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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맞춰 책읽는 발행인 칼럼] 오늘 임정 100년…이승만이 총애한 안익태의 ‘애국’ 나라엔 日도 포함?

이 나라에도, 저 나라에도 애국한 사람의 '애국가' 계속 불러야 맞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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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34호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2019.04.11 08:50:40

최영태 CNB뉴스 발행인

이 문장을 한 번 보자.


만든 이가 최소한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도덕적 무결점과 높은 학식 혹은 유명세 등은 부차적이다. <애국가>를 통해 ‘애국’이라는 기본 가치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그 무엇보다 자신이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것은 일종의 정언 명법이다. 그러기에 ‘비애국적’ 애국가는 그 자체로 하나의 형용 모순이다.

이해영 교수(한신대 국제관계학부)의 신간 ‘안익태 케이스 – 국가 상징에 대한 한 연구’의 197쪽에 나오는 단락이다.

물론 이 문장은 조금 수정해야 맞다.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는, 적어도 애국가를 작곡할 당시(1935년경)만 해도 분명 한국(대한제국)이라는 사라진 나라를 피 끓게 사랑한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좀 더 팩트에 맞는 문장으로 다시 쓴다면 이렇게 될 것 같다.

만들 때는 애국했더라도, 나중에 조국을 배신하고 침략자 일본 제국주의 편을 든 사람이 작곡한 애국가는 형용 모순이기 때문에, ‘애국가’는 최소한 만든 이가 처음부터 끝까지 애국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정도로.

 

친일 이어 친나치 혐의까지 제시돼


안익태 선생이 친일을 했다는 혐의야 벌써 10여 년 전부터 알려지기 시작했으니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지만, 신간에서 이해영 교수는 그에게 친일에 이어 ‘친나치’ 혐의까지 제기한다.

2차 세계대전이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그리고 아시아태평양전쟁이 중국-동남아-태평양에서 벌어지고 있던 험악한 시기인 1930년대 말~1940년대 초반에 안익태 선생이 유럽에서 작곡가-지휘자로 활동했던 것에 대해 한국인들은 통상 “대단한 실력 덕분”이라고만 기억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그 배경에는 일본제국주의와 한 편을 먹었던 나치 독일의 지원이 있었다고 지적한다.
 

나치에 협력한 당대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악보를 들여다보는 안익태. 이해영 교수는 이 사진이 포함된 독일연방문서보관소의 문서철이 친일 음악회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둘이 들여다보는 악보가 슈트라우스 작곡의 '일본 축전곡'일 것으로 추측했다. 

사실 안익태의 일생을 되돌아보면 그가 살았던 나라들은, 1930년대 10년 정도의 미국 유학 기간을 제외하고는 신기하게도 모두 전체주의-파시즘 국가들이었다.

△일본제국주의 강점 아래의 조선에서 태어나(1906년)
△1930년대 미국에서 유학-활동하다가
△나치 치하의 유럽으로 옮겨 맹활약하고(1941~44년)
△나치 패망 이후에는 프랑코 독재 치하의 파시즘 스페인으로 옮기고
△이어 남한에 이승만-박정희 독재정권이 확고해진 이후에야 한국으로 돌아왔으니 말이다.

이 교수가 지적한 안익태의 친나치 혐의에 대해선 물론 앞으로 좀 더 자세한 검증이 필요하다. 나치 정권 치하의 친나치 음악인 협회였던 독일제국음악원에 적극 협력했던 당대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해서도 ‘자발적으로 나치에 협력했다’라는 평가와 ‘나치의 강압에 못 이겨 그랬을 뿐’이라는 평가가 엇갈리기 때문이다.

자신이 작곡한 '만주 환상곡'을,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나치의 선전 필름에 나오는 영상이다. 이해영 교수는 이 '만주 환상곡'의 일부 곡조가, 안익태 작곡 '한국 환상곡'과 겹친다고 밝혔다.

