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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이 화랑에 ②] 플립북에서 시작된 21세기 애니메이션 혁명

국내외 다양한 감독의 문화적 이슈까지 탐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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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91호 김금영⁄ 2018.05.29 12:04:13

(CNB저널 = 김금영 기자) 서브컬처가 아닌 어엿한 예술의 한 장르로서 애니메이션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전시가 나란히 열리고 있다. 피비갤러리의 ‘피비플러스_애니메이션’전과 일민미술관의 ‘플립북: 21세기 애니메이션의 혁명’전이다. 두 번째로 ‘플립북: 21세기 애니메이션의 혁명’전 현장을 찾았다.

 

사와코 가부키의 작품이 설치된 전시장. 작가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섹슈얼 이미지를 다뤄 왔다.(사진=김금영 기자)

어린 시절 공책 한 귀퉁이에 그림을 하나하나 그리고, 나중에 이 그림들을 한꺼번에 스르륵 넘길 때 움직이는 그림을 보며 느낀 경이로움이란! 지금의 어른 세대엔 플립북(flip book)이 하나의 추억으로 남아 있다. 첨단 기술이 발전하면서 3D, 4D 영상 등 애니메이션은 계속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이 가운데 일민미술관은 애니메이션의 원초적인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플립북을 전시명에 끌어왔다.

 

조주현 일민미술관 학예실장은 “첨단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 현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어색해하는 전시명”이라고 짚었다. 그럼에도 전시명을 이렇게 정한 데는 이유가 있다. 그는 “애니메이션은 20세기 서브컬처로 취급되며 그동안 예술의 영역에서 인정받지 못했다. 그런데 최첨단 기술로 중무장한 디지털 시대의 메인 장르로 꼽히는 미술과 영화의 기원에서 애니메이션의 속성들이 발견된다”고 말했다.

 

이어 “포스트 디지털 시대 영화 제작 환경과 데이터베이스 서사의 특성들을 살펴보면 애니메이션의 수작업이나 단절적이고 비연속적인 이야기 속성들에 주목하는 특징이 있다”며 “이건 애니메이션이 단순 서브컬처가 아니라 메인 장르로 지닌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애니메이션의 근원을 살펴보고, 궁극적으로 SNS 등 디지털 환경에서 애니메이션의 장르적 속성들이 야기하는 철학적, 미학적 담론들을 동시대 문화에 적용시켜 후기 디지털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이슈들을 새로운 관점에서 성찰해볼 필요성을 느꼈다”고 설명했다.

 

2전시실에서 열리는 본편 전시 '동화제작소'는 동화(動畵)가 어떻게 제작되는지 국내외 작가들의 다양한 작업을 통해 알려준다.(사진=김금영 기자)

전시는 전통적인 2D 드로잉부터 페이퍼 컷아웃, 스톱모션, 실사로 찍은 영상을 그대로 애니메이션화한 로토스코프, CG로 합성한 3D, 분절된 움직임과 그 효과를 활용하는 픽실레이션 (Pixilation) 등 다양한 기법의 애니메이션 예술을 보여주는 작품들로 구성됐다. 전시는 동시대 예술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소개되지 않았던 애니메이션 장르의 예술적 확장을 모색하겠다는 취지도 지녔다.

 

전시는 본편과 번외편으로 구성된다. 2전시실에서 열리는 본편은 ‘동화제작소’로 동화(童話)가 아닌 동화(動畵)에서 비롯됐다. 동화(動畵)는 그림체 자체를 뜻하는 작화(作畵)와 달리 움직임을 표현한 그림을 뜻하는 애니메이션 용어로, 각 프레임 사이 움직임을 보완해주는 그림을 의미한다. 본편 전시는 각각 파트에서 수작업과 협업이 꼭 필요한 애니메이션의 요소들을 시각화해 보여주며 그 행위들이 지닌 의미와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바스티앙 뒤부아, '카고 컬트(Cargo Cult)'의 스토리 보드.(사진=일민미술관)

또한 유명 애니메이션 원작을 새롭게 경험할 수 있도록 꾸려졌다. 앞선 피비갤러리의 ‘피비플러스_애니메이션’전이 국내 작가들의 작업에 집중했다면 ‘플립북’전의 본편 동화제작소는 국내를 비롯해 해외 작가들의 작업까지 모았다. 오성윤, 이성강, 카트린 로테, 안네 마그누슨 등 8명의 국내외 애니메이션 감독을 포함해 시각예술가, 애니메이터, 디자이너 등 총 17팀의 작업을 볼 수 있다.

