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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칼럼] 웃는 시무식이 진지 시무식보다 한 수 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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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nbnews 제664호 최영태 편집국장⁄ 2020.01.13 09:04:59

(최영태 편집국장) 시무식과 웃기기. 중장년 이상의 한국인에겐 이 두 단어처럼 어울리지 않는 조합도 드물 것 같다. 시무식이란 게 1년 업무를 시작하면서 파이팅과 결의를 다지는 모임인데, 이 자리가 하하하 웃는 자리가 된다는 건, 권위주의적인 사람에겐 몸서리쳐질 만큼 끔찍할 듯싶다.

그런데, 실제로 올해 대기업 시무식에선 이런 장면들이 연출됐다. 먼저 현대차그룹 정의선 총괄수석부회장은 올해 시무식에서 “떡국은 드셨냐”는 가벼운 인사로 시작했고, 참석 임직원 대부분이 캐주얼한 복장인데 유독 자신만이 넥타이 차림인 것에 대해 “대한상공회의소 신년회 참석을 위해 입은 것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며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고 한다. 대기업 총수가 자유복을 입은 임직원에게 ‘농담’이라니! 60대 이상이라면 “나라가 거덜날 일”이라며 탄식을 내뱉을지도 모르겠다.

‘꽃쥐 헤어밴드’로 새해 첫날 맞은 은행장

임직원이 환하게 웃은 시무식은 또 있다. KEB하나은행 지성규 행장의 1월 2일 새해 첫 업무일 시작 행사였다. 서울 을지로 본점 로비에서 ‘꽃쥐 머리띠’ 또는 ‘미키 마우스 머리띠’로 치장한 지 행장과 임원들이 출근하는 직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는 장면이었다. 

 

미키마우스 머리띠에 꽃 장식까지 붙인 지성규 KEB하나은행장(오른쪽)이 역시 머리띠를 장착한 임원들과 함께 1월 2일 새해 첫 출근하는 직원들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지 행장은 하루 앞서 1월 1일엔 100여 명의 임직원과 을지로 신사옥 24층에 새롭게 오픈하는 스마트워크센터에서 일출을 함께 감상한 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를 감상하면서 상상이 현실이 되는 한 해로 만들 것을 다짐했다니 이것 또한 “미국스럽다”고 표현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LG그룹은 근엄한 시무식을 아예 생략했다. 대신 구광모 회장이 동영상 이메일을 전사원에게 보냈다. 그 동영상에서 구 회장은 “고객 행복이 LG 구성원의 즐거움이 돼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고 한다. ‘LG 직원의 즐거움’이란 단어를 읽으면서 필자는 이런 생각을 해 봤다. “내가 즐겁지 않은데 남을 어떻게 즐겁게 할 것이며, 직원들이 재밌고 행복하지 않은데 어떻게 고객을 재밌고 행복하게 하겠느냐?”는 질문이다.

 

지난해 첫 시무식에 데뷔한 뒤 올해 두 번째 시무식에서 전통 방식의 시무식을 없애고 동영상 이메일을 전 직원에게 보낸 구광모 LG그룹 회장의 메시지를 LG 직원들이 시청하고 있다. 사진 = LG그룹

지난 호 CNB저널에 <[2019 재계] 정의선·구광모·조원태, 40대 그룹 오너십의 기업문화 혁신 행보>란 기획 기사를 쓴 윤지원 기자는 이번 호에 관련 기자수첩으로 <현대차·LG그룹의 젊은 리더가 만드는 변화 … 구글처럼 ‘꿈의 직장’ 가능할까?>(48-49쪽)를 썼다. 이 기자수첩의 한 대목이다.

전 세계 모든 구글 지사는 전 직원에게 하루 세끼 푸짐한 뷔페를 제공하며, 커피와 음료, 간식 등도 무료로 제공한다. 마사지실도 갖춰져 있다. 심지어 2층 사무실에서 1층 식당에 갈 때는 미끄럼틀을 타고 내려가는 ‘재미있는’ 직장이다.

