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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재 그림 길 (34) 목멱산 ⑨] ‘목멱 아침해’가 실제와 왜 다르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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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40호 이한성 동국대 교수⁄ 2019.06.17 08:46:01

(CNB저널 = 이한성 동국대 교수) 삼순이 계단을 오르면 넓은 광장이 펼쳐진다. 지금은 이곳에 담을 치고 한양도성 발굴 작업하는 공간과 안중근 의사 기념관, 교육연구정보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약 100 년 전으로 돌아가면 우리에게 뼈아픈 시설이 자리잡았던 공간이었다. 일제는 1925년 이곳을 차지하고는 그들의 신을 모시는 조선신궁(朝鮮神宮)을 지었다.

그들의 신궁을 짓는 스타일로 약 15개의 건물을 짓고 그들의 최고 신인 천조대신(天照大神; 아마테라스 오미가미)과 그들의 표현대로 하면 명치(明治; 메이지) 천황을 받들었다. 자기네끼리 그랬으면 그나마 모른 척 하련만 그들은 조선의 지식인, 종교인, 학생, 일반인을 가릴 것 없이 이곳에 참배토록 했다. 1930년에는 그 숫자가 약 30만이나 되었고, 42년에는 약 245만 명이나 참배토록 했다 한다.

본래 남산 정상 부근에는 조선의 신(神) 목멱대왕(木覓大王)께서 자리 잡고 세상을 굽어보며 보살피고 계셨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4년 12월 기록을 보자.

“이조에 명하여 백악(白岳)을 진국백(鎭國伯)으로 삼고, 남산(南山)을 목멱대왕(木覓大王)으로 삼아, 경대부(卿大夫)와 사서인(士庶人)은 제사를 올릴 수 없게 하였다(命吏曹, 封白岳爲鎭國伯, 南山爲木覓大王, 禁卿大夫士庶不得祭)”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신성한 곳이라서 일반인들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이곳에서 치성을 드릴 수 없게 한 그런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라에서 제사를 올리는 곳이라서 목멱신사는 일명 국사당(國祀堂; 나라 제사를 지내는 당)이라 하였다. 후에는 국사당(國師堂; 나라의 스승을 제사지내는 곳)이란 이름도 자연스레 얻었다. 모르긴 몰라도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를 보면 그 이유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목멱신께 제사를 지낼 때에는 고려 공민왕, 무학대사, 나옹대사, 지공대사 및 여러 신상(神像)을 모셨고, 눈먼이의 상(盲者像), 천연두의 신인 소녀상도 함께 모셨다는 것이다.

京城木覓山蠶頭峯之國師堂淫祠. (以木覓山神享祀時. 典祀廳私稱國師堂. 掛高麗恭愍王, 本朝僧無學, 高麗僧懶翁, 西域僧指空像及他諸神像. 又有盲者像, 小女兒像. 女兒則以爲痘神云. 神前設脂粉之屬甚褻. 祈禱頗盛. 國不禁.)

이런 조선의 신들은 안타깝게도 500년 넘게 계시던 남산에서 쫓겨나 인왕산 골짜기에서 오늘도 간신히 명을 이어가고 있다. 일본 신이 남산 기슭에 자리 잡았으니 산 정상에 계시는 조선의 신들을 눈뜨고 볼 수 없었을 게다. 후손들이 시원치 않아 나라를 빼앗기니 신들도 쫓겨나고 말았다.

사람들은 흔히 일본을 신도(神道)와 불도(佛道)의 나라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이것은 겉만 보고 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일본은 신도(神道)의 나라다. 비록 세력이 크기는 하지만 일본에서는 불교도 신도(神道) 속의 한 영역으로 보는 것이 일본을 이해하는 데 편할 것 같다. 연전(年前) 일본인들이라면 모두 한 번은 가보고 싶어 한다는 일본 남부 이세(伊勢)신궁에 간 일이 있었다. 이유는 불가사의한 일본인들을 보고 싶어서였다.

