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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속 길 (11) 청풍계 ~ 옥류동 下③] 日에 나라 팔아 아방궁 짓고 여색 빠진 윤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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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595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8.07.09 10:14:58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옥류동 시멘트 아래 갇혀 있는 물길이 평탄지에 이를 즈음, 오른 쪽 언덕에 보이는 퇴락한 한옥을 찾아 올라간다. 반듯한 화강암 층계와 입구를 장식한 석물이, 번듯한 한옥과는 달리 왜색(倭色) 냄새가 물씬 풍긴다. 한때 이 한옥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의 계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가 시집오기 전까지 살던 집으로 알려졌었다. 윤 황후는 13살 되던 해인 1906년 서거한 순종황제의 첫 번째 황후 순명효황후 민씨의 뒤를 이어 순종(이 때는 황태자였음)의 계비로 가례를 올렸다. 


1910년대에 지어진 이 집은 역사성도 있고 건물 자체도 1900년대 초 제대로 지어진 한옥이라서 남산골 한옥마을 경내로 옮겨 지을 것을 적극 검토하였다. 그러나 심하게 낡아 이축하기 어려우므로 이 건물 모습 그대로 신축하였고 그 설명도 순정효왕후가 시집오기 전까지 살던 집으로 소개되기도 했었다. 

 

한옥의 멋을 잘 보여주는 ‘옥인동 윤씨 집’


그런데 이 집은 윤 황후가 어릴 적 자란 집이 아니라는 근거들이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한때는 1955년 이 집을 매입한 서용택 씨의 이름을 따서 ‘서용택 가’라고 했으나 이제는 ‘옥인동 윤씨 가옥’으로 불린다. 이 집의 구조나 고건축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필동 한옥마을에 가면 비록 새로 지어졌지만 이 집의 구조를 자세히 볼 수 있다.


사실 옥류동 이 지역은 윤 황후의 큰 아버지인 윤덕영(尹德榮)이 일본으로부터 자작 작위와 함께 받은 공로하사금 공채증권 46만 원을 활용하여 사들였다. 그때가 경술국치(庚戌國恥)가 있던 1910년이었으니 1906년에 출가한 윤 황후가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사실 윤 황후는 현재 개발을 기다리고 있는 한국일보 건너편 미국대사관 직원들 사택이 있던 사간동(옛 지명은 간동)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 한다. 그렇다면 이 집은 누가 살던 집이었을까?

 

나라를 팔지 못하도록 국쇄를 감췄다는 순정효황후. 자료 사진

옛 잡지 ‘개벽’ 1924년 7월자 기사 중에 흥미로운 기사 한 꼭지가 실려 있다. 이곳 옥류동(주소명 옥인동)에 있던 윤덕영의 벽수산장에 대한 김해경 씨(건국대)의 자세한 연구 자료가 있는데 그 자료 속 기사를 인용해보려 한다.

 

‘개벽’ 제49호 1924년 7월 1일자 - “色色形形의 京城妾魔窟可驚可憎할 有産級의 行態” 5만원 자리 이길선(李吉善)의 딸. 이성녀는 낙양성(洛陽城) 중  제일 미인이엿다. 그러나 얼골에 살기가 잇서서 청춘에 과부가 되고 독수공방하면서 비애의 눈물을 흘이다가 몃해 전에 윤 씨의 애첩이 되얏다. 이 리씨가 윤가(尹家)로 입(入)한 사실의 내막에는 비상한 흉계와 죄악이 견재하얏다. 처음에 윤 씨가 아방궁을 지여노코 이세(二世) 모양으로 궁심지지소락(窮心志之所樂)을 하랴고 장안의 미인을 다 불너 놀 때에 마츰 이길선의 과녀(寡女)가 미인이라는 말을 듯고는 한번 교면(交眄)의 야심이 잇섯스나 리씨는 여염가(閭閻家) 여자인 고로 만나볼 기회가 업서서 …중략… 일흉계(一凶計)를 냇다 …중략… 각 대관과 상궁 가족을 전부 송석원(松石園)으로 초대하얏다. 이것은 각 상궁의 가족을 청하면 천상궁의 가족도 오는 동시에 이성녀가 역시 올 터인 고로 전혀 이성녀 하나를 보기 위한 연회다.

