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정한 포즈로 힘겹게 서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한 노인의 모습. 노인의 마음을 반영한 듯 검은색으로 어둡게 칠해진 화면은 노인이 어떤 말을 건넬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또 다른 화면에서는 새들 한 가운데 앉은 한 남자가 아래를 바라보고 있다. 두 화면 모두 침묵이 감돈다.
갤러리퍼플이 배윤환 작가의 개인전 ‘아무 말도 없는 그림들’을 11월 15일~12월 28일 연다. 이번 전시는 갤러리퍼플 스튜디오 작가들의 작업을 소개하는 자리의 일환으로 마련됐다.
남양주 와부읍 월문리에 위치한 갤러리퍼플 스튜디오(G.P.S: Gallery Purple Studio)는 ㈜벤타코리아의 후원을 받아 2013년 1기를 시작으로 작가들에게 스튜디오를 2년 동안 제공해 왔다. 나아가 창작 활동에 열정을 발휘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고자 창작 공간과 전시 활동을 지속적으로 지원해 왔다. 1기 9명, 2기 8명, 그리고 지난해부터는 3기 8명의 작가가 입주한 상태다. 3기 작가로는 김성윤, 김신일, 배윤환, 유의정, 이배경, 이완, 조현선, 한경우 작가 등이 있다. 11월 15일 개막한 이번 전시는 배윤환 작가의 개인전이다.
배윤환 작가는 다양한 서사구조를 갖는 드로잉, 회화, 영상을 만들어 낸다. 이번엔 갤러리퍼플 3기 입주 작가로서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하며 받은 느낌을 바탕으로 작품으로 승화시켰다.
이전 작업들이 작가가 직접적으로 경험하거나 혹은 경험하지 않더라도 시의성 있는 내용이 작품을 관통하는 주제였다면, 이번 전시에서는 영상 소품에 쓰일 인형을 만들고 관찰하며 받은 영감이 이번 전시 작업의 출발점이 됐다. 짧은 동화 같은 이야기나 서사구조가 있던 과거의 작품들과 다르게, 신작은 스토리에 집중하기보다 인형을 만들면서 인형들의 이미지에서 발견한 소재를 캔버스에 담아냈다.
앞서 작가는 11월 2일까지 챕터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는 챕터투의 개인전 영상 작업에 사용될 영상소품을 갤러리퍼플 작업실에서 세 달 동안 만들었다. 작품의 재료는 폼보드, 천조각, 문구점의 공예소품들이 주가 됐다. 스톱모션 기법을 사용해 제작된 영상에 등장하는 인형들은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서는 움직일 수 없었다. 이 과정을 통해 제작된 인형들은 손을 넣어 움직이는 복화술 인형들이다.
작가는 인형을 제작하면서 또는 제작 후에 노숙인과 출퇴근 시간에 녹초가 된 사람들 또는 뉴욕에서 봤던 홈리스, 서울역의 노숙자들이 떠올랐다고 한다. 그는 “다듬어지지 않은 재료들로 투박하고 거칠게 만들어진 인형들의 형태, 이것저것 기워 만든 누더기처럼 보이는 옷의 질감을 보고 느낀 감정이었다. 동시에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작업실의 풍경 안에 드러누워 있는 인형들이 더욱 더 그런 이미지들을 떠올리게 했을 것”이라고 작업 노트에서 밝혔다.
작가에 따르면 그 인형들은 일반 사람들과 다르게 표정, 주름, 동세 등이 과장돼 있었다. 그리고 작업실 안에 놓인 인형은 기대어 놓은 그림과 벽에 걸린 그림처럼 보였다고 한다. 사람의 도움 없이 움직일 수 없는 인형들이 정리되지 않은 작업실에 놓여있는 모습을 작가는 ‘회화’ 그 자체로 받아들였다. 회화의 덩어리로 인식한 이미지를 작가는 캔버스에 유화로 담아낸 것. 그 결과물이 이번 전시에 펼쳐진다.
작가는 “힘이 빠져 버린 사람들이나 근육이나 뼈가 없어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인형들은 벽에 걸려 있거나 기대어 있는 그림처럼 조용하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다가 제작된 인형들을 보면서 내가 관찰한 사람들을 소재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며 “이때 서로를 응시하는 얼굴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그림을 닮아 있어서 서로 그림을 감상하듯 아무 말도 없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