비수기임에도 불구하고 이세시(伊勢市)의 숙박업소는 모두 만원이었다. 꼬부랑 노인부터 젊은이들, 게다가 그들이 손잡고 온 어린애들까지 도시가 가득했다. 다행히 게스트하우스(guest house)를 예약했기에 방을 잡을 수 있었는데 저녁식사가 끝나자 젊은 남자주인 방으로 숙박객들이 모이는 것이었다. 호기심 많은 여행 동행 우리 후배도 그 방으로 갔는데 무려 한 시간 넘게 이세 신궁 신들에 대한 교육을 받고 예비 기도를 한 후에 풀려 날 수 있었다. 지금도 후배는 그날의 일을 어처구니없어 하고 일본인들의 그 이해할 수 없는 행위에 대해 두려움과 의구심을 떨치지 못한다. 저들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집단에 대해 가지는 의구심 없는 충성과 복종심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고 항복을 선언하자 그 다음날 조선신궁은 문을 닫았다. 그 창졸지간에도 일본인들은 40여 일에 걸쳐 조선신궁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소각하여 자신의 신이 남의 손에 훼손되지 않게 뒷마무리를 하고 떠나갔다고 한다. 무서운 일본인들….

어느 때부터인가 국력이 강해진 우리는 ‘그깟 일본X들’이라면서 얕잡아보는 것 같다. 자신감은 좋은데 속과 겉(本音와 建前: 혼네와 다테마에)이 다른 일본인들은 언제나 경계 대상 1호다.

남산공원에 이승만 호가 달린 이유

해방 후 남산공원이란 이름으로 우리에게 돌아온 이곳은, 돌아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도 벌어졌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호(號) 우남(雩南)을 따서 이곳 남산공원과 부산 용두산 공원은 우남공원으로 개명하였다. 더 우스운 일은 1956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 80회 생일에 맞추어 이곳에 어마어마한 크기와 높이의 동상을 건립한 일이다. 남아 있는 자료사진을 보면 비행기까지 떠 축하 공연을 했으니 돌아보면 이 땅 북녘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 그때 우리에게도 있었다. 지금 남산 정상에 오르면 팔각정이 있다. 바로 그 자리에 정자를 세웠는데 그 이름 또한 우남정(雩南亭)이었다.

지금도 생각나는 노래가 있다. 초등학교 마당에서 조그만 계집아이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면서 뛰는데, 그때 부르던 노래 중 하나가 ‘고마우신 이 대통령 우리 대통령, 우리는 길이길이 빛내오리다~’였다.

 

남산 식물원과 분수대. 자료사진

권력은 덧없는 것이라 4.19 이후 동상은 기중기에 의해 철거되고 성난 군중들은 동상의 목에 쇠사슬을 걸었다. 이름은 바뀌고 현판은 내려가고 노래는 사라졌다. 4.19와 5.16을 거치면서 우남공원은 다시 남산공원으로 돌아오고 이곳에는 식물원과 분수대가 자리잡았다. 이제는 모두 없어진 시설들이지만 돌아보면 추운 겨울날 따듯한 식물원 안에 피어 있던 열대식물들은 참 신기하기도 했었다.

또 다른 권력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 있다. 이제는 이름이 바뀌어 교육연구정보원이라는 이름을 가진 하얀 색 높다란 건물에는 아직도 육영수 여사의 필적이 남아 있는 머릿돌이 있다. 당시 이름은 ‘어린이회관’이었다. 이제는 이 광장 한 켠에 안중근 기념관이 세워졌고, 옛 어린이회관이었던 교육연구정보원의 건물이 남아 있으며, 식물원과 분수 자리에선 한양도성 발굴을 위해 펜스를 치고 땅을 파고 있다.
 

옛 어린이회관.

남산의 두 봉우리와 잠두봉

여기에서 남산을 바라보면 잠두봉(蠶頭峰)이 보이고 남산 정상으로는 서울타워가 높이 하늘을 찌르고 있다. 남산은 남북으로 바라보면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주봉은 서울타워와 팔각정이 자리 잡은 곳이고 또 하나의 봉우리는 동으로 뻗어나간 쪽에 통신 탑이 서 있는 동봉이다. 이 두 봉을 연결한 능선이 마치 누에가 기어가듯 보이고 주봉(主峰)의 중간쯤에 누에가 고개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암봉(岩峰)이 잠두봉이다. 층계길로 남산을 오르다 보면 중간 지점 전망대가 잠두봉에 자리잡고 있다.