 

내용인즉, 윤덕영은 젊어서 과부가 된 이길선(李吉善)의 딸 이성녀(李姓女)가 서울 장안 제일의 미인이라는 사실을 듣고 이성녀를 만나기 위해 머리를 써서 잔치를 열었다. 계획은 성공하였고 그녀를 첩실(妾室)로 들이게 되는데  소문이겠지만 5만 원이라는 거금을 들였다는 것이다. 윤덕영에게는 이성녀 외에 나씨 성을 가진 소실이 또 하나 있었다는데 두 소실을 한 집에 들이지는 않았을 터이니 이 집은 온전히 소실 이성녀를 위한 집이었을 것이다. 뒷맛은 씁씁하지만 그래도 그 시대 양반가 한옥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건축물이 남았다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분수령 고개가 있는 걸 모르고들…


퇴락한 한옥을 되돌아 내려온다. 시멘트길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면 그 밑이 옥류동 물길이다. 되돌아보면 창의문에서 자하동으로 흐르는 물길은 경복궁역에서 자하문 터널로 이어지는 자하문로 아래 물길로 흘러들고, 청풍계 물길, 세심대 물길도 신교 주변에서 자하문로 물길로 흘러든다. 그 다음 남쪽 물길은 어떻게 이어진 것일까? 서촌을 걸으면서 겸재의 그림에 다가가려면 물길을 살펴야 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제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물길은 하나도 없다. 


이중환 선생의 택리지에는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백두산 바로 아래에는 분수령(分水嶺)이라는 고개가 있기에 ‘우리 땅의 모든 산은 분수령에서 시작된다’는 설명을 한 것이다. 바로 분수령에서 내려와 뻗어나간 큰 산줄기가 백두대간과 장백정간이 된다. 그런데 분수령이라는 고개가 있음을 모르는 이들이 ‘산은 스스로 물을 가르는 고개가 된다’라고 심한 오역을 하였다. 오역이 멋있기에 많은 이들이 오역인 줄도 모르고 따르고 있다.  

 

옥류동-인왕동-누각골의 세 물길


오늘은 필자도 이 오역을 따라보기로 한다. 서촌을 알려면 물길을 살펴야 한다는 말은 그 물길을 가르는 능선과 고개를 이해하자는 말이다. 애당초부터 서촌은 능선길에 의해 갈라진 물길에 따라 삶의 영역이 구분된 동네다. 창의문 아래 자하동, 백운동, 그 아래 청풍계, 특별한 이름은 없지만 세심대 능선과 옥동능선 사이를 흘러내리는 맹학교 앞 작은 골짜기, 그 넘어 옥류동, 옥류동 넘어 즉 언커크 능선 아래를 흐르는 인왕동(그 상류는 기린교가 있는 수성동), 누각골(누상동)에서 흘러내려 인왕동 물길에 합쳐지는 누각골 물길이 있고 이 세 물길 즉 옥류동, 인왕동, 누각골 물길은 통인시장 서쪽 정자 못미처께서 합수하여 준수방을 지나 자하문로 밑 물길로 흘러든다. 이렇게 모인 물길은 청계천의 상류가 되어 세종로 네거리로 흘러간다. 이 물길 가, 능선의 나지막한 자리에 집을 짓고, 물길이 만들어낸 샘물을 마시며 살았던 것이다. 

 

통인시장의 정자. 이 앞으로 물길이 모여든다. 사진 = 이한성 교수
한성부지도에는 세 물길이 모여 준수방으로 흐르는 모습을 잘 그려 놓았다.

