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컴컴한 땅 속에서 경계 태세를 세우고 바깥세상을 지켜보는 듯한 어떤 인물의 불안정한 모습. 하지만 어두웠던 화면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밝아지고, 활짝 꽃이 핀 세상을 자유롭게 호령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눈에 띄기 시작한다. 이 모든 변화의 흐름이 강광 작가의 화면에 담겼다.
가나아트가 1970년대부터 오늘날까지, 동시대의 역사적 맥락을 담으며 독자적인 화풍을 구현해 온 강광 작가의 초대전 ‘아름다운 터에서(The Land)’를 9월 22일까지 연다. 작가는 지난해 제주도립미술관에서 작업 세계를 총망라하는 대규모 개인전을 열며 주목받은 바 있다. 이번 가나아트 전시에서는 1970년대 미공개 작품을 비롯해 민화적이고 황토적인 특색을 지닌 작품들을 주로 선정해 관람객들에게 선보인다.
작가는 6.25 전쟁, 월남전 참전, 민주화 운동을 몸소 경험했고, 이 혼란스러운 시기는 그의 작업에도 고스란히 반영됐다. 관련해 작가는 “예술가는 한 시대를 고발하고 정화시키는 예언자”라고 자신의 생각을 작가노트에 드러내기도 했다. 특히 그는 한국 근현대사 속 격동기의 특수한 상황을 자연이라는 소재를 통해 작업에 녹여내는 방식을 이어가 주목받았다. 작가에게 자연은 단순히 재현할 수 있는 매재(媒材)가 아니라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는 상징물과도 같았던 것.
제1전시실은 1970~1980년대 초 작가의 작업에 집중한다. 유신 체제의 종말과 신군부 세력의 득세로 어지러운 정국을 맞던 이때 작가는 제주도에 있었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현실 비판적 예술 활동을 전개하는 미술가들이 주축이 돼 만든 모임들이 생겨나면서 ‘민중미술’이라는 새로운 사조가 등장했다. 작가 또한 현실 비판 의식을 작업에 담은 가운데 자신만의 독자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했다. 현실주의를 주창하며 구상적 형상에 집중한 여타 민중미술가와 다르게, 작가는 구상과 추상을 모두 아우르는 방식을 모색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점이 ‘그날’(1981) 작업 등에 드러난다. 적막 속 땅 속에서 보일 듯 말 듯 살며시 얼굴을 드러낸 인물은 당시대의 어두운 분위기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구체적인 형상을 가지기보다는 추상적인 형태로 표현됐다. 당시 정물화에 사용되지 않던 동물의 뼈를 작업에 등장시키는 시도도 ‘화실’(1982) 등을 통해 보여줬다.
가나아트 측은 “1970~80년대 작가의 작업은 제한된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가 특징이다. 작품에 추상과 구상의 특성이 모두 나타난다”며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에 묘사된 산과 길 그리고 나무와 꽃의 형태들은 분명하게 구상성을 띠고 있으나, 원근법과 사실적 묘사와 같은 회화적 기교는 완전히 배제됐다”고 밝혔다. 이어 “기하학적인 형태로 반복적으로 이뤄지는 산과 나뭇가지, 푸른 색면으로만 묘사된 하늘은 그가 동시대의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조형성을 실험했음을 보여준다”고 덧붙였다.
제1전시실이 작가의 작업 초기 즉 ‘습작기’에 집중한다면, 제2전시실은 구상과 추상의 혼합이 더 다각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1980년대 중기~1990년대 작업들을 보여준다. 이 전시실에서 작가는 “가장 애착이 가는 작업”이라며 ‘봉화도’(1988)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는 “어떤 상황이나 장면을 보고 그려야겠다고 마음을 품기보다는, ‘이 이야기를 어떻게 표현해볼까?’ 하고 생각이 생각을 잇는 식으로 그림을 그린다. 그래서 사람 사는 세상의 상황 변화에도 관심을 갖고 본다”며 “이 가운데 ‘봉화도’는 제주도에 갔을 때 처음으로 무언가를 그려봐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한 작품”이라고 말했다.
