 이 드라마틱한 이야기는 무엇을 다루고 있으며,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작가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본전시 ‘모든 세계의 미래’에서 ‘제페트, 그 공중정원의 고래기름을 드립니다’(이하 ‘제페트’) 작업을 통해 세상의 이슈 속 존재하는 균열을 살폈다. 중동 지역에 부를 가져다 준 것처럼 보이는 역청(석유 자원)이 사실은 역청 관련 산업 이외를 초토화시키는 지대 자본주의적 상황을 가져온 것에 주목하며, 표면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이면 속 균열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다공성 계곡, 이동식 구멍들’ 작업으로 이주가 만든 균열을 파고든다. 작업의 시작은 지난해 멜버른 페스티벌 전시를 준비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호주와 관련된 작업을 요청받은 작가는 호주의 역사, 자연, 지질학을 살펴보던 중 이주민 정책에 눈길이 갔다.
작가는 “호주 정부는 지난 10년 동안 해상을 통한 난민 유입을 강하게 반대했다. 그래서 폐쇄된 호주 인근 마누스 섬에 수용소를 짓고 호주를 찾아온 난민들을 무기한 정착시켜왔다. 열악한 수용소 환경에 폭력, 자해 사태가 벌어졌다”며 “오늘날 국경 넘어 발생하는 생태적, 정치적, 경제적 이주 등 비자발적 이주가 난민 문제와 같은 적대와 갈등, 분쟁의 원천, 즉 균열을 만드는 걸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비단 현재뿐 아니라 인류의 역사는 이주의 역사라 할 만큼 고대부터 현재까지 이주가 이어져 왔다. 작가 또한 작업을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닌 경험이 있다. 그래서 새로운 곳에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의 불안감도 이해한다. 크고 작은 이주의 역사가 모여 현재의 우리까지 다다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주 이야기로 현재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는 건 작가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작가의 작업에는 이주를 준비하는 페트라가 등장한다. 다공성 계곡에 살던 페트라는 알 수 없는 폭발로 계곡에서 떨어져 나오고, 새로운 곳으로 이주하기 위해 이주 상담센터를 방문한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기 위해, 꿈을 이루기 위해 등 각양각색 이유로 새로 머물 곳을 찾아 헤매는 우리네의 모습과 다름없다.
그런데 페트라의 존재는 사람들의 물리적 이주와 더불어 또 다른 이주를 상징한다. 페트라는 다공성 계곡에 거주하는 유사 신화적 존재로 설정된 상상 속 지하 광물로, 고대 페르시아 종교인 미트라교가 근원이다. 페르시아에서 BC 3세기경 성행했던 미트라교는 이후 로마 제국에서 받아들여졌는데, 작가는 여기서 ‘이주에 성공한 신’ 이미지를 떠올리고 페트라를 설정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염원을 바위에 빌곤 한다. 이 염원을 담은 공간으로 다공성 계곡이 설정됐다. 이곳에 살던 페트라 또한 사람들의 생각들을 담고 있다. 그리고 작가는 이 생각들을 디지털 사회에서 정보로 재해석했다.
작가는 “디지털 시대에서 비트 로트(bit rot)가 발생한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이라도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데이터들의 삭제를 막을 수 없다. 비트 로트를 막기 위해 매년 수많은 기업들이 데이터를 백업하고 새로운 저장 매체로 옮기는 일을 반복한다”고 말했다. 과거 인간이 새로운 땅으로 옮겨가는 물리적 이주가 존재했다면, 이젠 시대가 변하고 기술이 발전하면서 인간이 끊임없이 만들어내는 데이터가 옮겨다니는 새로운 이주가 발생한 것.
두 이주 이슈를 풀어내는 방식으로 작가는 사변 소설을 택했다. 사변 소설은 과학기술 명제성의 제한을 받지 않고 실제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현실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장르다. 작가는 “사변 소설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이야기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하고, 역설적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이 얼마나 기이한지 깨닫게 하는 인지적 소격 효과가 있다”고 말했다. 작가가 직접 쓴 페트라의 이야기는 영상과 설치 이미지로 전시장에 구현됐다.
어딘가에서 또 다른 새로운 곳으로 끊임없이 떠나는 현재의 우리. 영상 말미 페트라 이야기는 추후 작가의 작업이 어디로 이어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이주 센터가 페트라를 새로운 곳으로 이주시키는 과정에서 실수로 또 하나의 페트라가 만들어지고, 마주친 둘은 당황한다.
작가는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데이터 이주와 더불어 포스트 휴먼 분야가 많은 관심을 받고 있다. 다가올 미래에 클론이 생성될 수 있다고 본다. 이 세상 유일한 존재로 있고 싶어 하는 인간이 자신과 정신적으로 연결된 똑같은 존재를 봤을 땐 어떤 감정을 느낄까? 거기에서 조화가 발생할지, 또 다른 균열이 발생할지 궁금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