물론 친일이든 친나치든, 중요한 판단의 갈림길은, 1차적으로는 △자발적으로 나섰느냐, 아니면 할 수 없이 그랬느냐, 2차적으로는 △협력 대상의 패망 뒤 어떤 자세(사과)를 보였느냐 하는 기준에 따라야 한다. 저자 이해영 교수에 따르면 이 두 기준에 대해 안익태는 1. 자발적으로 일본 정부(첩보) 당국자에게 접근했으며 2. 일본 패망 뒤에도 자신의 친일 행위에 대해 단 한 번도 반성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미국 유학 기간 제외하고는 계속 파시즘-독재 국가에만 머물러


이 책에 따르면 안익태는 미국 유학을 마치고 미국에서 활약하다가 독일과 일본의 위력이 하늘을 뚫을 듯 하던 1941년에 독일 베를린 주재 만주국(일본이 만주에 세운 위성 국가)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미국 첩보국의 비밀해제 문서는 그를 ‘명목은 외교관이지만 실제로는 일본 첩보기관의 독일 주재 총책’이라고 규정했다)에 접근해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다”며 도움을 요청했다(에하라의 기록). 그리고 1941년 12월 10일부터 베를린의 에하라 관저에서 함께 살기 시작한다. 애국심에 불탔던 조선인(‘애국가’와 ‘한국 환상곡’의 작곡자)이 일본인 외교관, 그것도 첩보 총책으로 해석되는 사람의 관저에서 동거를 시작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이 교수는 “전시의 만주국 고위 외교관이 안익태를 그저 ‘대성’시키기 위한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사저로 불러들여 먹이고 재우고 했다면 ‘내선일체’의 참으로 눈물겨운 미담”이라고 비꼰다. 43쪽), 동거 시작 날짜 또한 기막히게 의미가 깊다. 그 바로 3일 전(12월 7일)에 일본 군의 미군 진주만 大공격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익태의 '만주 환상곡' 공연을 보고 있는 에하라 고이치 당시 베를린 주재 만주국 외교관(왼쪽). 안익태를 자신의 집에 살게 한 에하라를 미국 첩보당국의 비밀해제된 문서는 '일본의 독일 주재 첩보 총책임자'라고 밝혀 놓았다. 에하라는 '만주 환상곡' 합창 부분의 가사를 쓰기도 했다. 


1941년 12월 7일 이후 일본의 좌파들 사이에 ‘大전향’이 일어난다. 일본 내에서 1920~30년대에 사회주의-공산주의를 내세우며 반체제 운동을 벌였던 좌파들 중 상당히 많은 숫자가, 진주만 공격 이후 “천황 폐하 만세”의 大일본주의로 전향했다. 안익태가 과거의 ‘애국가’주의에서 大일본주의로의 전향을 결심했다면, 택일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셈이다. 시대의 흐름을 선취한 격이기 때문이다.

진주만 기습 이후에 대거 전향자가 나온 사정은,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한 예를 들자면 진주만 기습 이후 일본 군이 동남아의 영국 식민지들을 향해 파죽지세로 쳐들어간 지 두 달만에 영국군의 철옹성이었던 싱가포르를 1942년 2월 15일 함락시키자 한때 민족주의자(1919년 2.8독립선언서를 쓰고 상해로 망명했었던)였던 춘원 이광수는 감격에 덜덜 떨며 눈물어린 시를 발표했다. 그가 ‘신시대’ 1942년 3월호에 일본어로 발표한 ‘싱가포르 함락되다’의 한 부분이다.

아내가 울고, / 내가 울고, / 외치는 만세소리도 덜덜 떨렸다. / 아내는 달려가, 병들어 누은 아들을 일으켜 / “싱가포-르 함락했다”고 알렸다.

 

싱가포르의 영국군으로부터 항복을 받고 있는 일본군들. 아시아태평양 전쟁 초기 일본의 승승장구는 많은 조선인들을 '진정한 친일파'로 탈바꿈시켰다.