빨간색과 검은색만 주로 사용된 이 작품은 화려한 색으로 이야기를 꾸미기보다는 솔직한 감정을 담백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그의 색 사용 철학 또한 보여준다. 작가는 “나는 화려한 색은 쉽게 싫증을 느낀다. 그림 속에 살아 있는 철학을 담을 수 있는 깊은 맛이 있는 색을 즐겨 사용해 왔다. 작가가 선택하는 색은 한마디로 자기인식의 표현이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우리 호랑이가 마라산에 살아야 한다”
제3전시실은 작가의 2000년대 이후 작업들을 선보인다. 앞선 전시실 작업들과 비교해 분위기가 많이 밝아진 점이 특징이다. 무채색에 가까웠던 색채는 아주 화려하지는 않지만 보다 다양성을 띠기 시작했고, 땅속에 숨은 인물 대신 세상을 자유롭게 누비는 호랑이, 새, 그리고 아름답게 피어난 꽃과 나무 등을 화면에 채워놓았다.
가나아트 측은 “1990년대 후반에 완성된 작가의 작업들에는 향토성이 강하게 나타나며 우리나라 민화와 같은 느낌을 준다. 해학적으로 묘사된 호랑이가 등장하기도 하며, 평면으로 패턴화된 꽃과 나무들이 나타난다”고 밝혔다.
이어 “작가는 새로움을 향해 가기 위해 과거사를 무조건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조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서 전통을 재해석하기 시작했다”며 “한국 근현대사 속 비극을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이라는 두 갈림길에서 자연이라는 소재를 사용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형태로 구현해냈다”고 설명했다.
작가는 ‘호랑이가 있는 풍경’(2000)에 글씨도 적어놓았다. ‘우리 호랑이가 마라산에 살아야 한다’고. 그는 “단순한 동물이 아닌, 우리의 정신과 강인함을 상징하는 존재로서 호랑이를 그렸다. 우리 민족은 여러 풍파를 겪어 왔다. 이 가운데 우리의 호랑이가 나타나서 우리 것이 아닌 것을 물리치고, 굳건한 정신을 세워주길 바라는 마음을 작품에 담았다”고 말했다.
이밖에 ‘지킴이’(2007)에서는 꽃과 조화를 이룬 호랑이의 모습이 인상적이고, ‘5월의 풍경’(2007)에서는 아름다운 꽃비가 내리는 모습 등 과거 작업과 비교해 한층 밝아지고 다채로워진 화면이 눈길을 끈다. 가나아트 측은 “작가의 작업에서 나타난 변화는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면서도 한편으로, 개인의 감정을 위로해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자 했던 작가의 양가적인 마음이 투영된 것”이라고 밝혔다.
이 전시실에서 작가는 좋아하는 작업으로 ‘아름다운 터에서’(2005)를 꼽았다. 작가는 “이 그림은 내 마음에 그림이 딱 들어온 순간 마무리됐다. 감정선이 애매하지 않고 마음에 온전히 들어올 때 딱 끝냈다”며 “멍하고 나태한 상태에서는 좋은 그림이 나오지 않는다. 무언가 그려야겠다는 심각한 충격을 받아야 작가로서 붓을 들게 된다”고 말했다.
그런 작가는 요새 좀처럼 붓을 잡고 있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을 그만둔 것도, 그만둘 생각도 없다. 그는 “그림을 그릴 때 반복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 늘 새로운 글과 그림을 추구한다. 새로운 스타일의 그림이 그리고 싶은 순간 열심히 그려서 다음 전시에 사람들에게 또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는 “어떤 복잡한 의미와 해석을 담기보다는 그리고 싶은 것, 내 마음에 들어오는 이야기들을 그린다”고 연신 강조했다. 삶에서 느끼는 순수하고 솔직한 감정들을 민화적인 느낌으로 화면에 담아내는 작가는 그림을 그릴 때를 기다리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가 살아 왔고 살아 갈 이 ‘아름다운 터’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