 

먼저 국내 감독 중에서는 ‘마당을 나온 암탉’을 흥행시키며 주목받은 오성윤 감독, 그리고 지난해 첫 장편 ‘마리 이야기’로 안시 국제 애니메이션 대상을 수상한 이성강 감독이 눈에 띈다. 이번 전시는 두 감독의 대표작을 소개하는 동시에 오 감독이 준비 중인 차기작 ‘언더독’을 살짝 엿볼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다. 주인에게 버림받고 길거리를 떠도는 유기견 신세가 된 뭉치와 유기견 친구들이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장소를 찾기 위한 여정을 그리는 ‘언더독’은 8월 개봉 예정으로, 이번 전시에서 주요 캐릭터 설정 등을 미리 볼 수 있다.

 

전통적 2D 드로잉부터 디지털 시대 웹애니메이션까지
애니메이션 변화의 흐름을 따라가기

 

안네 마그누슨, '75개의 언어를 하는 남자' 애니메이션 레이어.(사진=일민미술관)

또 눈에 띄는 건 웹애니메이션 채널 툰봐의 섹션. 한국에서는 웹툰 시장이 특히 활성화돼 있다. 전시는 수많은 작품 중 ‘정령왕 엘퀴네스’의 탄생 과정을 소개한다. 이 작품은 2004년 인터넷 웹 페이지에 판타지 소설로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2016년부터 웹툰으로 연재됐고, 툰봐가 이 작품을 웹애니메이션으로 만들면서 또 다시 새로운 포맷으로 진화했다. 보는 것을 기반으로 한 웹툰에 사운드와 움직임이 더해지면서 어떻게 생동감 넘치는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지는지 과정을 살필 수 있어 애니메이션 업계에 꿈을 가진 사람들이 특히 주목할 공간이다.

 

해외 작가로는 카트린 로테, 안카 다미안, 안네 마그누슨, 아라이 후유, 사와코 가부키, 바스티앙 뒤부아가 전시에 참여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사와코 가부키의 작품이다. 일본 타마예술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그래픽 디자인을 전공한 작가는 주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섹슈얼 이미지를 소재로 다뤄 왔다. 이번 전시에서도 헤어진 남자친구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아 그냥 엉덩이로 묘사해버린 ‘아날주크 아날주스’, 애인의 항문 속에 숨고 싶어 하는 한 인물을 통해 소유욕을 논하는 ‘마스터 블라스터’ 등 독특한 관점에서 이뤄진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눈이 뱅글뱅글 돌 정도로 빠르게 전환되는 자극적인 이미지들이 펼쳐지지만 몰입도 또한 높다.

 

이성강, '마리 이야기' 스틸컷.(사진=일민미술관)

프랑스 작가 바스티앙 뒤부아 또한 사와코 가부키처럼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애니메이션 ‘마다가스카르의 일기’를 내놓았다. 작가가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머릿속에 남은 여행의 기억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었다. 그는 “학생 때 애니메이션을 공부했는데 늘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게 답답해 여행을 시작했다. 여행은 작업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어줬다”고 말했다. 세네갈, 이란, 콜롬비아, 코트디부아르 등 각 지역에서 만난 인물들의 인터뷰는 화려한 색채로 가득하다. 인물들의 표정은 3D 모션 캡처로 섬세하게 포착돼 애니메이션임에도 작품의 사실성과 현실감이 강화된다. 인터뷰 중 틈틈이 삽입된 일러스트도 재기 넘친다. 