 

일본이 잘나갈 때 친일했다 하더라도, 

일본 패망 뒤 태도 역시 중요한데…


일본 군의 막강 전진을 목격한 대부분의 조선 지식인들은 “이제 조선 독립은 영원히 끝났고, 세계를 나눠 가질 초강대 일본제국에 협력하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다”며 생각을 바꿔먹었다. 국적이 ‘일본 국민’이었던 조선인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기도 했다.

그러나 초반전에서 이렇게 잘 나가던 일본은, 태평양의 과달카날 섬을 둘러싼 미군과의 전투(1942년 8월~1943년 2월)에서 패전하면서부터 패색이 짙어지기 시작한다. 이어 1945년에는 미국의 원자폭탄 두 발을 맞고, 친일 조선인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느닷없이’ 패망한다. 일본 천황만을 바라보고 살던 이광수 류의 인물들은 망연자실 신세가 된다.

나치 패망을 앞둔 안익태의 행적을 이해영 교수는 이렇게 전했다.

에키타이 안(안익태의 일본어식 이름)은 자신의 친일 부역의 산물인 1942년 ‘만주 환상곡’을 1944년 나치 패망이 확실한 조건, 곧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 파리 해방을 앞두고 파시스트 독재 국가 스페인으로 도주하면서 악보를 폐기하고 새롭게 1944년 판 ‘한국 환상곡’을 작곡한다. 엄격히 말해 새로운 곡을 작곡했다기보다 이전 1938년 더블린 판을 개작했다.(128쪽)

 

사선을 긋는 조건으로 촬영을 허가 받은, 독일 문서보관소 소장 필름의 영상. '에키타이 안'이라는 일본식 이름의 안익태가 에하라 고이치 작사의 '만주 환상곡'을 지휘한다는 내용의 영상으로, 바탕의 악보가 바로 '만주 환상곡'이라고 이해영 교수는 소개했다. 


과달카날 해전에서의 패배로 태평양전쟁의 무게중심이 미국 쪽으로 넘어갔듯, 나치 독일이 소련 침공에 실패하면서 패색이 짙어지고, 전쟁을 종결지을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임박한 순간에 파리에서 나치 주도의 베토벤 공연을 마친 뒤 ‘집 주인’ 에하라에게 알리지도 않고 쥐도 새도 모르게 에키타이 안은 계속 독재 국가로 남을 가능성이 높았던 스페인으로 사라졌다는 것이다. 게다가 ‘한국 환상곡’의 친일 복제 버전인 ‘만주 환상곡’의 악보(친일의 흔적)마저 폐기했다는 게 이 교수의 해석이다.

 

그가 '스페인'으로 떠난 이유는?


왜 하필 스페인이었냐에 대해 이 교수는 이렇게 썼다.

그가 도피한 곳은 마찬가지 파시스트 독재 국가인 스페인이었다.(126쪽)
프랑코의 파시즘 치하에 신음하던 스페인은 어떤 의미에서 그나마 자신의 안전이 보장되는 유일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129쪽)

2차대전이 끝나면 동부 유럽은 공산주의 소련이 지배하고, 서부 유럽은 연합군이 지배할 테니 친나치주의자가 숨을 곳은 유럽 안에서는 스페인 밖에 없었다는 해석이다.

 

