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라는 말을 좋아한다. ‘나’와 ‘너’ 명확하게 선 긋는 대신, 나와 당신을 비롯해 여러 사람을 1인칭으로 묶는 정 많은 단어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모두’가 붙으면 금상첨화다. 단어와 단어가 합쳐진 것에 불과한데 ‘빠짐없이 전체’라는 의미가 되니 세상 따듯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과연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우리 모두’라는 표현 안에 모든 사람이 포함돼 있었을까.
10여 년 전 중고등학생 시절엔 ‘봉사활동’이 필수였다. 그때만 해도 소위 말하는 ‘내신 채우기’를 위해 하기 싫어도 울며 겨자 먹기로 봉사활동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경우가 아니라면 정말 봉사활동 자체를 즐기거나, 이마저도 아니라면 내키지는 않았어도 막상 하고 나면 보람을 느끼는 학생으로 유형이 나뉘었다. 기자는 단연 마지막에 속했다. ‘아 가기 싫어’ 하다가도 막상 봉사활동을 다녀오고 나면, 그곳에서 만난 이들이 눈에 밟히고 내심 신경 쓰이는 거였다.
관공서나 사회시설에 많이 방문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노인요양시설에서 만난 한 어르신이다. 치매를 앓거나 몸이 불편한 분들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는 이야기꾼이었다. 비록 몸이 불편한 탓에 휠체어를 이용했지만, 정신만은 그 누구보다도 뚜렷했다. 주로 군대 시절 있었던 이야기를 재미나게 말씀해 주셨는데, 여러 차례 방문하다 보니 꽤 친해져 이런저런 속마음도 내비치곤 하셨다. 그중 어느 날 하신 말씀이 아직도 머릿속에 강하게 남아있다. 어르신은 “비참하다”고 했다.
그는 “내 정신은 누구보다 맑은 것 같은데, 거동이 힘들다 보니 휠체어에 의지해야 하고 결국 도움 없이는 생활하지 못해 비참하다”면서 “더 비참하게 하는 건 세상”이라고 했다. 무심하게 지나친 모든 것들이, 지금 보니 ‘걸림돌’이라고 말했다. 어르신은 “내가 몸이 불편하고 난 뒤 느낀 건데, 정상인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상이 장애인들에게는 죄다 위험투성이다. 하천 경사로만 봐도 그렇다. 장애인 편의를 높이는 것 같이 보이지만, 완만하게 만들어진 경우는 별로 없다”고 말했다. 이 같은 슬픈 하소연 속에서 ‘우리 모두’는 없었다. 그저 장애인들에게 세상은 가혹하게 다가오는 듯했다.
10년이 지난 현재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시각장애인이 겪는 불편함만 봐도 그렇다. 점자 블록 설치가 돼 있지 않은 경우가 많고, 또 모든 캔 음료에 구분 없이 ‘음료’라고 표기돼 시각장애인의 선택권은 존중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불고 있다. 일부 유통 업계를 중심으로 일명 ‘모든 사람을 위한 디자인’으로 불리는 ‘유니버셜 디자인(uiversal design)’이 사용되거나 점자 서비스 등을 도입하는 사례가 늘어나고 있다. 장애인·비장애인을 아우르는 ‘우리 모두’가 평등한 생활을 누리기 위한 시도인 셈이다. 아직 보편적으로 이르진 못했지만, 해당 노력이 다양한 분야로 번져나가길 바라본다. ‘우리 모두’가 주는 따뜻한 어감 그대로 모든 사람을 포괄하게 되리라 믿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