 

순수예술 및 다큐멘터리, 디자인, 음악 등 다양한 예술 영역과의 협업을 시도한 작품들도 감상할 수 있다. 노르웨이 작가 안네 마그누슨은 ‘75개의 언어를 하는 남자’를 선보인다. 75개의 언어를 하는 천재이자 19세기 중반 독일연방과 독일제국의 자유주의 독립 운동가였던 게오르그 사우어바인에 대한 전기 다큐멘터리 애니메이션이다. 영화는 애니메이션 장르와 기록을 전달하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혼합해 게오르그 사우어바인의 삶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카트린 로테, '1917 붉은 시월(1917 the real October)'. 허니콤 보드에 인쇄한 싱글프레임.(사진=일민미술관)

독일 작가 카르틴 로테의 작품 또한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방식을 취했다. ‘1917 붉은 시월’은 1917년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다룬다. 로테는 “애니메이션은 표현의 수단이다. 다큐멘터리와 애니메이션이 결합된 방식을 추구해 왔다. 10년 전엔 실제 직업 관련 인터뷰를 진행해 애니메이션으로 만들기도 했다”며 “이번 전시에 내놓은 작품의 경우 전쟁을 실제로 겪은 아티스트 5명이 남긴 자료를 토대로 만들었다. 애니메이션을 통해 세상을 이미 떠난 사람들의 경험에 생을 부여했고, 이들의 목소리를 빌어 역사 속으로 사라진 대중에 대한 논의를 재생시키고자 했다”고 말했다.

 

본편 전시가 다양한 애니메이션을 보여주며 애니메이션 장르의 근본적인 속성을 파고들었다면, 번외편 전시는 애니메이션이 디지털 시대에 사람들에게 어떻게 활용되고 있는지 살펴본다. 즉 애니메이션이 야기한 문화적 현상을 작품을 통해 읽어보는 것. 1전시실에서 열리는 번외편 전시 ‘#해저여행기담_상태 업데이트’는 최초로 한국에 소개된 SF소설로 알려진 ‘해저 2만리(Vingt mille lieus les mers)’를 동시대 예술가, 애니메이터, 그래픽 디자이너, 일반인 아마추어 등과 함께 일종의 팬픽 형태로 재구성했다.

 

오성윤 감독의 신작 '언더독'을 미리 살펴볼 수 있는 공간.(사진=김금영 기자)

한 예로 작가 고등어는 기존의 다른 텍스트와 병치해서 전혀 다른 시공간의 타임라인이 뒤섞이는 서사를 재구성한 ‘타임라인 포 엔딩(Timeline for Ending)_해저 2만리 X 애도일기’를 보여준다. 작가는 어머니를 잃은 후 상실을 경험한 남자 주인공이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줄거리의 롤랑 바르트 ‘애도일기’의 서사와, 속세의 국가와 사회 시스템을 버리고 잠수함 노틸러스호를 만들어 바닷속에 살고 있는 네모 선장의 서사를 비선형적으로 연결시킨다.

 

그런가하면 노상호는 ‘해저 2만리’에 대한 검색 결과를 기준 없이 수집하고, 그 이미지를 한데 모아 먹지로 덧대어 베껴 그린 그림을 관객이 직접 움직여 관람할 수 있는 구조물에 부착해 스스로의 타임라인을 만들게 한다.

 

웹애니메이션 채털 툰봐의 작업을 소개하는 공간. 판타지 소설에서 웹툰, 그리고 웹애니메이션으로 변화를 거듭한 '정령왕 엘퀴네스'를 볼 수 있다.(사진=김금영 기자)

조 학예연구사는 “번외편 전시는 온·오프라인 상 이뤄지는 팬픽션의 형식이다. 원전을 새롭게 구성해 보여주는 이 전시는 오늘날 SNS 문화 안에서 개인이 일종의 캐릭터가 돼 일상을 수집하고, 취재하고, 중계하며, 미디어의 기획자, 제작자, 배포자로 역할하는 현상과, SNS에서의 반복적 쓰기 활동을 통해 ‘이야기적 자아’를 계발하는 자기 기획, 자기 구축 메커니즘을 반영한 것”이라고 의도를 설명했다.

 

전시의 시작은 ‘움직이는 그림’ 즉 플립북이었다. 무언가를 알기 위해서는 근본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기술이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애니메이션이 어떤 변화를 겪어 왔는지, 또 사람들은 이 애니메이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활용하고 있는지 변화의 흐름을 읽을 수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전시는 일민미술관에서 8월 12일까지.

 

번외편 전시 ‘#해저여행기담_상태 업데이트’가 열리는 1전시실.(사진=김금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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