나치-무솔리니 패망 후에도 오래도록 파시즘 체제를 유지해온 스페인의 프랑코 총통이 군복 차림으로 손을 흔들고 있다,


이랬던 안익태 선생이 고국 한국으로 돌아온 것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의 ‘탄신 80주년 경축 음악회’를 주재하기 위해서였다. 1921년 조선을 떠난 뒤 무려 34년만의 금의환향이었다. 이승만과 서북(평양) 출신, 기독교, 미국 유학이라는 공통점을 갖는 안익태는 이 대통령에게 여러 번 영문 편지를 보내 △주 워싱턴 대사관 문화 참사관으로 임명해달라 △‘한국 환상곡’울 뮤지컬 영화로 만들게 예산을 지원해달라 △대한민국 최초의 국제 음악제를 열게 해달라는 등의 요구를 했으며(현재 편지가 다 남아 있음), 이러한 작업을 거쳐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의 문화 훈장을 이 대통령으로부터 받는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이 대한민국 수립 후 첫 문화 훈장을 안익태에게 수여주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을 통해 안익태가 추진한 국제 음악제는, 이 대통령의 하야 뒤 1962년 5월 실현되지만, 공교롭게도 이 음악제는, 1961년 박정희 장군이 일으킨 5.16‘혁명’ 1주년 기념 이벤트로서 열린다. 여기서 안익태는, 당시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소리를 지르는 집단인 듯 잡다한 느낌을 줌으로써 시각적으로 비친 장관과는 좋은 대조를 이루’는 형편없는 공연을 펼치며, ‘풀레이아(연주자)의 실수는 전적으로 그 책임이 지휘자에게 있는 것’인데도 연주자가 제대로 연주하지 못한다고 불호령을 하며 음악을 중단시키는 ‘방약무도한 태도’를 보인 것으로 비판된다.(경향신문 1962년 5월 3일자)

1962년 당시 아직 군인 신분으로서 군복을 입고 있던 대통령 권한대행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안익태는 자신이 쓰던 지휘봉을 선사했다.

 

1962년 아직 군복 차림의 박정희 당시 국민회의 최고의장에게 안익태가 자신의 지휘봉을 선물하고 있다. 이승만 치하에서 안익태의 제안에 따라 추진됐던 해방 뒤 첫 국제음악제는, 1962년 5월 5.16'혁명' 1주년 기념 음악축제로서 실행된다. 

 

한국 환상곡이 만주 환상곡 됐다가 다시 원위치?


안익태가 작곡한 ‘애국가’와 ‘한국 환상곡’의 변천사를 이해영 교수는 이렇게 정리했다.
△1935년~1936년 초에 안익태는 ‘애국가’를 작곡했고 △1938년에는 ‘애국가’ 선율이 삽입된 ‘한국 환상곡’을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연주했지만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즈음한 1942년에는 ‘한국 환상곡’의 곡조를 일부 채용하되 애국가 선율 부분을 빼고 일본 찬양 가사를 삽입한 ‘만주 환상곡’을 작곡해 나치 독일 치하의 유럽에서 여러 번 연주했으며 △해방 뒤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다시 ‘애국가’ 선율을 삽입한 ‘한국 환상곡’을 연주했다는 것이다.

즉, ‘한국 환상곡’과 ‘만주 환상곡’은 기본적으로 겹치는 부분이 있으며, 그때그때 시세에 따라 애국가 선율 부분을 넣고 빼면서 한국을 위한 환상곡이 되었다가 일본제국을 위한 환상곡이 되었다가를 오락가락했다는 지적이다.

책 속의 문장을 인용해보자.

첫째, ‘한국 환상곡’ 482마디 이하 (중략) 와 ‘만주 환상곡’ 중 피날레의 여성 합창 파트가 일치함을 확인했다.(103쪽)
안익태 기념사업회 판 ‘한국 환상곡’에서는 만주국 오족협화를 찬미하던 자리에 ‘나의 사랑 한반도~’ 등이 놓이는 일대 희비극이 연출되는 지경에 이른다.(135쪽)

 

'오족협화'를 나타낸 만주국의 엽서 그림. 일본족을 중심으로 중국 한족, 조선 민족, 몽골족, 만주족이 화합을 이루자는 만주국의 구호가 오족협화다. 


오족협화란 ‘일본의 위성국’ 만주국이 내건 슬로건으로, 만주국을 구성하는 5개 민족, 즉 일본 민족(야마토 민족), 한족, 조선인(한민족), 만주족, 몽골족이 협조해 화합을 이루자는 구호였다. 일본제국주의의 슬로건을 찬양하던 가사가 들어갔던 ‘만주 환상곡’의 선율을 그대로 쓰면서, 가사만 “나의 사랑 한반도~” 등으로 바꿔치기했다는 것이다.