이제 물길을 따라 내려간다. 물길을 따라 걷는 방법은 포장된 도로의 가장 낮은 곳을 따라 가는 것이다. 물길은 겸재길 군인아파트 쪽을 향하지 못하고 흰색 건물 ‘고요’라는 카페 옆 골목길로 간다(길의 제일 낮은 위치가 그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 골목길은 서촌의 오래된 한옥들 사이로 이어져 인왕동(수성동) 물길과 만나 통인시장 정자 쪽으로 흘러간다. 옛 물길은 이렇게 흘렀었구나.


걱정스러운 것은 뜻밖에도 물길 위에 세워진 집들이 많다는 사실이다. 옛 어른들이나 수맥을 다루는 이들은 물길 위에 사는 일은 피했는데 각박하게 살아야 하는 우리 세대에는 그까짓 물길 무시하며 용감히 살고 있다.


이제 정자 앞에 이르러 좌향좌, 겸재길로 이름 붙여진 길을 따라 군인아파트 쪽으로 간다. 가는 길 세종아파트 앞 전봇대 뒤에 송석원(松石園) 터를 알리는 표지석이 서 있다. 그 내용을 옮겨본다. ‘송석원은 인왕산 계곡 깊숙한 곳에 자리 잡아 소나무와 바위가 어우러져 절경을 이룬 이곳에 정조 때 평민시인 천수경이 시사(詩社)를 지어 송석원이라 하였고, 1914년 순정황후 윤씨의 백부 윤덕영도 프랑스풍 저택을 짓고 역시 송석원이라 하였다.’

송석원이 있던 터임을 알리는 표지판. 사진 = 이한성 교수 

위치나 내용이 조금 불편하다. 이미 연재한 전호(前號)에서 소개했듯이 시사(詩社)란 시모임이고 송석원은 천수경의 집이니 ‘시사를 지어 송석원이라 했다’는 설명은 내용을 모르는 이는 이해하기 어려울 것 같다. 

 

입에 올리기도 싫은 그 이름 ‘벽수산장’


골목길 아파트 뒤로 돌아가본다. 차고 입구 옆에 문기둥을 장식했던 사각의 석물이 있고 건너편에는 비교적 온전한 돌기둥이 서 있다. 이곳이 윤덕영이 세운 벽수산장(碧樹山莊)의 정문이 자리 잡았던 곳이라 한다. 벽수산장….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이름이다. 이미 언급했듯이 옥류동의 주인은 장동 김씨였다. 김수항에서 김학진으로 이어지던 10대 200년 여에 걸쳐 이곳을 경영했던 김씨들도 힘이 떨어지던 무렵, 명성황후의 친정붙이 민규호는 몸이 병들어 옥류동 좋은 물로 병을 고치고 싶어했다고 한다. 어느 때나 실세에게는 맞서기가 버거운 일이니 옥류동은 민규호에게 양도되고 태호, 규호 형제가 경영하였다. 태호의 딸이 세자(순종)의 비로 간택까지 되었으니 그 위세는 대단했을 것이다. 이렇게 민영익, 민영린 아들 대까지 30년여 이어졌지만 민태호도 1884년 죽고, 명성왕후도 비명에 가고, 세자빈도 어린 나이에 요절했으니 힘도, 경제력도 약화되면서 영린도 서울을 떠나게 되자 옥류동은 다른 이들에게 넘어 갔다. 

 

과거 벽수산장이 있었던 위치로 추정되는 지점. 오른쪽 석물이 벽수산장 정문 장식물로 추정된다. 사진 = 이한성 교수

몇 년 후인 1910년 거금의 하사금으로 이 땅을 산 사람이 윤덕영이었다. 나라를 팔아먹은 대가로 산 땅이었던 것이다. 1906년 이미 아우 택영(澤榮)의 딸 증순이 황세자(순종)의  계비로 간택되었기에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1910년 8월로 돌아가 보자. 이완용이 이끄는 조선의 내각은 일본에 충성하여 개인의 영달을 꿈꾸는 무리들로 가득했다. 송병준은 연초 일본을 방문하여 일진회를 등에 업고 조선 합병을 주장하면서 충성심을 과시하였고, 이완용도 ‘혈의 누’를 쓴 일본어통 비서 이인직을 대동하면서 충성 경쟁에 뛰어 들었다. 