구글은 왜 천재를 모아놓고 웃기려 드나

2층에서 1층으로 내려가는 ‘표준적’ 방법은 계단 또는 엘리베이터-에스컬레이터겠지만, ‘재밌는’ 방법은 미끄럼틀이다. 다 큰 어른들을 잠시 동심으로 돌아가게 만들 것 같다. 표준적 방법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이처럼 재미있는 방법을 동원하는 데는 뜻이 있을 듯 싶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구글 직원이 불행한데 어떻게 구글 고객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며, 구글 직원이 회사에 오는 게 지긋지긋한데, 구글 서비스를 방문하는 고객들을 재밌게 만들겠냐는 데서 이 미끄럼틀 하강법이 적용됐을 법도 하다.

 

미국 새너제이 구글 본사의 미끄럼틀. 2층과 1층을 연결하는 데 이렇게 공간을 차지하고 돈도 추가로 드는 방법을 적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해봐야 할 때다. 사진 = Robert Nyman(flickr) 

구글의 직원 채용법은 여러모로 참고할 만 하다. 창업자가 ‘천재급’인 구글은 이후 직원 채용 과정에서도 ‘천재급만을 뽑는다’는 원칙을 적용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 방식은 이렇다. 직원 채용 광고를 언론매체에 내는 게 아니고, IT 전문가들이 보는 잡지에 요상한 퀴즈처럼 보이는 쪽광고를 낸다. 둔감한 사람은 이 쪽광고의 의미 자체를 읽을 수 없기에 “별 이상한 내용도 다 있네” 하고 지나치지만 머리가 비상한 천재급들은 이 쪽광고의 난수표 같은 내용을 보며 “아하, 요건 어디로 가서 뭘 보라는 소리네”라고 그 의미를 포착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런 단계를 몇 차례 통과해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 천재급만이 ‘구글이 현재 채용 중’이라는 내용을 알 수 있게 했다는 스토리가 미국 언론에 소개된 바 있다.

이렇게 천재급들을 모은 뒤 구글 창업자들이 한 게 바로 위의 미끄럼틀처럼 ‘재밌게 일하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었다. 둔재들을 모아놓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면, 일하지 않고 노는 데 그치겠지만, 천재급들을 모아놓고 재미있게 만들어 주면 천재급들은 노는 데 그치지 않고 기상천외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게 마련이다. 팽팽 돌아가는 천재들의 두뇌는 노는 데 그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고의 직장을 만드는 요체는, 구글 식으로 말하자면 ‘천재를 모아서 깔깔 웃게 만들어라’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정의선-구광모의 두 번째 시무식은 달라

70년대생 대기업 총수로서 지난해 첫 시무식(전통 방식의)에 데뷔했던 현대차 정의선 부회장과, 구광모 LG 회장이, 올해 두 번째 시무식에선 모두 전통을 파괴하는 파격적 면모를 보였다는 점은 뜻하는 바가 크다. 구글 본사만큼은 아니더라도 한국의 대기업, 그것도 톱 4 대기업의 신입사원들은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그런데 이 한국 최고의 인재들이 대기업에 들어간 뒤 “행복하고 재미있기만 했냐?”고 묻는다면, 그간 주위에서 들은 바를 종합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대기업에 들어왔지만 피곤하거나 지루해서 미치겠다”는 소리도 그간 들려왔다.

이랬던 나라에서 최고 대기업 시무식이, 그리고 주요 은행의 시무식이 재밌게 바뀌어 간다는 소식은 그 자체로 즐겁다. ‘한국은 일본의 뒤를 일정한 시차를 두고 뒤쫓아간다’는 게 상식이었지만, 최근 일본 아베 정권의 느닷없는 대(對)한국 수출 규제를 겪은 뒤에는 이런 공식도 없어져가는 추세다. 한국의 민주 정치가 일본과 다르고, 한국 대기업-은행의 시무식이 달라져간다는 데서 ‘일본과 다른 길을 갈’ 한국의 미래를 즐겁게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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