 

"일본에 대한 애국 아니었다"는 변호도 있지만…


물론 ‘한국 환상곡’의 이런 변천에 대해 안익태 선생을 옹호하는 입장도 있다. ‘안익태 케이스’는 허영한 씨의 입장을 소개한다.

안익태는 하나의 ‘한국 환상곡’을 작곡했으며, 이를 계속 제목만 바꾸어 ‘교쿠토(極東)’와 ‘만주국’으로 활용한 것이고 이 세 곡을 연결해 주는 공통 요소가 파스토랄, 즉 ‘방아타령’ 선율이란 점이 이를 방증한다. 결과적으로 ‘쿄쿠토’와 ‘만주국’은 없었다. 모두 ‘한국 환상곡’의 개작이었던 것이다. 물론 그 개작의 수준이 어느 정도였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안익태에게는 그 곡들이 모두 ‘한국 환상곡’이었을 것이다.(‘안익태 케이스’ 128쪽)

 

군인들의 사열이 진행되는 장면을 배경으로, 1962년 5.16'혁명' 1주년 기념 음악축제에서 지휘하는 안익태.


허영한의 해석은 안익태가 나치 치하의 유럽에서 ‘만주국’ 등을 연주했지만, 이는 기본적으로 ‘한국 환상곡’의 외면적 변형일 뿐이며, 안익태의 애국하는 마음은 변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반면, 이해영 교수는 스스로 만든 <애국가>를 ‘매국’의 도구로 재활용하다 그것을 다시 애국이라 주장하면서 그 중간 과정을 마치 없었던 것처럼 우긴다면 그것은 차라리 언어도단이라고 해야 할 게다. (중략) 용납키 어려운 기회주의적 행태일 뿐이다.(131-132쪽)이라고 비판했다.

 

느닷없는 일본의 패망 이후 갈라진 골수 친일파의 자세들


위 문장에서 중요한 문구는 ‘없었던 것처럼’이다. 일본 역사에서 이른바 15년 전역(戰役) 기간, 즉 1931년 만주국 수립부터 1945년 패전까지의 15년간 중국과 동남아-태평양에서 벌인 전쟁 기간에 수많은 조선인 친일 전향자들이 나오지만, 1945년의 느닷없는 일본 패망 이후 친일파들의 행태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나눠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당시 자리를 함께 한 최남선(왼쪽 두 번째)과 이광수(왼쪽 세 번째). 대표적인 친일파로서 이름을 날리던 두 사람만 일제가 제정한 '국민복'을 입은 모습이 눈에 띈다. 


첫째는 최남선 류다. 대한민국 수립 뒤 1948~9년 설치됐던 반민특위에 구속된 뒤 최남선은 ‘자열서(自列書)’라는 반성문에서 “민족의 일원으로서 '반민특’의 지도를 받는 것은 평생 있을 수 없는 힘든 대치욕이다. 나는 지금, 그 지탄을 받으며 또 그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니므로 정말로 송구스럽기 그지없고, 재차 무슨 말을 하고 감히 문과식비(文過飾非: 허물을 꾸미고 잘못을 변명한다)의 죄를 되풀이할 것인가”라고 썼다. (강덕상 저 ‘일제 강점기 말 조선 학도병의 자화상’ 278-9쪽)

물론 최남선이 자기변명을 안 한 건 아니었다. 그는 일제에 협력하지 않았음을 내세워 자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즉, 자신은 조국의 역사와 문화를 혼자 맡은 것처럼 걱정하여 “신분이나 명예가 어떻게 되건 상관하지 않고 이것저것을 하겠다”고 날뛰었는데 “세간 일류 총명한 사람들이 몸을 사리고 가만히 있었던 것에 비하면 그것은 미련한 짓이었다”고 했다. (박지향 저 ‘윤치호의 협력일기’ 88쪽)

즉, 최남선은 자기반성을 하면서도, 자신처럼 몸을 드러내고 친일을 했던 것과는 달리, 몸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몰래 친일을 하고 이익을 향유한 ‘총명한’ 사람들이, 드러난 자신을 향해 돌을 던지는 모습에 불만을 내비친 것이었다.