옛사람들은 이런 남산의 풍광에 취하여 그 아름다움을 노래했다. 여러 자료와 책들에 전해지는데, 속동문선(續東文選)에는 서거정이 한양의 아름다운 경치 열 곳(漢都十詠)을 꼽은 가운데 남산 꽃구경(木覓賞花; 목멱상화)이 으뜸으로 실려 있다.

尺五城南山政高 : 산줄기 반 성 남쪽은 산이 정녕 높아
攀緣十二靑雲橋 : 열두 청운교를 잡고 올라간다
華山揷立玉芙蓉 : 삼각산은 옥부용을 꽂아 세운 듯하고
漢江染出金葡萄 : 한강은 금포도를 물들여 낸 듯하네
長安萬家百花塢 : 한양 집집에는 온갖 꽃 둔덕
樓臺隱映紅似雨 : 누대에 살짝 비쳐 붉은 비가 내리는 듯
靑春未賞能幾何 : 청춘에 안 보면 언제 보려는고
白日政長催羯鼓 : 한낮 해 정녕 기니 서두르라 재촉하네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남산에 아름다운 풍광 8개를 소개하고 있다. 이른바 남산팔영(南山八詠)이다.

운횡북궐(雲橫北闕: 구름은 경복궁을 가로 지르고)
수창남강(水漲南江: 남쪽 한강수는 넘쳐흐르고)
암저유화(岩底幽花: 바위 아래 그윽한 꽃은 피고)
영상장송(嶺上長松: 고갯마루에는 큰 소나무)
삼촌답청(三春踏靑: 봄 세 달에 야외 나들이)
구일등고(九日登高: 중양절에 높은 곳 오르고)
척헌관등(陟巘觀燈: 언덕에 올라 연등 구경하고)
연계탁영(沿溪濯纓: 계곡에서 갓끈 빨고)

여말선초(麗末鮮初) 문인 정이오(鄭以五)가 말한 것인데 그는 각각 8편의 시(詩)를 남겼다. 한 편만 읽고 가자. 삼춘답청(三春踏靑)인데 청명(淸明)을 전후한 이른 봄의 들놀이를 읊은 것이다.

꽃 찾아가니 바람 산들 불고 : 問花風淡蕩
답청에 해는 따사롭구나 : 踏靑日暄姸
좋은 모임에 친구 많지 않으나 : 良會無多子
높은 정취 신선이 안 부럽네 : 高情勝別仙

 

재현해 놓은 남산의 봉수대. 사진 = 이한성 교수

잠두봉을 지나 남산 정상에 이르면 서울타워, 팔각정, 남산봉수대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모인 많은 사람들 중 외국인이 1/3은 되는 것 같다. 이제 남산은 국제적 명소가 된 지 오래다. 팔각정 앞에는 조선신궁이 세워지기 전 이곳에 있었던 국사당을 알리는 국사당터 안내석이 세워져 있다. 1925년 옮겨갔다는 내용이 쓰여 있다. 조선신궁이 건립된 해이다.

 

국사당터 표지석. 사진 = 이한성 교수

그 앞으로 재현해 놓은 봉수대(烽燧臺)에 5개의 연조(煙槽: 아궁이)가 보인다. 모두 5조의 봉수대 중 한 조를 재현해 놓은 것이다. 조선의 봉수에 대한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비롯해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 만기요람, 증보문헌비고 등 여러 곳에 있다.

조선의 봉수 라인과 그 허탈함

조선에는 모두 다섯 개의 봉수 라인이 있었다. 북쪽은 경흥(慶興), 강계(江界), 의주(義州)에서 출발하는 3개의 라인이 있었고, 남으로는 동래(東萊), 순천(順天: 요즈음 기준으로 하면 여수 돌산도)에서 출발하는 두 라인이 있었다.