이렇게 해서 일진회가 작성한 합방 요구 건의문에 일본이 응하는 형식을 취해 8월 22일 창덕궁 대조전 옆 쪼그만 방 흥복헌(興福軒)에서 조선을 일본에 합병하는 한일 병합 조약의 체결이 이루어졌다. 그 주역들은 다음과 같다.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시종원경 윤덕영, 궁내부대신 민병석, 탁지부대신 고영희, 내부대신 박제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 친위부장관 이병무, 승녕부총관 조민희. 모두 조약 체결에 찬성하고 협조하였다. 조약을 반대하다 쫓겨난 학부대신 이용직 같은 사람도 있었지만 소용이 없었다. 이들은 일본으로부터 작위(爵位)를 받고 많은 하사금도 받았다. 윤덕영이 옥류동을 산 자금의 출처도 이 하사금이었을 것이다. 

 

나라 팔고 부자 된 그들


잠시 다른 이야기이지만, 독립국가 대한민국에서는 이들의 죄를 묻지 않았다. 만주 독립군 세력, 임시정부 세력에 비해 국내에 상대적으로 정치 기반이 없던 이승만 박사는 일제에 협력한 이들 세력을 그대로 받아들여 자신의 정치 기반으로 삼았던 아픈 역사가 우리 근대사에 있다.


다시 합방 이야기로 돌아가면,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윤덕영의 아우 윤택영의 딸이지만, 조선의 국모 순정효황후는 옥쇄를 치마 속에 감추어 조약 날인을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랬더니, 큰아버지 윤덕영과 아버지 택영이 강제로 국쇄를 빼앗아 찍었다는 것이다. 확인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올곧고 애국심 강했던 순정효황후의 성품을 알 수 있게 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렇게 해서 며칠 뒤 8월 29일 합병 발표가 있었고 조선은 망했다. 우리는 이날을 경술국치라 부른다. 나라를 팔아먹은 결과 그들은 부자가 되었다.


윤덕영은 옥인동 전체 면적의 54%에 해당하는 1만 6628 평의 땅을 사서 이른바 아방궁 벽수산장을 지었고, 이완용은 지금의 통인시장 북쪽에 4000 여 평의 땅을 사 저택을 지었다.


윤덕영의 벽수산장은 어디에 있었을까? 방금 전 물길 찾아 내려갔던 카페 ‘고요’에서 보면 안쪽 길모퉁이에 ‘서울상사’라는 간판이 보인다. 이 간판을 정면으로 보아 오른쪽은 옥류동 계곡길, 왼쪽은 비스듬한 언덕길인데 왼쪽 언덕길을 따라 오르면 우로 꺾이면서 고급 주택가가 펼쳐진다. 옥류동 계곡길에 밀집해 있는 서민주택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이 길 1/3쯤 되는 능선 위에 벽수산장이 있었다. 

 

더러운 벽수산장에 ‘송석원’까지 갖다 썼으니


윤덕영은 뭣하게도 이곳 벽수산장 경내를 송석원이라는 이름과 함께 사용했으니 송석원 시사 구성원들이 듣는다면 기겁을 할 일이다. 자연을 벗 삼아 무욕의 삶을 살아간 그들의 이름을 나라 팔아 영달한 사람이 입에 올린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덕영은 이 언덕에 프랑스 귀족 집 설계도를 빌려와 건평 800평에 가까운 프랑스 성(城) 같은 집을 지었다. 당시 신문들은 하나같이 ‘한양 아방궁’이라고 비판했다. 