 

조선총독부가 창씨개명을 시행하자마자 첫 개명자로서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로 개명한 사실을 알리는 당시의 신문 기사.


두 번째는 이광수 류다. 이광수는 보다 확신범이었다. (중략) 그 차이는 해방 후의 처세에서도 나타났다. 이광수가 ‘반민족 행위 처벌 특별 위원회’에서,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고 나는 조선 민족이 대위기에 직면했다고 생각해 일부의 인사라도 일본에 협력하는 태도를 보이게 하는 것이 민족의 목전에 닥친 위기를 면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기왕에 버린 몸이라 이 기회에 자진해서 희생하기로 결심했다” (‘일제 강점기 말 조선 학도병의 자화상’ 278쪽)고 변명했다는 것이다.

 

학도병을 전쟁터로 보내는 과정에서

이미 드러난 최남선과 이광수의 차이


일제강점기 말기, 즉 일본의 패망이 목전에 다가온 시점에 일본과 조선의 대학에 재학 중인 ‘장래의 지도자’들을 군인으로서 전쟁터로 내몬 이른바 ‘학도병 강요’에서도 최남선과 이광수의 차이는 두드러졌다. 왜 ‘패전이 약속된 일본군의 일원으로 전장에 보내’느냐고 항의하는 在일본 조선인 유학생들에게 최남선은 “나도 본의로 이곳에(설득하러 일본에) 온 것은 아니다. 참정권 문제도 있으니까 조선을 위해 출진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라고 입장을 밝혔단다.

반면 이광수는 자신의 일기책에도 천황 찬양 시를 일본어로 줄곧 써왔고, 술을 마시다가도 천황 얘기가 나오면 정좌를 하는 등 일본 사람 뺨치는 천황주의자 행세를 했다는 증언이 남아 있다. 이런 이광수의 태도, 그리고 “전쟁터로 나가 죽어달라”고 설득하는 이광수를 한 유학생이 먼저 죽이겠다며 이광수의 2층 숙소로 칼을 들고 뛰어올라간 사건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말 조선 학도병의 자화상’ 274쪽과 277쪽 참조)

즉, 최남선은 자신의 친일에 대해 일정 부분 반성한 반면, 이광수는 ‘내 친일은 민족을 위해 내 한 몸 사리지 않고 나선 희생’이라며 자신의 공로를 인정해 달라며 뻣댄 셈이다.

 

최남선-이광수보다 잘난 '총명한' 친일파들의 행태는?


친일의 세 번째 부류는 최남선이 말한 ‘나서지 않고 이름을 숨기면서 친일의 혜택만 챙긴 총명한 타입’인데, 이해영 교수의 책에 따르면 안익태가 바로 그런 케이스가 아닌가 생각된다. 일본과 독일이 세상을 나눠 지배할 듯이 보였던 기간 동안 안익태는 이 교수에 따르면 ‘한국 환상곡’을 일부 개작한 ‘만주 환상곡’을 만들어, 나치 치하에서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열심히 연주했지만, 이러한 사실이 한국인에게는 ‘전혀’ 알려질 일이 없었으므로, 대한민국에 이승만-박정희 독재체제가 구축된 뒤에는 “애국가를 작곡하신, 티 한 점 없는 순혈주의 애국자”로서 컴백해 이승만-박정희 두 대통령의 친애를 받으면서 평생 영광만을 누렸다는 것이 이 교수 책의 요지이기 때문이다.

 

안익태와 애국가 악보. '애국가'의 곡조는 찬송가 풍이며, 일제 말기에 친일파로 돌아선 윤치호가 쓴 것으로 알려진 애국가의 가사는 '망해가는 왕조에 대한 슬픔을 담았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교수의 책은 ‘애국가’의 곡조가 서양 찬송가 곡조이고, 가사가 너무 ‘무너져 가는 조선 왕국’적이라는 지적도 함께 실었다. 곡조와 가사에 대한 이런 시비는 둘째로 치더라도, 과연 ‘한때는 애국적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매국적이었던’ 사람의 곡조를 계속 애국의 마음을 갖고 부를 수 있느냐는 문제는 계속 제기될 것 같다.