겸재의 ‘목멱조돈’.
궁산에서 바라본 동쪽 산들을 표시해 봤다. 1 북한산; 하지 무렵 이 방향에서 해가 뜬다, 2 인왕산, 3 안산, 4 난지도 하늘공원, 5 남산, 6 남한산성 방향; 동지 무렵 이곳에서 해가 뜬다. 사진 = 이한성 교수

이 라인들은 직봉(直烽), 간봉(間烽)의 라인을 거쳐 모두 목멱산 5개 조의 봉수대로 연결되었다. 봉수대 숫자도 만만치 않았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601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738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조선말이 되면 조금 줄어 증보문헌비고에 676개소, 만기요람에 706개소가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각 고을과 고을을 연결하는 봉수 연결 라인이 잘 기록되어 있다. 필자도 한때는 동국여지승람을 들고 이들 봉수를 연결하는 여행길에도 올라 보았지만 여력이 달려 결국은 포기하는 아픔도 겪었다. 지도에는 봉수산, 봉화뚝 등으로 기록되어 있어 산에 올라 보면 온전한 봉수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으니 매번 허탈하였다.

이제 다시 잠두봉으로 내려간다. 시야가 탁 트인 비 온 뒷날 오면 힐튼호텔 뒤 저 멀리 난지도의 하늘공원, 노을공원이 보이고 강 너머로 겸재미술관이 자리 잡은 옛 양천고을 뒷산 궁산이 보인다.

 

궁산에서 6월에 바라본 북한산 일출. 사진 = 이한성 교수

겸재는 양천현령 시절 궁산에 올라 남산을 바라보며 해 뜨는 그림을 그렸다. 그 그림이 목멱조돈(木覓朝暾)이다. 돈(暾) 자가 어려운데 아침 해를 뜻하는 글자다. 따라서 겸재의 그림 제목은 요즈음 말로 하면 ‘남산의 아침 해’가 된다.

 

궁산에서 바라본 목멱산. 사진 = 이한성 교수

엊그제 비가 그친 날을 택해 궁산과 남산에 올랐다. 목멱조돈의 해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쉽게도 6월 궁산(소악루: 小岳樓)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목멱산이 아니라 북한산 문수봉 근처에서 뜨고 있었다. 반대로 새해 첫날에는 궁산 바로 동쪽에 자리 잡은 동신아파트 옥상 위로 뜨는데 연장선을 이으면 한강 너머 남한산성 줄기에서 뜬다. 이렇게 볼 때 겸재의 목멱조돈 그림처럼 해가 목멱산 잠두봉 근처에 걸리려면 봄이 시작되는 2~3월이어야 될 것이다.

겸재의 진경산수가 그렇듯이 목멱조돈도 눈으로 보는 사실화는 아니다. 우선 남산을 비롯하여 모든 산이 실제보다는 우뚝하다. 필자가 엊그제 찍은 사진과는 달리 해가 걸려 있는 남산 주봉(主峰: 47쪽 그림에서 2), 통신 탑이 서 있는 동봉(그림에서 3) 모두 우뚝하게 키를 키웠고, 배경 좌측 저 멀리 보이는 용마산 아차산(그림에서 1) 줄기도 실제보다는 높다.

겸재가 더욱 키운 것은 목멱 우측 저 멀리 보이는 남한산성(그림에서 4)이다. 사진에서 보면 롯데 빌딩 뒤로 확인되는 것이지만 키워도 너무 키웠다. 그뿐이 아니다. 목멱 앞쪽으로 보이는 산들은 옛 지도에서 보듯이 와우산, 아현 언덕, 안현(鞍峴)에서 뻗어 내려온 만리재, 용산 줄기인데 그림에서는 실제보다 많이 키가 크다.

궁산에서 목멱을 바라보면 이제는 난지도 공원들이 높이 솟아 확인이 어려운데, 거꾸로 남산 잠두봉에서 힐튼호텔 너머로 궁산을 바라보면 산이라 할 만한 언덕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남산의 옛 지도.

사실 그림을 그리는 입장에서는 밋밋한 산을 그리는 데 애로가 있었을 것이다. 중국의 화북산수나 요즈음의 황산산수, 계림산수, 장가계산수를 보면 눈으로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도 그 자체가 그림이 된다. 석회암 지역의 산과 물이 갖는 특징인데, 화강암이나 흙으로 이루어진 육산(肉山)이 대부분인 우리 땅에서 중국 산수화를 모본으로 보며 그림을 연마했을 우리 땅의 화인(畵人)들은 고달팠을 것이다. 따라서 산을 높이고 골을 깊게 하고 바위를 우람하게 하고 하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멋진 그림을 만들어 낸 것 같다. 이른바 사의(寫意), 전신(傳神)이란 이런 작업을 이르는 말인가 보다.

