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NB저널 = 김금영 기자) 3년 전 누크갤러리에서 회화를 탐구하는 ‘스터디 페인팅(Study Painting)’ 전시를 선보였던 샌정 작가가 이번엔 ‘픽쳐스 인 어 갤러리(Pictures in a Gallery)’전으로 돌아왔다.
이번 전시는 전시 제목처럼 미술 작품이 전시장 공간에 걸려 있을 때 만들어지는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상황의 중심에 그림이 있다. 작가는 ‘감상자’와 ‘그림’, 그리고 그 외 ‘바깥 세계’라는 셋으로 나눠진 요소 중 회화를 부각시키면서 다시 한 번 그림의 의미에 심도 깊은 접근을 시도한다. 이런 점에서 회화를 탐구하는 그의 ‘스터디 페인팅’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화면에는 다소 변화가 감지된다. ‘스터디 페인팅’ 전시 때 선보인 작품들에는 말, 새, 사람 등 완전히 구상적이진 않지만 형태를 알아볼 수 있는 반추상적인 회화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번 전시에서는 화면에 자리 잡았던 말, 사람 등의 구상이 사라지고, 무채색 톤을 배경으로 여러 색채의 추상 형태들이 나타난다. 화면을 가득 채웠던 요소를 점점 조금씩 들어내며 비움의 미학을 드러내는 과정이 읽힌다.
작가는 5~6년 전까지만 해도 주로 고국에 대한 향수를 주제로 작업해 왔다. 그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머문 지 어언 20년이 넘었다. 현재도 한국에 작업실은 따로 없고, 독일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하는 시간이 길다. 전시를 위해 한국을 방문하곤 하지만 뒤셀도르프에서의 생활이 어느덧 더 익숙해졌다. 그래도 그리움은 어쩔 수 없다. 작가는 “외로움과는 다른 긍정적인 고독이 작업으로 이어졌다. 생활 자체도 의도적으로 단조롭게 지내는데, 그 담백함이 회화에도 녹아들었다”고 말했다.
또 타국 생활은 작가가 서양 회화와 동양적 감수성을 결합한 그림을 그리는 계기도 됐다. 작가는 “서양에 오랜 시간 있다 보니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의 감수성이 더 진하게 와 닿았다. 동양의 정서, 그리고 동양 회화의 정신 등을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태도를 길렀다”고 말했다.
작가의 화면을 봤을 때 동시에 느껴진 기시감과 낯섦이 이런 이유에서였나 보다. 처음 그림을 보면 서양 추상화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런데 시간을 갖고 찬찬히 화면을 들여다보면 동양화의 여백의 미(美)가 느껴짐과 동시에 동양 수묵화에 등장하는 산, 그리고 그 산을 거니는 자그마한 사람의 형태가 눈에 들어온다. 그러다보면 지금 동양 수묵화를 보고 있는지, 서양 추상화를 보고 있는지 모호한 느낌에 빠져든다.
여기서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동양화냐, 서양화냐를 논하기보다는 회화 본연에 집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그 중 하나가 색이다. 그리고 여기서 색은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 색이 아니라, 본질적 의미에서의 색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 팔레트를 들여다보면 여러 색이 보인다. 색은 그 본연 자체로 존재하는데, 굳이 인간이 색에 이름을 붙여 구분했다는 것에 낯섦을 느낄 때가 있다. 그래서 그림을 그릴 때 ‘빨간색은 이런 의미를 지녔다’ 식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색 자체가 화면 안에서 하나의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갖는다. 색을 사용할 때마다 설렘도 느낀다”고 말했다.
또 하나 눈길을 끄는 점은 이 색을 사용한 선 등이 마치 그리다 만 듯한 느낌이라는 것. 그런데 이 미완성처럼 보이는 작업이 작가에게는 나름대로의 답을 얻기 위해 노력한 과정이다. 작가는 “초기 작업 땐 내가 이해한 것을 이것저것을 화면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런데 지금은 직감에 의해 붓을 든다”며 “직감은 A 다음에 B, 그 다음은 C 이렇게 순서대로 완성되는 맥락에서 오지 않고 굉장히 불규칙적이다. 직감은 기다려서 오기도 하고, 갑자기 올 때도 있다. 내 나름대로의 이 의미적인 긴장감은 화면에 화룡정점처럼 악센트를 준다”고 말했다.
결국 변해 온 화면은 작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설명해주는 것 같다. 고국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 찼던 작가의 마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성숙해지고, 꽉 찬 마음을 조금씩 비워가며 담백해지는 과정에 이르고 있다. 자기 감정의 파도에 휩쓸리지 않고 계속 그림을 그리고 탐구하며 질문을 던지는 과정. 그래서 작가의 화면은 텅 빈 것 같지만 그 안에서는 치열하게 열정적이었던 흔적 또한 느껴진다.
조정란 누크갤러리 디렉터는 “작가는 동양적 감수성에 바탕을 두고, 동양과 서양 회화의 접점을 모색한다. 한국의 오방색을 연상시키는 빨강, 파랑, 노랑, 초록의 기본 색을, 점과 선, 원과 사각형 등의 기본 형태를 반복하며 회화란 무엇인지 그 의미를 찾고 있다”고 작가의 작업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제한된 환경 속에서 작가의 관조적 태도가 회화로 나타나고, 내면의 혼돈과 고립은 오랜 시간 숙고한 후에 화면 위로 던져져 모호한 붓질로 드러난다”며 “작가는 페인팅 자체를 숙제로 알고 현대적 의미에서 ‘회화 미학’의 해석과 재해석에 작품 제작의 가치를 둔다. 그의 작품은 끝없는 과정의 연속이며, 자신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사유해 온 흔적임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전시는 누크갤러리에서 6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