그런 윤덕영도 1940년 세상을 떠났다. 아들이 없던 그는 양손 윤강로를 들였는데 그도 시원치 않아 1945년에는 미쓰이(三井)광산주식회사로 넘어가고 해방 후에는 적산가옥이 되었다. 그 후 덕수병원으로 넘어가고 한국전쟁 때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조선인민공화국 청사로 쓰이다가 미군이 점령하자 미군의 숙고로, 유엔기구인 언커크(UNCURK: UN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국제연합 한국통일 부흥위원회) 청사로 사용되었다. 내가 어려서 보이던 인왕산 언덕에 성 같던 집이 지금도 삼삼하다. 철없던 우리 친구들은 발음도 어려운 언커크, 언커크 하면서 그 건물을 궁금해 했었다. 그러던 건물이 1966년 화재에 이어 1973년에는 영영 해체되고 말았다. 태생이 그랬던 벽수산장은 그 소멸도 덧없었다.

 

볼수록 편안해지는 겸재의 초가집


이제 길을 건너 군인아파트로 간다. 담장에는 자수궁(慈壽宮) 터를 알리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일제 암흑기에는 윤덕영의 벽수산장과 이완용 집 사이에 끼어 1911년 준공된 순화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 그 후 중부시립병원이 되었다가 이제는 군인아파트가 되었다. 이곳은 본래 무안대군 방번이 살던 곳이었으나 그는 제1차 왕자의 난 때 이복형 방원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 후 5부 학당의 하나인 북학(北學)이 자리했다가 세종27년(1455) 중부학당에 합쳐지고 문종은 자수궁이라는 이름으로 선왕의 후궁들이 살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해주었다. 


광해군 8년(1616) 자수궁을 다시 지었으나 인조반정 후 헐어서 창경궁 재건 공사에 사용하였다. 그 후 비구니들이 사는 자수원이 되었다 한다. 이곳에 살던 사람 중 유명하였던 사람은, 소현세자 귀국 때 함께 온 명나라 궁녀 굴씨(屈氏)였다. 이제 자수궁은 비록 없어졌지만 자수궁으로 넘어 오던 자수궁교는 비교적 근래까지도 남아 있어 이 다리 건너에 세워진 교회는 자교교회라는 이름으로 건재해 있다.

 

이 향나무는, 겸재가 독서여가도에서 그린 그 향나무일까. 사진 = 이한성 교수
65세의 겸재가 초연하게 앉아 있는 ‘독서여가도’. 뒤의 향나무 모습이, 현재 군인아파트 마당의 향나무와 아주 흡사하다. 

이 자수궁터 일원에 겸재 정선의 집이 있었다. 간송 최완수 선생에 의하면 겸재는 52세에 경복고등학교 교정쯤으로 추정되는 유란동을 떠나 이곳 인왕산 골짜기(仁谷)로 이사를 왔다 한다. 그림으로 성가를 얻자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84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유로운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때의 모습이 스스로 그린 그림 속에 엿보인다. 독서여가(讀書餘暇), 인곡유거(仁谷幽居), 인곡정사(仁谷精舍), 수성구지(壽城舊址)는 이곳에서 그린 그림으로 여겨지는데 유유자적 편안함이 있다.

 

이 근처가 인왕제색도 그린 위치구나


개인적으로 내게 평온함을 주는 그림이 인곡유거도이다. 겸재 자신의 집 앞마당쯤 되는 곳에서 인왕산을 바라보는 시각이다. 물론 높이는 부감법으로 훌쩍 뛰어 올라 마음으로 그렸다. 

 

옥인동의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서 보니 인왕제색도와 앵글이 거의 비슷한 풍경이 펼쳐진다. 사진 = 이한성 교수
겸재 작 인왕제색도. 