산만 아니라 강가의 버드나무(47쪽 그림에서 5)도 실제 계절보다는 일찍 잎을 틔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을 모르는 필자의 눈에도 살짝 고개를 내민 목멱의 아침 해는 신비롭다. 이 그림에는 겸재의 둘도 없는 친지(親知) 사천(槎川) 이병연(李秉淵)이 진경시를 써 붙였다.

曙色浮江漢 새벽빛 한강에 떠오르니
觚稜隱釣參 산봉우리들 낚싯배에 가리고
朝朝轉危坐 아침마다 나와서 우뚝 앉으면
初日上終南 첫 햇살 남산에서 오르네 (기존 번역 전재)

기왕 그림을 꼼꼼 살피는 김에 조금 더 보자. 겸재는 앞에 작은 산과 언덕만을 그렸지만 겸재가 그리지 않은 것들이 있을 것이다. 옛 지도를 찾아 랜드마크가 될만 한 곳에 번호를 붙여 보았다. 1 목멱산, 2 남대문, 3 두껍바위, 4 남묘, 5 마포, 6 종근당 앞 아현, 7 밤섬, 8 와우산, 9 광흥창, 10 양화진이다. 이 지도는 산수화의 기법을 살려 그린 것이라서 겸재의 목멱조돈에 비추어보면 목멱조돈의 앞쪽 작은 산과 언덕을 짐작할 수 있다.

두꺼운 바위 아니라 두꺼비 바위가 있던 후암동

추정은 독자의 몫으로 하고 지도에 표시한 3 섬암(蟾岩: 두껍바위)과 남묘(南廟)만 보려고 한다. 우리가 후암동(厚岩洞)이라고 부르는 동네는 이 지도가 시사하듯이 두꺼비 바위(蟾岩)가 있던 곳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두껍(蟾)을 두껍다, 두텁다(厚)로 잘못 해석했음을 알 수가 있다. 후암동은 두꺼운 바위가 아니라 두꺼비 바위가 있던 동네였던 것이다.

남묘(4)는 동묘를 설명할 때 이미 소개한 바 있으니 설명은 줄이려 한다. 내 친구 ‘하마’가 살던 곳이 도동 1가였는데 친구 집 바로 위에 남묘가 있었던 기억이 새롭다. 1598년 임진란 때 구원병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진인(陳寅)이 동묘보다도 3년 앞서 세운 관운장 사당이다. 지금의 힐튼호텔 주차장(또는 남산 트라펠리스) 자리라고도 하는데 1979년 국립현충원 아래 사당동으로 이전하였다. 규모는 동묘에 비해 아주 작다.

 

남산의 백범광장. 사진 = 이한성 교수
단원 작 ‘무동’. 서울 심볼마크는 이 무동의 팔 곡선을 채용했다.

끝으로 겸재의 이 그림 목멱조돈은 서울시 심볼 마크가 되었음도 살피자. 단원의 그림 무동(舞童)의 춤추는 모습의 유연한 선(線)과 겸재의 목멱조돈 속 해를 결합한 이미지라 한다. 그러고 보니 심플하고 유연한 모습이다.

서울의 심볼 마크가 된 겸재의 태양


이제 백범광장으로 내려간다. 광장 동편에는 백범 김구 선생像, 이시영 선생상이 있고 그 아래쪽으로는 김유신 장군의 기마상이 달리고 있다. 남산도서관 방향에는 퇴계 선생, 다산 선생의 상(像)이 서 있고 옆 층계 쪽으로는 소월시비가 서 있다.

이제 긴 목멱 연재를 마치고 한양도성 성벽길을 따라 내려간다. 남대문 시장에 들려 목을 축여야겠다.
 

<이야기 길에의 초대>: 2016년 CNB미디어에서 ‘이야기가 있는 길’ 시리즈 제1권(사진)을 펴낸 바 있는 이한성 교수의 이야기길 답사에 독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매달 마지막 토요일에 3~4시간 이 교수가 그 동안 연재했던 이야기 길을 함께 걷습니다. 회비는 없으며 걷는 속도는 다소 느리게 진행합니다. 참여하실 분은 문자로 신청하시면 됩니다. 간사 연락처 010-2730-7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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