 

왜 지나간 일을 갖고 왈가왈부 하냐고?


이광수, 최남선의 친일 양상을 분석하고, 안익태가 친일을 했는지 안 했는지를 검토하는 일에 대해 “지나간 일을 갖고 왜 왈가왈부 하며 대한민국의 기반을 흔드느냐?”고 비난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광수-최남선 또는 안익태의 친일 행각은 단순히 과거지사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부당한 권력에 빌붙어 자신의 이익을 취하면서, 부당한 권력에 항의하는 사람들을 처단한 사례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극히 최근까지 끊임없이 벌어져 왔다.

친근한 예를 들어보자. 이명박 정부 때 24조 원 이상의 엄청난 예산을 퍼부어가며 4대강 공사를 했다. 야권에서는 이를 “강바닥에 돈을 묻었다”고 하지만, 실제로 강바닥에 돈이 묻혀 있다면 좋겠다. 그러면 꺼내 쓸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막대한 돈들은 누군가의 주머니로 다 들어갔고, 그중 상당량은 ‘이명박의 저수지’로 흘러들어갔다는 혐의들을 일부 언론들이 끊임없이 제기하고 있다. 4대강 돈 잔치에 여러 전문가들이 덤벼들어 공돈을 챙겼다. “그런 공사를 하면 강이 망가진다”는 해외 전문가들의 의견을 반박한 국내 토목 전문가들 중 누군가는 4대강 공사에 대해 확신을 갖고 덤벼들어 이익을 챙겼을 것이며, 다른 누군가는 “정권이 하겠다는데 별 수가 있나”라고 피동적으로 협력하면서 이익을 챙겼을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으면서 몰래 숨어 이익만을 챙기는 총명한 행태를 보인 부류도 있을 것이다. 예산이라는 게 한정이 있으므로, 4대강에 24조 원 이상을 쓰려면 다른 데 쓸 돈이 없어지는 게 당연하다. 4대강에 퍼부을 돈을 경제발전과 복지에 썼다면 지금처럼 한국 경제가 어렵지 않을 수 있었을 것이며, 경제난 때문에 죽거나 죽음 문턱을 오락가락 하는 인구도 그만큼 줄었을 것이다. 또한 부당한 4대강 공사에 양심적으로 저항하다가 학자로서 또 개인으로서의 인생을 망친 전문가도 분명 있을 것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과거지사이니까 그냥 덮고 넘어가자는 것은, 4대강 사기 같은 또 다른 사기를 부추기는 행태가 될 뿐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24조 원이 넘는 천문학적 예산을 쏟아부은 4대강 사업. 이 사업을 통해 천문학적인 부를 챙긴 극소수의 국민이 있는가 하면, 대다수 국민들은 세금을 강탈당한 신세가 됐다. 4대강 사업에 양심적으로 반항하다가 신세를 조진 학자들도 있다. 부당한 권력에 빌붙어 이익을 챙기는 행태는 그제나 지금이나 계속되고 있는데도, 친일 행적을 "과거사이니 미래를 위해 무조건 덮자"고만 한다면, "4대강 사업 같은 수지 맞는 일을 앞으로도 정권만 잡으면 계속 벌여도 좋다"는 면죄부를 주는 꼴이 되고 만다. (사진 = 연합뉴스)


친일(권력에 빌붙기)의 행태, 그리고 권력 패망 이후에 행태가 구체적으로 어땠는지를 밝히고 널리 알리는 것은 그래서 중요하다. 그렇기에 “이제 시작 단계”인 안익태의 친일-친나치 행적에 대한 조사는, 이 교수의 말대로 국가적 차원으로 진행돼야 하고, 안익태 작곡의 애국가를 계속 부를 것인지에 대해서도 공론을 모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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