앞마당에는 버드나무가 있고, 넝쿨식물, 어떤 이는 오동나무라 하는데 잎새 큰 나무와 작은 나무들이 있다. 전문가들 말로는 남종문인화 풍이라 하는데 묵선(墨線)이 굵은 진경산수와는 사뭇 다르다. 담장도 짚으로 얹은 듯 보이고 솟을대문도 초가지붕으로 유거(幽居)의 느낌이 난다. 방안에 앉아 있는 선비는 겸재 자신이겠지. 그런데 내게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인왕산의 모습이다. 어쩌면 인왕제색도와 앵글이 이리도 비슷할 수 있을까? 여성의 손길처럼 부드러운 것 빼면 기차바위 위에 그려 넣은 공깃돌만 한 해골 모양 바위도 똑 같다. 날아오를 수 없는 필자는 주민에게 부탁하여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 인왕산을 바라보았다. 겸재가 마음으로 그린(傳神) 산 높이를 빼고는 앵글이 너무 많이 일치한다. 인왕제색도는 여기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그렸겠구나.

 

평온한 느낌을 주는 겸재의 인곡유거도. 배경의 인왕산 모습이 ‘인왕제색도’와 흡사하다.

두 번째 그림은 경교명습첩에 있는 ‘독서여가’다. 65세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초가로 이은 사랑채 툇마루에서 선비가 앞을 바라보고 있다. 편안히 쉬는 연거(燕居)라 사방관을 쓰고 산수화가 그려진 합죽선을 들었다. 책꽂이에는 책과 가지런한 촛대도 보이고 벽에 붙인 그림은 금강산 어느 봉우리쯤 되어 보인다. 바닥에는 삿자리를 깔았는데 쪼르르 마름모꼴 문양도 보인다. 유홍준 선생 글에는 앞 화분의 꽃이 모란이라 한다. 내 눈에는 작약으로도 보이는데 전문가 말씀이 맞겠지. 

 

그림 속 향나무는 지금도 독야청청?


그런데 내 눈길을 끄는 것은 향나무다. 지금 군인아파트 앞마당에는 오래 된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고 이 나무의 후손쯤으로 보이는 향나무 두세 그루가 더 자라고 있다. 혹시 독서여가 속 향나무와 아파트 앞마당 향나무는 관련이 없는 것일까?


세 번째 그림은 인곡정사다. 퇴우이선생진적첩(退尤二先生眞蹟帖) 속 네 그림 중 하나로 겸재가 자신의 집을 그린 것이다. 보물로 지정된 이 그림첩에 대해서는 나중 무봉산이나 도산서원 길을 갈 때 이야기하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이야기를 줄이려 한다. 이 그림은 겸재 71세에 그린 그림이라 한다.  이 그림 속 겸재의 인곡(仁谷) 집은 많이 변해 있다. 짚으로 얹었던 솟을대문은 기와가 얹혔고 따듯했던 담장도 너무 딱딱해졌다. 그림 속에는 집과 나무만 있을 뿐 사람의 손길은 없다. 왜 그림을 이렇게 그렸을까.

 

겸재가 71세 때 그렸다는 인곡정사도. 과거의 그림과 비교하면 필선이 매우 딱딱해졌음을 알 수 있다. 

마지막 그림은 수성구지(壽城舊地)다. 아파트 앞마당에 붙인 설명문처럼 이 그림도 인왕산을 보는 앵글로 비추어 보았을 때 이곳에서 그린 그림이 맞는 것 같다. 꽤 산뜻하다. 자수원(慈壽院)의 역사나 역할이 무안대군의 죽음, 후궁들의 노후 같은 슬프고 쓸쓸했던 이미지였는데 이 한 그림이 산뜻하게 하는 것 같다. 겸재도 아마 그런 마음이 있지 않았을까?


이제 출출도 하니 옥류천을 따라 내려가면서 우동 한 그릇에 정종 한 잔 해야겠다. 

 

교통편: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걷기 코스: 통의동 백송 ~ 자교교회 ~ 청운초교 ~ 백세청풍 각자(청풍계) ~ 맹학교(세심대) ~ 농학교(선희궁터) ~ 우당기념관 ~ 옥류동(청휘각, 가재우물, 송석원, 벽수산장 흔적) ~ 인곡정사터 ~ 박노수 미술관 ~ 백호정터 ~ 택견전수터 ~ 수성동 계곡 ~ 백사실 ~ 세검정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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